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을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씁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며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새해 선물로 받은 시이다. 지나온 1년, 3년, 10년, 30년 더듬어 걸어온 내 등 뒤의 길은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걸어서는 안 될 길을 걸어왔다고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는 것이 밥 먹고 하는 일이지만. 알고 보면, 그 높은 시선과 깊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일뿐이었다. 이 시를 보내준 이는 내적 여정 세미나 역사 상 강사인 나를 가장 크게 뒤흔든 수강자였다. 울다, 함께 울다 길을 잃어 강의안 포기하고 속에서 나오는 얘기를 그저 쏟아놓게 한 장본인이다. 그렇게 내적 여정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가족 여행을 떠난 그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더니 '피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답이 왔었다. '피'가 상징하는 것들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도울 수 없는 무력감에 마음이 너무 아팠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치유자'는 타고나는 것 아닐까 싶게 성품에 치유인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피의 크리스마스'를 메시지에서 확인했을 때, 1년 후 이런 동역의 벗이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도 나도 우리 모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더듬어 여기까지 왔다. 또 2020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을 더듬어 가야 할 것이다. 부조리와 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악을 이기게 하는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고, 고립과 상처를 유발하는 이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준 것이 없는데 많은 것을 되돌려주는 사람을 만나고, 많이 애를 써서 가꾸었는데 도리어 헤집고 망치는 이도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누군가의 길에 꽃 한 송이가 되기도, 누군가 가꾼 정원을 망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길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길임을 안다. 기꺼이 걷는 길이다. 2020년, 기꺼이 걷는 길을 다시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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