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  기도의 여정에서 만난 첫 이정표

학창시절,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은 긴장의 나날이었다. 친구와 선생님을 새로 만나야 한다는 낯섦에 대한 부담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커지는 학업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지니 말이다. 학기가 시작하는 3월과 9, 엄마는 밤마다 철야기도를 했다. 저녁에 아홉 시 쯤 교회에 가시면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기도를 마친 후 일곱 시나 되어야 집에 돌아오셨다. 그저 엄마의 습관이려니 했었는데 내가 학부모가 되어보니 그 마음의 절절함을 알 듯 하다. 아이가 가진 부담감을 모르지 않지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같이 학교에 가 줄 수도, 공부를 대신해 줄 수도 없다. 게다가 일찍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어린 남매를 혼자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는 아버지이며 남편인 하나님께로 가 무릎을 꿇는 선택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훨씬 이전부터 엄마는 그랬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하던 아버지와 하루 종일 심방을 하고 돌아오신 날 밤에도 자다가 깨보면 엄마의 이불이 푹 꺼져있다. 또 교회로 가신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곳은 교회 마당, 엄마의 등이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기도인지 찬송인지 모를 목소리가 엄마의 등을 통해 내 볼로 전해지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기도는 원래부터 모든 엄마들의 의무인줄 알았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는 것처럼, 기도는 엄마 역할의 기본옵션인줄 알고 자란 것이다. 시험 날에는 내가 시험 치는 시간 내내 엄마가 집에서 기도하는 줄 알고 있었기에 못해도 잘할 줄 알았다. 시험 뿐 아니라 엄마가 기도하니까 내가 뭘 해도 잘 할 줄 알았다. 엄마의 기도는 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 나의 비빌 언덕이었던 것이다.

 

엄마 기도의 빛과 그림자

그러나 또 신앙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엄마의 기도만큼 싫은 것이 없다.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던 나를 놓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엄마는 수시로 안수기도를 하셨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마귀야 썩 나와라.’ 엄포를 놓는 엄마 목소리가 얼마나 싫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웬만한 일은 다 기도로 해결하려는 엄마의 단순함이 날이 갈수록, 머리가 커질수록 싫어졌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하는 말 속에 담긴 엄마에 대한 애증처럼 기도역시 내게는 가장 갈망하면서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신앙 행위였던 것 같다.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런 확신이 마음에 차오르면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내일이면 밀린 월급을 한꺼번에 받을 반짝 하는 소망이 샘솟는다. 그래서 소망을 품고 기도한다. 기도응답의 조건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니까 될 줄로 믿쓉니다.’를 빼 먹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아닌 거절판정 받는 게 일쑤다. 엄마가 기도해보니 잘 될 것 같다.’던 일이 잘 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청소년기와 청년 시기를 지나면서 나는 정말 우리 엄마가 믿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는 미리 좌절했다. ‘, 이런 것까지 들어주실 리 없어. 그래도 어쩌겠어. 졸라는 봐야지.’ 하는 심정이었을까?

 

수련회의 기도, 집에서도 할 수는 없나요?

중고등부 때는 물론 청년부 수련회의 뜨거운 기도시간에 아주 잠깐 누리는 천국 같은 평안함, 세상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관용의 마음,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이면 될 것 같은 만족감은 그 시절 내 기도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 절정은 너무도 짧아 1년에 한 번, 합치면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라는 것이 함정. 일상에 돌아오면 바라던 직장에 꼭 가게 해달라고, 마음에 둔 형제도 나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나를 괴롭히는 직장 선배 좀 어떻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며 다시 답이 없는 나를 확인한다.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되 그 분 손의 쇼핑백을 수시로 힐끗거리게 된다. 그게 아닌 것을 알지만 매일 집에서 수련회를 할 수도 없으니 기도는 자주 길을 잃었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수록 기도에 대한 열망은 커지지만 기도는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른이 되었으니 져야할 책임이 많아진 만큼 그 만큼의 무력감을 느꼈고, 그 무력감은 기도가 되었다. 기도라 봐야 이런 요구조건이 있지만, 하나님 맘대로 해주세요.’였으니 이건 뭐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기도를 배우고 싶었다. 리챠드 포스터의 <기도>,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 포사이스의 <영혼의 기도>, 래리크랩의 <파파기도>를 읽으며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 관계 말이다. 20분 정도 내 요구조건 브리핑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서 쩝쩝거리는 대화가 아니라 그 분과의 만남이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은 관계,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기도를 할 수는 없을까?

 

기도의 길을 잃다.

그런 갈망에 더욱 목이 말라갈 무렵 남편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늦게 신대원에 입학을 하였다. 새벽잠이 많아서 목사는 할 수 없을 거라고 부모님께 농담을 듣던 남편의 새벽이 영롱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신대원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나서 보내오는 메시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투명해지는 그의 영혼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깊고 투명한 기도를 갈망할수록 나의 기도는 메말라 가는 것이었다. 방언을 구해보기도 했으나 그 분의 쇼핑백에서는 방언의 은사는커녕 이제 사소한 기도응답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신대원을 마치고 남편이 전임사역을 시작하자 내게 사모란 이름으로 새벽기도 의무사항이 주어졌다. 새벽기도를 안 하는 사모는 세상 무엇을 한다 해도 치명적인 결격사유를 가진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하여 기도의 여사도(女使徒)’ 친정엄마 역시 거드신다. ‘너 새벽기도 해야헌다. 내가 기도혀도 소용없어. 사모가 기도허야 김서방이 목회 성공하는 거여.’ 내가 가장 잘 하고 싶은 것이 기도인데, 기도에의 열망과 열정이 새벽기도로 하나로 대치되어 내 존재를 판단 받게 되다니 분열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새벽기도에 나가면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듣거나 정죄당하기 일쑤였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내 존재가 분열될 것만 같은 고통으로 눈물만 하염없이 쏟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침묵기도로 가는 신비로운 이정표

이즈음 직업적 필요 반, 신앙적인 갈망 반으로 공부를 하나 시작했다. ‘성격유형에 관한 공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우연 같은 필연으로 가톨릭 기관에서 배우게 되었다. 알고 보니 단지 성격유형이 아니라 거짓자아에 대한 공부였고, 예수회 신부님들의 자기성찰을 위한 영성수련 방법 중 하나였다. 머리를 키우려다 마음을 터치하는 도구를 만난 것이다. 이렇게 열린 문은 신비롭게도 침묵기도 피정으로 가는 길로 이어져 있었다. 단지 말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생각과 욕망의 침묵을 통해서 비로소 내 존재의 중심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들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배운 침묵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갈망하던 쇼핑백 아닌, 쇼핑백 든 하나님을 조금씩 응시하게 되었다. 애써 선택한 것이 없는데, 그저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만 붙들고 있었는데 어느 새 나는 멀리 와 있었다. 목회자의 아내로 보이기 위한 기도에 대한 압박으로 괴로워 흘리던 눈물을 하나님아닌 하느님이 닦아주시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그렇게 갈망하던 기도를 (‘기도의 사도인 엄마가 이단이라 믿으시는) 가톨릭에 와서 배우게 되다니. 낯선 예전과 언어들 속에서 남의 나라 언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처럼 위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낯선 어느 경당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며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저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요? 이 낯선 곳에서 이방인 같이 앉아 있습니다. 엄마에게 배운 기도가 있는데, 내 어머니의 교회에서 배운 신앙의 전통이 있는데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 것인가요? 당신은 하나님인가요, 하느님인가요?‘ 동냥젖을 얻어먹는 아기처럼 배고파 정신없이 빨지만 마음까지 편안한 건 아니었다. 깊은 울음과 긴 흐느낌 끝에 사랑하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의 눈을 들어 그 눈빛에 내 눈을 맞췄다. ,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보고 계시는구나. 공허한 기도 속에서 정신없이 그 분을 찾아 돌아다닐 그 때도 이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었구나.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그 분의 아들이시며 그 분 자신이신 예수님이 말이다.

 

쉬지 않는 기도

삶은, 신앙은 신비이다. 주변에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여정 속에서 혼란스러웠지만 혼란보다 큰 평안이 점점 나를 감싸가고 있었다. 그 분과 연결되고 싶은 열망 하나로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분이 바로 내 안에, 내가 있는 바로 여기에 계셨다. 한적한 피정집이나 내가 자란 교회의 예배, 둘 중 한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상 한가운데에서도 그리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고, 그것이 기도이다. 아이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무한 경쟁의 세상에서 내 아이만 뒤로 쳐지는 것은 아닐까 극한 불안감에 휩싸일 때, 어딘가에서 나를 비난하고 있을지 모르는 관계가 틀어진 친구를 상상하며 두려워지는 순간에, 더 이상 남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강퍅하게 마음 문을 닫아버린 어느 날. 바로 그 순간에 지체하지 않고 주님을 부를 수도, 그것이 가장 깊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메말라 윤기 없는 목소리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그 분을 부를 때 불안과 두려움과 분노를 밀어내고 들이닥치는 사랑의 침노를 느낄 수 있다. 불안과 두려움과 분노의 원인이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며 바라보고 계신 사랑의 눈동자는 내가 고개만 들면 눈 맞춤 할 수 있는 곳에 아주 가까이 계시니 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도달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었구나.)

 

나의 기도는 이런 것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난 집안.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며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감은 복잡한 내 마음 같다. 그래도 라디오 FM에선 쇼팽이 흘러나온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내 마음이 편안하게 조급하다. 이걸 마치고 거실의 낡은 탁자 앞에서 있을 데이트 때문이다. 아무런 꽃단장이 필요 없는 만남이다. 아니, 얼룩이 묻거나 찢어져 상처가 흉할수록 더 귀하게 대접받는 데이트이다. 얼룩과 상처를 내보이고 아픔과 두려움을 인정하면서 시작되는 기도는 그 분의 충만한 현존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어떤 때는 속이 시끄러워 그 자리에 앉아서 단편 소설을 써대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 단편소설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고 다시 나의 연인의 눈을 바라보면 여전히 그 눈빛 그대로 여기 계시다. 이 아침의 기도가 깊어질수록 일상 속 쉬지 않는 기도는 더 힘을 받는다. 매일 마음의 얼룩을 지운다고 지워도 나도 모르게 끼는 묵은 때가 있다. 이것이 쌓이면 가까이 계시는 그 분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보인다. 일상의 의무를 벗어나 그 분과 단둘이 긴 시간을 보낼 때가 왔다는 신호이다. 이틀 삼일 엄마가 피정을 가겠다는 말에 아이들의 반발이 거세다. , 왜 꼭 기도하러 가야하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아빠가 부지불식간에 대답을 내놓았다. “? 엄마가 기도 안 하면... , 죽어.” 아이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나온 표현이지만 내 가슴에 박혔다. 기도 안 하면 죽어.

 

많은 문제로 고민을 하던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 기회에 테레사 수녀님의 충고를 듣고자 긴 시간 자신의 문제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우웬 신부님이 입을 다물자 테레사 수녀님은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며 보내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향한 여정 끝에 생의 오르막길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내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하루 한 시간씩 주님을 사모하며 보내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삶. 나의 기도와 기도의 삶은 이런 것이다.


* 한국여성크리스천클럽에서 발간하는 회보 <샘바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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