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다녀온 채윤이가 코가 빨개가지고 '엄마, 디게 추워. 살을 에이는 추위야!' 하기에 차를 타고 나갈까 싶었지만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 대신 옷을 든든히 입고 모자와 장갑까지 챙겼다. 약속 장소를 화력발전소 앞 B카페로 잡았다. 강변 길을 통해 절두산 성지로 가 기도의 길을 걸은 다음 대림절 초를 사야지. 내처 걸어서 상수동 M 커피 로스팅 가게에 들러 원두를 사야겠다. 그러고나면 걷는 거리, 시간을 계산하여 B카페가 딱이다. 강변을 걷다보니 이곳에 이사 와 처음 강변에 나갔던 그날이 생각난다. 오늘과 똑같은 복장이었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이삿짐이 대충 정리되었고, 동네는 낯설고, 날씨는 추웠다. 심심해 심심달, 하면서 빈둥거리는 현승이를 꼬여서 나갔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아주 조금 예뻐 보인 첫날이기도 했다. 한강과 강변 길이 있어서 지난 5년의 삶이 얼마나 윤택했던가! 최고의 코스, 나만의 걷기 코스는 강변을 통해 절두산 성지 찍고, 상수동까지 걸어가 M 로스팅 가게에 들르는 것이다.



마음이 뻥 뚫려서 오갈 곳을 알지 못하는 날에 절두산 성지를 향한다. 가끔은 언어를 잃은 기도를, 소리없는 분노의 외침을 담고 걷는다. 가라앉거나 폭풍 치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곤 하는 곳은 기도초가 있는 곳이다. 값싼 양초가 활활 타오르고, 그 앞 긴 나무 의자에 앉거나 서서 묵주를 돌리며 기도 드리는 여인들을 보면 속에서부터 싸한 아픔이 올라온다. 기도제목도 알 수 없는 그들의 기도에 내 마음을 합하고, 흔들리는 수많은 기도초 앞에 나를 세운다.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는 저 기도들이 결코 쉽게 응답되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오히려 겸허해진다. 나오는 길엔 성지 입구에 있는 서점에 들러 책이나 액자 같은 것을 만지작거린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께 드릴 책을 샀다. 그리고 대림초를 샀다. 그 다음 코스가 상수동 M 가게. 최고로 맛있는 로스팅은 아니지만 넉넉하게 주는 마음, 얼굴을 기억해주는 것이 좋아서 아끼는 집이다. 커피 공장 같은 곳이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로스팅 기계, 초콜릿 만드는 기계로 사람을 부르려면 유리창을 두드리고, 저기요! 여기요!를 여러 번 외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사하면 제일 아쉬울 곳이 절두산과 M 가게이지 싶다.



B카페를 처음 알았을 때는 인생 카페가 될 줄 알았다. 하도 많아 책꽂이에 다 꽂히지도 못하고 쌓인 시집이며 소설을 보면 주인의 독서 내공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출입문에 붙은 노란리본이며, 카페 트위터에 올라오는 사색적인 글은 정말이지 있어 보인다. 합정 시절 초기에는 주로 여기서 원두를 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리 다녀도 정이 붙질 않았다. 주인 아저씨가 문학을 애정하시느라 사람에 별 관심이 없나 싶었다(이런 건 사실 좀 매력적인 것). 언젠가 블로그에서 뒷담화 한 기억이 있는데. 원두 사러 갔는데 저울에 원두 달면서 조금 넘쳤는지 몇 알을 다시 꺼내는 걸 보고는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낯가림이 심한 건 오히려 매력이라 여겨서 먼저 인사하는 법도 없고, 자주 커피를 사러 가도 아는 척 해주는 법 없는 것도 괜찮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괜찮지가 않았었다. (커피 몇 알에 빈정 상해서 ㅋㅋ) 부침개 부쳐 지인과 막걸리 마시다 커피 내려주던 것도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커피 로스팅은 늘 조금씩 과했던 것도 같고. 그냥 아웃시키는 걸로! 아무튼 문학이든 신앙이든 개혁이든 무엇이든 맹목이 되고, 충천한 자의식이 되는 건 치명적이다. 그런 B카페인데 오늘 약속 장소를 여기로 했다. 순전히 동선 때문이다.


양화진이 아니라 절두산 성지를 성스럽게 여기든, B카페가 아니라 M가게를 애정하든 내 취향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취향이다. 누군가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내 취향이다. '존중입니다. 취향 부탁이요' 이런 강렬한 부탁의 말이 있지만 세상 그 누구가 타인의 (것이기에 사소한) 취향 따위를 존중할 것인가. 모두 자신의 존중을 취향할 뿐이다. 시집을 모으고, 멋진 인용문을 날리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카톡 프사에 촛불집회 사진을 올리며 남모르게 어깨를 으쓱인다.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B카페 아저씨는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아웃당한 걸 알면 꽤나 억울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다. 내가 주어가 되어 아웃시켰지만 어딘가에선 나도 목적어가 되었었고, 되고 있을 것이다. 어쩌겠나. 각자 자기 취향의 세계에서 자뻑하며 허덕이며 사는 것이 사람일진대. 그래도 가끔 B카페에 간다. 오늘같은 동선에선 B카페가 딱이니까. 취향은 취향일 뿐이니까. 문득 이사 후에 M 가게보다 B 카페가 더 그리워지는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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