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적어도 그런 사람은 없다. 중한 병에 걸렸거나 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향해서 노골적으로 '죄가 있나보다'며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말이다. 또 죄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됐으니 "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열등한 주의 자녀다"라고 말하는 무식쟁이도 없다. 우리 엄마 같은 경우는 살짝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도 같은데, 그런 걸 내비쳐봐야 아들 딸에게 좋은 소리 못 들을 걸 아시기에 애써 잘 조절하시는 듯하다.

무론 자신의 고난이라면 다를 수 있다. '혹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뭔가 깨달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닐까?' 라며 멈춰 설 수는 있다고 본다. 이 정도의 자기성찰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나. 여하튼, 인간사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고통에 대해서는 이유를 찾아 나열하겠다는 자체가 오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출석하고 있는 교회 담임이신 이재철목사님께서 암 진단을 받으셨다. 어느 분이 '이재철 목사는 한국 교회가 100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재목이다'라고 하셨다는데 과연 보기드문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도

1년 넘게, 아니 실은 그 전부터 이목사님의 설교와 삶을 통해 흔들리던 믿음이 견고해졌고, 상처를 치유받는 경험을 하였다. 그런 목사님이 암에 걸리시다니! 그러나 목사님은 그 앞에서 여전히 내가 아는 그 이재철목사님이었다. 수술과 요양을 위해서 안식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 설교에서 하신 말씀들도 목사님다웠다.  눈 앞에 닥친 것들에 순종하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믿음. 당신이 가르치셨던 대로 그대로의 고백이었다. 숨길 것도 포장할 것도 없이 병이 경과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재철목사님의 말씀)
제가 전립선암 판정을 받은 이후 많은 교우님들께서 염려해주시는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 그러나 올해 제 나이 우리 나이로 65세입니다. 생로병사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일생 속에 이런 과정이 다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종반부를 맞이한 제게 하나님께서 암이라는 적절한 벗을 제 몸에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암과 평생 동반자로 살면서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마무리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또 제가 겸손하게 제 목회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리 교회에도 유익이 되고 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와 제 처는 이런 복된 상황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교우님들께서도 걱정하시기보다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이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 교회를 통해 이 시대 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크나큰 고통의 때에 기도랍시고 하겠다며 무릎을 꿇는 자리에서 나는 대체로 언어를 잃는다.  예수기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단순한 기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게 전부이다. 짧지 않은 신앙의 여정에서 내가 제시하는 고난의 해결방법(기도제목)이 알량할 뿐임을 확인할 만큼 확인 하였다. 물론 아주 가끔 누울 자리가 생기면 원초적으로 다리를 뻗기도 한다. '하나님, 제발 이렇게 좀 해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라고 뻗치고 주저앉아 몸부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를 들면, 아이가 입시에 실패했는데 '하나님, 죽을 거 같아요. 이제라도 붙여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불치의 병 앞에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없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터. 전능자 앞에 불가능을 구하는 것이 결코 그릇된 기도가 아니다. 그때 만큼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확인하며 신 앞에 서는 때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기도, 또는 기도제목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봄날의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그 순간의 고통 그 자체만으로도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나를 분열시키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웅웅거렸다. 사랑하는 젊은 지체가 호스피스로 옮겨가 생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 매달리던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겠노라 하시는 것 같았다. 본향으로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아픈 새벽이었다. 바로 그때, 새벽기도를 인도하던 분이 다같이 통성기도 하자며 '이 형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라고, 더 크게, 목소리를 크게 내어서 아버지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였다. 네? 살려달라고 기도하라구요? 내 귀를 의심하고 있을 때 마이크를 통해서 들리는, 멋적어서 민망한, 민망해서 멋적은 목소리. '아버지~이, 아버지~이, oo를 살려주세요' 그 소리에 내 이성과 신앙이 분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신앙에 입문한 초심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의 기도회 인도였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죽음을 비롯한 삶의 고통스러운 면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거나 억압하려는 성향이 언제나 신체적, 정신적, 영적 재앙을 부른다고 하였다. 죽기 전에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과 친구가 될수 있다면, 죽음을 위협적인 원수가 아니라 낯익은 손님으로 대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죄책감과 원망이 한결 더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잘 되고, 성공하고, 병에서 낫는 것이 믿음의 열매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모든 약함과 실패의 종합체인 죽음은 두려움 말고 그 무엇이랴.  믿음의 기도라는 종교적 명분 뒤로 숨어 죽음을 회피하려는 불신앙, 그렇다 그것은 믿음이라 이름 하는 불신앙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호스피스에 있던 형제는 죽음을 친구로 받아들이며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을 가족과 함께 정리해가고 있었다.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송하면서 평안히 천국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주일 예배 봉헌시간, 이런 내용의 감사헌금이 있었다.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그렇게 고백하며 본향으로 떠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남편과 나의 신앙여정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더불어 그 새벽기도, 스피커를 타고 웅웅거리던 '살려주세요' 소리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난 주일에 설교 하신 선임목사님께서 수술을 앞 둔 이재철목사님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 기도에 크나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이목사님 자신이 당신의 상황을 순종하며 받아들이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감동이었다.

 

(정한조 목사님의 설교 후 기도)
또한 지금까지 이재철목사님의 내일을 쥐시고
, 이목사님의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공중의 새는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할 지라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길러주시고,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 들에 핀 백합화도 키우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아들 이재철목사님을 책임져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수술은 잘 될까, 회복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까, 예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100주년기념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목양이 아니라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을 때, 최고의 장사 밑천이 되는 것이 교우들의 병과 고난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다. 기도할 때다. 합심하여 기도하자' 하면서 고난과 기도의 매카니즘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의미의 순종, 말씀과 더불어 상황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르쳐야 할 때조차 기도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뜻을 좌지우지 하겠노라는 왜곡된 믿음을 주입하는 것은 아닌가. 누군들 고난이 달가우며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신앙의 여정을 안내하는 영적인 지도자라면 부활의 소망으로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부활주일에 구색을 맞추는 설교 주제로서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죽음'들에 직면하고, 죽음과 친구가 되며, 두려움과 맞서 부활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최소한 자기 자신과 성도들의 두려움을 담보삼아 헛된 기도응답을 가르치지는 말아야 한다. 

 

두 분 목사님을 지금 여기서 만나고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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