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 명상

                                                이해인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뽀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웃고 있다

머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므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지난 4월 어느 화요일 아침.
어린이집 음악수업을 위해서 하남으로 향하는 길에 가슴이 설레고 들떴다.
자동차가 아니라 구름차를 운전하는 듯....
이유는 별 것이 아니었다.
움트는 새 봄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였다.
적당히 따스한 햇살, 멀리 뵈는 산에서 막 움트는 잎들이 만들어내는 연두빛....
그 풍경에 반응하여 내 안에서 기쁨과 생명이 마구 일렁거렸다.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지만 노래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 아름다운 봄날을 만드신 이유만으로도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듯 했다.

음악수업을 하는 다섯 살 짜리 꼬마들은 또 얼마나 귀엽고 예뻤던가.
오후에 만난 특수학급이라는 곳에 모여있는 아이들을 음악치료하는 일은 나를 치료하는 일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메일함을 열었는데....
죠이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자는 메일이 와 있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던 기쁨과 생명은 현실적인 선물꾸러미가 되어 내게로 왔다.


그리고.
그 다음 수요일.
아버님은 하남의 어느 병원에서 암선고를 받으셨고,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시누이 손을 잡고 울다가,
아버님을 모시고 덕소로 향하는 길.
신안아파트 벚꽃길을 지났다.
남편과의 사랑의 추억과 시부모님과의 우연한 첫 만남이 있었던 아름다운 장소.
뒷좌석에 계신 아버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차마 고개 돌려 그 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과 마주할 수가 없었다.


.................................



어제 남편의 수요예배 설교를 통해서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되짚어 보았다.
사랑의 회초리.
그 회초리 끝에 달린 살을 파내는 갈고리는 결코 나를 향하지 않는다.
그 회초리가 나를 휘감아 한 번 때릴 때마다 갈고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향하여, 그 분의 살을
뜯어낸다. 오래 전 사람되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채찍을 맞으셨던 것처럼.

그 들뜨고 행복했던 화요일 이후
사랑하는 한솔이를 보내고,
아버님의 투병을 지켜보고,
일식이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눈 코 뜰 새 없는 아픔들이 나를 때려댔다.
그 회초리가 사랑일까?

고통의 한복판에서 연한 꽃잎처럼 떨던 한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 내가 그의 손을 잡아주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둘 다 떨고 흐느끼고 있었고,
둘이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가 내게 내민 책 한 권을 받아 읽으면서 그 찬란했던 화요일 봄을 떠올렸다.

앞으로 닥칠 고통을 대비해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마음의 쿠션 하나를 대어 주신 듯한 그 화요일을 떠올렸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꽃 피던 짧은 봄날이 가고 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 분의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긴다.
그 분의 사랑을 마음 가득 새긴다.
그 분의 사랑은 내 일상에 주신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다.

이제 사랑의 힘을 빌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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