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얼마 전 당신이 내게 화난 표정으로 ‘무늬만 페미니스트’ 라고 한 말을 곱씹어 생각해 봤어. 사실 페미니즘이란 용어와 주장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나인데, 언제는 내게 그 누구보다도 더 훌륭한 페미니스트라고 칭찬하더니, 주일아침 식사준비와 정리에 소홀했다고 며칠도 안가 다시 ‘무늬만 페미니스트’ 라고 비난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내가 설거지를 안 하고 팽개쳐 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의 말처럼 귀찮아서 그랬다거나 몰지각하게 텔레비전에 푹 빠져서 그런 건 아니었거든. 가급적 텔레비전을 안 보려고 했지만, 토론의 이슈와 인물이 내 시선을 뺏어 간걸 어떻게 해. 내용이야 어쨌든 TV 앞에 오래 앉은 나머지 당신을 돕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실망과 포기의 메시지로 읽혀질 만한 그런 표정과 말투로 ‘당신은 무늬만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한 건 처벌치고는 너무 과한 거 같아. 칭찬 받고 우쭐해져 있다가 금방 다시 꾸지람 들은 베드로의 기분이 조금 이해되네.(^^)

나는 전통적인 가(부)장의 이미지가 내 의식과 습관 속에 어른거지지 않나 꽤나 자주 살피는 편이지. 내 기질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단 걸 당신도 잘 알거야. 그렇지만 한국 남성의 유전인자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학습되고 고착된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게으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종 꼴불견 같은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라는 기준으로 내가 평가받는 건 좀 그래.

SS
홧김에 한 말을 가지고 너무 심각해지는 거 아냐? 누가 들으면 나는 맨날 남편 설거지나 시키고 손빨래 하다가 순교할 결심까지 하게 하는 악처로 알겠네. 맞아! 당신 말대로 '페미니스트' 라는 잣대로 당신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아. 언젠가 당신에게 '당신은 페미니스트야?'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 때 당신은 '페미니스트? 나 결혼하고는 그런 생각 해 보질 못했는데... 결혼 전에야 그 쪽 책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런 저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에이~ 뭐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뭐' 했었지.
당신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없지만,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 페미니즘을 가장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얘길 했었지. 흔히 아내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봐 주는 정도의 통제도 당신은 애써서 하지 않는 듯 보이니까. 어떤 남편들은 자기 아내의 머리 스타일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생머리, 절대적으로 긴머리... 등을 고집하기도 한다지만, 당신은 '하고 싶은 스타일을 해봐' 하고 말하곤 하잖아. 그래서 '이 남자는 딱히 좋아하는 스타일이 없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니더구만. 암튼, 단지 아내한테 잘 한다기보다는(사실 그렇게 잘 하는 편도 아니지 않어? ^^) 여성, 아내에 대해서 가부장적 사회가 주는 편견을 가지고 대하질 않지. 가장 내지는 남편으로서의 권.위.의.식,이 없다는 것, 그 점이 훌륭하다는 것이었어.

이런 점을 당신의 장점으로 인정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성숙의 과정이 있었던 것 같아.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듯이 '가장' 이라는 용어 역시 왠지 당신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지 같아. 결혼 하고 얼마 동안 나는 ‘가장이라는 신화’ 에 당신을 꿰맞추느라 혼자 안간힘을 썼던 것 같아. 민주적인 것도 좋고, 아내를 향해서 권위적이지 않은 것도 좋다, 그러나 ‘여보!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 줄께!’ 하면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면서 ‘이 남자는 가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심을 했었지. 그러면서 매우 불안했던 것 같아. 도대체 '가장' 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당신을 향해서 '가장' 이 되길, '영적가장' 이 되길 요구하고 압력을 넣고 그랬던 것 같아. 돌이켜보면, 대체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어떻게 해 주길 바랬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면서 말야.

JP
가장? 그러고 보니 가장이란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릴 지 말지를 놓고 고민한 게 꽤 되네. 신혼 초였지 아마도. 내 생각과 내 주장들이 자주 당신한테서 튕겨져 나온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쉽진 않은 일이었지. 으레 남자인 남편이 진지하게 사건과 상황을 해석해서 설명해주면 여자인 아내는 응당 ‘아 그렇구나. 맞아요, 당신 생각이 옳아요’ 하는 그림이 나와야 하는 건데, ‘너만 아냐?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 좀 해’ 하는 식으로 내 얘기 듣는 게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당신을 보며 ‘이거 봐라~ 내가 명색이 가장인데. 에잇! 가장은 무슨 가장? 말이 씨도 안 먹히는 가장? 당신이 가장해!’ 이렇게 선언해 버렸던 게 생각나네. 그랬지. 그땐 당신이 나보다 돈도 많이 벌고, 공부도 더 많이 했고, 나이도 나보다 더 많으니 당신이 가장하는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당신을 설득하고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할 만한 게 내겐 없다고 믿었던 거야. 글쎄 내가 돈 좀 많이 벌거나 직업이라도 좀 안정됐으면 좀 달랐을까? 암튼 ‘가장 포기선언’ 이 홧김에 한 거라 별 모양도 안 좋았고, 그저 부부간의 상호 불간섭이랄까 그냥 적당하게 거리유지 하는 게 서로에게 편하겠다는 생각에 따른 거였기에 썩 좋은 결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당시 우리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들이 ‘가장’ 이란 상징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해서 부부파트너십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해.

내가 가장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가정의 남편이요 아빠로서 책임과 역할까지 다 집어던지겠다는 게 아니란 걸 당신 잘 알지? 요샌 대놓고 가장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젊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가만 보면 남편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책임과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야 집안에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지. 그렇지만 그건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버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잖아? 남편은 남편대로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살아야 하니 불편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가장의 권위와 본을 보이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불편하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주요한 일에 최종 결정권을 남편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고 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머리가 똑똑하거나 더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여자보다 남자를 더 우수하게 지으신 것도 아닌데, 도대체 신체적 조건 말고 남성 여성을 가를만한 근거가 있기나 한 건가?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닌 그냥 한 개인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서로 인정해 주고 끌어주고 세워주고 채워주고 그래서 서로 가장이 되고 서로 주부가 되면 될 텐데, 굳이 가장이란 책임을 혼자 지(우)려고 하는 이유는 뭐냔 말이야? (좀 흥분했나? ^^;;) 그러고 보면 ‘남편이 가정의 머리’ 라는 바울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 같아. 당신이 교회 유치부 지도교사로 봉사할 때 내가 유아실에서 애기엄마들과 같이 기저귀 갈고 우유타고 수다 떨며 보낼 수 있었던 건, 가장의식과 체면을 기꺼이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란 걸 당신은 인정해 줄 수 있지?

내가 가장의 권력과 의무를 포기하거나 나누려고 하고, 당신도 가장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나눠가지려고 한 건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만 권력을 당신과 나눠가진 내가, 그렇다면 주부의 의무와 역할도 어느 정도 나눠 가졌어야 했는데, 내가 아직 거기까지는 제대로 못나가니까 ‘무늬만 페미니스트’ 란 말을 들었겠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용두사미가 된 느낌이네.)

SS
며칠 전 강원도 다녀오던 길에 이런 생각을 했었어. 당신이 속이 거북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운전하면서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구. ‘여보! 내가 운전할까?’ 하고는 얼른 자리를 바꿔 앉아 조수석에 길게 누워 잠시 눈을 붙인 당신을 보며 속으로 말했었어. ‘여보! 이거야! 사회통념이 주는 틀에 사로잡혀서 무거운 책임감으로 힘들어하지 말고 언제든 쉼이 필요하면 내게 핸들을 넘겨줘. 나는 당신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먼 길을 혼자 졸음을 이기면서 운전하는 것 원하지 않아. 물론 내가 조수석에 앉아서 졸음을 쫓을 재밌는 얘기와 피로를 가시게 하는 노래를 들려줄 수도 있지만 때론 근본적으로 당신에게 쉼을 줄 수도 있거든. 어차피 우리가 가는 곳은 서울이고 어느 길로 갈지도 미리 얘기 했잖아. 물론 내 운전이 당신보다 서툰 것이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당신이 쉬고 있는 동안에 목적지를 향한 거리를 좁혀 놓기에는 충분해.’

결혼 초 당신의 ‘가장의식’ 을 의심할 때는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 주길’ 바라고 그것이 가장의 의무이며 생활인의 자세라고 생각했었어. 이제 다시 새로운 진로 결정을 해야 하는 당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그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알아? 단지 ‘가장으로서의 의무’ 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바람에도 충실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물론 개체로서의 김종필이 아니라 정신실과 하나됨에 충실한 김종필의 선택이 되겠지. 당신 뿐 아니라 교회와 직장에서 만나는 ‘가장들’, 가장의 짐을 지고 이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많은 남성들 또한 그렇게 짐을 나눠지려 했으면 좋겠어.


JP
운전대 잡는 일에 그렇게 깊은 뜻이?^^ ‘무늬만 페미니즘’ 이란 당신의 말,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아. 입으로는 이미 양성평등을 다 실현한 사람처럼 하면서, 막상 내 의식과 습관 속에는 가부장적 사고와 관습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으니 말이야. ‘남자인 내가 운전한다...’, 그래, 그 생각 유지하는 게 참 힘든 일이었지. 피곤하고 졸려도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내에 대한 사랑이고 남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이라고만 생각했었거든. 당신이 충분히 운전할 수 있는 데도 말이야. 그러고 보니 명색이 내가 교육학을 공부했는데 매 주 날아오는 채윤이 유치원 교육안 한 번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그런 건 다 엄마가 하는 거니까’ 하는 생각에 밀쳐뒀던 것도 전형적인 가(부)장의 행태지? 간혹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갔다가 아줌마들하고 마주치면 부끄러워하면서 '이런 건 여자들이 해야 되는 거 아냐?‘ 하면서 불평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고.

암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당신이 컴퓨터 조작 기술에 맹한 걸 보고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있었던 거 기억나? 그 때 당신이 그랬지. 요리에 전혀 취미가 없는 나와 맛의 배합에 뛰어난 감각이 있는 당신과의 차이점과 같은 이치라고 항변했었지. 그래 맞아. 컴퓨터를 다루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선생이 되고 당신은 배우거나 조력자가 되지. 반대로 요리의 주방장은 당신이고 나는 짬보가 되서 조력해야 맛있고 행복한 식탁이 만들어지지. 분위기 띄우는 건 당신이 잘하고, 정신없는 분위기 가라앉히는 건 내가 잘하고(?). 세세한 정리정돈은 내가 잘하고 전체적인 조화로움과 미적 판단은 당신이 잘하고. 아이들 양육에서도 마찬가진 거 같아. 당신은 흐트러진 아이들 잡아 세우는 데 능하고, 나는 경직된 아이들 풀어주는 데 좀 낫고.

그간 집안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나무’를 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당신이 결정해야 할 땐 당신이 가장이 되고, ‘숲’을 보는 데 그래도 쫌 나은 내가 나서야 할 땐 내가 가장이 되었지. 특히나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때도 그랬고. 구체적인 기도와 응답에 민감한 당신이 얻는 통찰과 좀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비전을 유지하는 데 민감한 내가 얻은 통찰이 배합될 때 우리 참 행복해 했었잖아.
나에게 가장이란 역할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본연의 내 모습대로 드러내고 발휘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도와준 당신, 새삼 고맙네.

SS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남자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페미니스트’ 라는 이름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남자들은 잘 보지 못했어. 교인들의 가정을 보살피느라 자신의 가정을 돌볼 틈 없어서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외로움에 버려두는 목회자들처럼 세상의 모든 여성을 위해 논쟁을 할 수 있을지언정 아내를 향해서는 아주 작은 선택의 자유도 부여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남편은 사양이야.
그런 면에서 ‘가장의 권위’ 대신 ‘부부 파트너십’ 을, 집 밖에서 말로만 외치는 ‘구호로서의 페미니즘’ 대신 치열한(?) 손빨래와 걸레질의 일상을 몸소 실천하는 당신에게 이 시대 최고의 ‘페미니스트 남편상’ 을 수여하는 바야. 부상(副賞)으로는 당신이 그리도 목숨 걸고 의미를 부여하는 손빨래를 평생 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어! (^^) 이만하면 ‘무늬만 페미니스트’ 라는 평으로 구겨진 자존심 다시 세우고도 남음이 있지?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 당신의 사고방식, 경직되지 않은 자세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당신의 성품으로 인해서 아내인 내가 누리는 복이 커. 고마워.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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