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몇 년은 '휴가' 아니라 '피정'을 다녔었다.

일주일 쉬는 것은 같은데 어디서는 '휴가'라 부르고 드물게 '피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차피 쉬는 것은 같으니까 그게 그것이기도, 말은 단지 말이 아니니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딱 일 년 전, 둘이 다녀왔던 '인생 피정'을 복기하고

아이들 어릴 적 함께 했던 여행들을 추억하며

여러 번 계획을 바꾸다 결정 또는 지른 것이 제주 가족여행이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행을 가면 더욱 너그러워지는 아빠, 또는 남편.

견주어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딜 나가면 더욱 잔소리가 많고, 쪼잔해지고는 엄마, 또는 아내.

넉넉한 아빠를 누리는 아이들을 은근히 질투까지 하는 엄마 또는 아내는

의문의 일패, 이패, 삼패를 당하다 왕따를 자처하여 '스따'가 되기도 한다.

가진 어둠이 많은 엄마는 늘 그렇다.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감정에 이름 붙이고, 흘려 보내야 비로소 칠렐레팔렐레 에헤랴디야 제대로 놀기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숲이지.

여행은 걷는 거지.

는 엄마 아빠 생각이고, 중2는 그러려면 나를 왜 데려왔냐!이다.


좋아, 비자림, 사려니숲, 곶자왈...... 나도 걷고 싶어.

 흔쾌히 따라나서는 딸은 다 컸네, 다 컸어.

하긴 검정고시 합격하여 당당한 고졸이 되었고, 곧 민쯩도 나오니 다 컸지.




결국 중2는 숲을 걷는 대신 비자림 입구 카페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차에서 보겠다는 걸 '영화 보다 더워서 죽는다' 설득하여 아이스티 한 잔 사주고 카페에 집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지고 10분 띠리링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 나 그냥 차에서 있을래. 안 더워'

도대체 왜? 그 시원하고 편한 카페를 두고 땡볕 아래 찌는 자동차 안?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쪽팔려서'

카페에 들어온 사람, 길을 걷는 사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님'에게 1도 관심이 없단다.

이걸 납득시키려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블랙홀에 빠지고 말테니 입을 닫자. 




하긴 중학교 입학식에서 '단지 사진 찍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쪽팔린다는 이유로입이 댓발 나왔던 딸이 폰카를 붙들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사춘기 블랙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이~이리 오너라 앞태를 찍자,

저~어러리 가거라 뒷태를 찍자,

들이대거라 셀카를 찍자.

우리 딸은 사진 100장 찍어 한 장 건지는 것으로 행복한 여행이다.

  


아, 사진 얘기가 나왔으니 고발하고 지나갈 일이 있다.  

중딩은 벌써 개학을 했고 학기 중이다. 해서 '체험학습'을 내고 합류한 여행이다.

(이걸 결재하며 또 얼마나 뻣뻣하게 굴던지!

이유는 친구들 다 등교하는데 학교 한 가는 것이 튀니까,

튀는 건 쪽팔리니까!)

체험학습 보고서를 써야 하고, 거기엔 꼼꼼하게 사진을 붙여야 한다.

이 중2가 삐딱하게 굴다가도 간판만 보면 '나 사진 안 찍어?' 하고 차렷자세로 선다.

이 국회의원 같은 놈을 보게! 




비행기 시간 기다리며 공항 근처를 맴도는 마지막 날 오후에는 해변의 카페다.

꺼내 놓은 책들을 보니 책 제목으로는 임자 찾기기 쉽지 않다.

음료 종류를 살피는 것이 더 빠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법천자문, 메이플스토리, 슈가슈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책들이 눈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책만 보면 성인 넷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커버린 아이들을 두고 자꾸 어릴 적 추억만 떠올리며 그리워 한다.

어린 아이 취급하며 잔소리 하는 엄마, 아직 '어제'를 살고 있는 엄마를 좋아할 리가.

유유유.



꿈같은 시간 보내고 돌아왔다.
삼 시 세끼 밥 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거실 탁자에 소국 화분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지난 주일 쭈네 가족이 우리 교회 예배 드리러 오며 들고 온 것이다.
화분이 너무 예뻐서 이걸 두고 휴가를 가기가 아쉽다며 물 듬뿍 주고 아쉬운 발걸음을 했었다.
쭈가 미리 들고 온 가을이, 가을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다.

여름의 끝을 잡고 충분히 놀았으니
떠나야 할 여름 떠나게 두고
코앞에 다다른 가을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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