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강의를 간 곳에서는 시작 전에 꽃다발을 안겨 주셨습니다. 살짝 감동했지만, 다행히 주책 맞게 오버는 하지 않았고 '꽃이구나'하고 집에 왔습니다. 백합에 장미에 수국에, 무엇보다 소국이 조금씩 어우러져 있어서 헤쳐서 꽂아 놓으니 더 예쁩니다. 소국은, 소국은, 아 소국은 정말 저렇게 꽂아 놓고는 바라만 봐도 좋습니다. 왜 이리 소국이 좋을까요?


2.
이번 주에 두 번의 강의를 했는데 두 번 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단 얘기는 아닙니다. 마치고는 뭔가 마음이 묵직하다는 뜻입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얼굴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화요일엔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를 얻은 표정으로 돌아갔지요. 오늘은 강의 말미에 유난히 표정이 어두웠던 한 청년이 마음에 남습니다.


3.

에니어그램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져 돌아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매칭 프로그램에서 연애 강의를한 것이지만 말미에 '원가족'에 대한 얘기를 했으니 것도 역시 충분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문제는 내가 못 견디는 것입니다. '긍정, 웃음' 이런 것에 내가 불필요하게 매여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못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은 피해 가고만 싶은가 봅니다.


4.
10여 년 전에 처음 MBTI 강의를 할 때만 해도 나는 '긍정의 신'이었습니다. 혼신을 다해서 웃기고, 흥분한 상태로 강의하고, 그러고나면 만족감에 뿌듯해서 자뻑의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나를 잃을 정도로 흥분(몰입)한 상태에서 강의 하거나 지휘를 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내 열정에 취해서 쏟아내는 말들이 돌아서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갈수록 차분해지는 강의가 맘에 들기도 하고, 몹시 못마땅하기도 합니다.


5.
얼마 전 공선옥 작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담이었지만 '개그 콘서트 보면서 웃는 사람들 이해가 안 된다. 그게 도대체 왜 웃기냐. 그런 사회가 도대체 어쩌구 저쩌구....'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잘 듣고 있었는데 이 말을 하는 바람에 턱 막혔습니다. 딱 나에 대한 비난으로 들은 거지요. 개콘 보고 웃는 사람이 나요! 웃는 정도가 아니라 좋아서 죽어봐야 정신 차리는 열성팬이니까요.


6.
'개그 콘서트 보고 웃는 사람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라고 하면 될 것이지 하등동물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하등동물'은 순전히 듣는 입장에서 악의를 품고, 작정하고 오해해서 들은 것입니다요. 하등동물인 나 자신도 그렇지. 그거 그냥 '개그가 이해가 안 되나보다. 참 진지한 사람인갑다.' 하면  될 것을.... 생각해보니 상처를 깊이 받았더라고요. 개콘도 아닌데 갑자기 웃기네요.


7.
식구들 자고 잠도 안 오는데 원고나 좀 써볼까? 하고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접속을 했는데 다음초기 화면에 개콘 관련 다큐멘터리가 떠 있네요. 다 보진 않았지만(안 봐도 얼마나 감동적일지 알지요. 자기를 비하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실존이란) '이문재'가 나오는 부분에서 유심히 봤습니다. 이문재를 전에 '있기 없기' 때부터 찍었고, 언젠간 뜰 줄 알았어요.(뚜둡뚭뚜 뚜뚭뚭뚜) 그가 지독한 내향이라는 것도 냄새를 맡았었고요. 진심 짠하더구요.('있기 없기'가 편집되는 내용이었음)


8.
전에 몇 학기 대학에서 '음악치료'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심지어 그 학과 강의를 하면서 조차도 수업 중에 웃기지 못하면 죄책감이 느껴졌었어요. (참 병이라면 고질병이죠.) 요즘은 잘 웃겨지지도 않고, 웃기고 싶은 욕구도 별로 안 생겨요. 다만 웬만큼 웃기지 못했다면 죄책감은 늘 있지요. 에니어그램 강사가 되어서도 자신의 유형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는 셈입니다.


9.
그런데 사실 괜찮아요. 웃기는 것에 여전히 집착을 하는 것도, 개콘이 너무 너무 재밌는 것도, 그러다가 자기성찰을 좀 한다며서 개그감이 떨어져 가는 것도 사실 다 괜찮아요. 다만 개콘을 비하하면 나를 비하하는 것처럼 느끼고 위축되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할려고요. '코미디에 죽고 못 사는 경박한 나'를 당당히 주장하려고요. 비하하는 주체가 공선옥 아니라 공선옥 할머니라도 말이지요.


10.
개그맨 이문재를 응원합니다. 내향형에 자신감도 썩 없어 보이는 청년이 '두근두근'에서 그 귀여운 표정을 보여주고 40이 넘은 아줌마까지 로맨스에 물들게 하니 말이죠. 무대 뒤에서 빡 긴장한 모습에 자신감까지 없어 보이는 것이 참 사랑스럽더군요.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현란한 지적인 언어의 향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개콘을 보며 바보같이 웃는 것이 덜 헛된 일인 것 같아요.


11.
내 비록 갈수록 개그감은 저하하고 있고, 웃긴 강사에서 살짝 지루한 강사로 추락(이라고 쓰고 성숙이라고 읽는다)하고 있지만 개그 콘서트나 우리 문재 오빠 같은 이들을 비하하는 말들, 용서치 않을 거잖나! 개콘 재밌쟎나! 웃기잖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잖나! 언제 한 번 빵빵 터뜨려보지 못했으면 함부로 뻥뻥 차대지 말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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