모 기독교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책 관련 프로그램에 저자와의 만남 같은 것이었습니다. 9월 즈음에 약속이 되었고 지난 화요일이었죠. 전날에도 담당 작가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라디오인데다 방송 시간도 짧으니 방송 전에 입을 맞추려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 쪽으로 섭외가 된 것이라 진즉에 받은 공문도 있어서 당일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주차를 하고 공문에 있는 전화로 연락을 했으나 딱히 방송국 담당자가 아닌 것 같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헤매다 지나가는 분께 물어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프로그램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분이 작가 겸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방식이었는데 통화를 해보니 지금 부산에 계시다고! 녹음 시간이 확정될 때까지 출판사 본부장님과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았고, 일시가 명시된 공문을 받았으니 확실하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담당 아나운서가 제 번호를 잘못 입력할 탓에 통화를 시도 했으나 안 되었다고 하고요. 친절한 직원 한 분(제 가방에 달린 노란리본으로 바로 공감대 형성이 되었습니다)이 아나운서께 전화 연락도 해주고, 배웅도 나오면서 '다시 연락되어 꼭 나오시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실은 제가 마음이 상해서 다시 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하고 나왔습니다.


출판사 본부장님께 상황을 알리고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청취자 증정용으로 보낸 책(나의 성소 싱크대 앞) 몇 권을 꼭 회수해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어버버버 하면서 방송국 입구를 헤매던 나처럼 갈 곳 잃은 내 책들이 방송국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까, 그것이 싫어서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 연결자인 출판협회 사무국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방송국 담당자인 줄 알고 내가 전화했던 분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사과하시고 담당 아나운서 분도 무척 미안해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상황 알겠지만 다시 방송에 나가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음 푸시고 다시 시간 잡으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담당 아나운서가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로 확고해졌습니다. 단지 삐져서 안 나가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길게 설명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제게 말했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너를 함부로 사용하지 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순서에 역행하는 거야" 


실은 방송국에서 나와 주차장까지 걸으며, 운전하고 나오면서 화가 난다기 보다는 슬펐습니다. 슬픔을 가장한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있는데 존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나운서는 일처리에 실수했을 지언정 나라는 존재를 함부로 대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어중간하게 알려진 작가로서 괜한 피해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다 밝히기 어렵지만 더 고질적인 쓴뿌리도 있습니다. 물론 맡은 일을 꼼꼼히,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은 이미 이웃에 대한 존중인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해, 고마워 백 마디 말보다 약속을 지켜 일을 챙기는 동료가 진짜 배려심의 사람일 수 있고요. 가족적인 분위기로 기분 내키는대로 비싼 밥 사주는 사장보다  합리적인 월급을 제때 챙겨주는 사장이 직원의 자존감에 더 기여할 거구요. 저도 남부럽지 않은 헐랭이로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반성하곤 합니다. 내 작은 실수가 누군가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생각이 여기 미치면 더욱 슬퍼집니다. 실수를 실수로 받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처난 마음. 아니, 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가사처럼요.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딪히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든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운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그러게요. 그저 늘 부는 바람이 지나갔을 뿐인데, 그 바람에 내 마음의 가시들이 흔들려 서로 찌르고 울어댑니다. '나를 해하려 하는 거야,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를 싫어하는 거야'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집에 와 채윤이에게 터져버렸습니다. 농담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분노 폭발하는 엄마에 당황한 채윤이. 채윤이를 희생양 삼아 감정의 에너지가 한 김 빠져나갔습니다. 조금 평상심을 찾고는 희생양 채윤이에게 사과하고,  희생양을 신부님 삼아 고해성사 했습니다. '엄마가 다시 나가지 않겠다고 한 거 잘한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허허 하고 이해하는 척 할 수도 있었거든. 그러면 좋은 사람 같아 보이잖아. 처음엔 좋은 사람, 나이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던 것 같아. 그래도 작가라 불리며 조금은 알려진 사람인데.... 그렇게 마음이 복잡했었던 거야.' 채윤이도 '착한 애 코스프레'에 지쳐서 요즘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얘길 했습니다. 모녀 함께 훈훈, 지질한 결론을 냅니다. '어쩌겠어. 착하지 않은데..... 그래도 착하지 않은 나를 내가 편들어 줘야지.' 저녁에 아나운서 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시고 다음에 꼭 다시 나오시면 좋겠다, 했습니다.  방송에 나가진 않겠지만 마음이 안 풀린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어디서 만나든 좋은 마음으로 볼 수 있다고요. 이 얘기를 들은 친구가 농담으로 '갑질 했네'라고 했지만 진심 갑질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다시 출연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편해졌지만 지질한 나의 곁을 내가 끝까지 지키줘야지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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