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가고 그는 들어오는 길에 마주쳤다.

저기 느릿느릿 걸어오는 기다란 그의 몸땡이가 보인다.

손에 든  늘 제 몸처럼 붙어 있는 한 두 권의 책,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가 멋 없이 흔들린다.

검은 비닐봉지든, 반짝반짝 쇼핑백이든 손에 든 그것들은 약간 설레게 하는 것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비닐봉지에 꽃 화분 세 개가 미어 터지게 들어 앉았다.

참말로 담긴 품새가 멋이라곤 없다.

나도 지나치면 봤는데 교회 앞에 꽃 파는 트럭이 서 있었다.

나도 좀 살까 했는데, 차를 세우기가 뭐해서 그냥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와 친구가 만들어준 도자기 화분에 꽃 포트 세 개를 꽂으려 각이 나오질 않는다.

색이 조화롭거나, 크기가 알맞거나 해야 하는데 도통 어우러지질 않는다.

이렇게 막 고를 수도 있나, 부조화를 컨셉으로 선택한 것인가?

주일 아침 일어나 다시 한 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보지만 안 되겠다.


글을 읽고 쓰고, 논리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정돈하는 일에는 진화된 사람.

멋을 부리고, 폼을 잡고,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가면 다섯 살 아이 같다

공평함의 덕, 객관적 판단의 덕이 차고 넘치는 사람.

그것을 나는 얼마나 버거워 하고 차겁게 느꼈던가.

빈말로라도 편 한 번 들어주면 될 텐데, 그걸 못해서 내게 받은 구박과 설움은 말할 수 없다.


반면, 간섭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의 태도는 내게 너무 좋은 약이 되기도 했다. 

엄마의 폭풍 잔소리와 간섭으로 형성된 나의 아픈 그림자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으니.

그저 그의 마음 생김새가 내게는 선물이 되었다.


피차에 타고 난 모양으로 서로에게 선물이 된 지점이 있다.

MBTI든 에니어그램이든 어떤 성격유형을 갖다 대도 정반대 성향을 가진 한 쌍의 바퀴벌레.


애초 생겨먹은 모습과 태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도로 서로에게 다가갈 때가 되었다.

그것을 중년이라 부르고, 

인생 제 2막이라 부른다.

싸구려 꽃 화분을 구겨 넣은 검은 비닐봉지 든 손에 뭉클하다.

잘 다루는 글이 아니라, 평생 '객관성'에 사로잡혀 거리 두고 싶었던 것들에 다가가는 모습.


꽃을 든 이 남자, 이 남자의 서툰 몸짓,

자기를 넘어서는 미미하지만 큰 변화를 기리는 부활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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