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화가 홀워드는 자신이 그린 도리언그레이의 초상화를 전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 그림 속에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그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 헨리경이 어이없다 하면서 초상화의 잘생긴 젊은이와 우둘투둘하게 생긴 홀워드가 비슷한 구석도 없다고 합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이 책으로 출간되는 걸 몹시 고대했었지요. 그렇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조바심은 얼마나 천박하고 지질한지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간이 임박했을 때,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다는 담당 간사님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얹어진 것 같았습니다. 내내 무거웠고, 아플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순간에 위의 홀워드의 말이 생각났지만, 그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나를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았습니다. 이미 세상에 내보냈던 글이니까요. 여태 기고했던 것이고 블로그에도 떡하니 걸려있을 뿐 아니라 단행본 출간을 고대했으면서. '이 글 속에 나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책으로 만들어 서점에 깔아놓을 수가 없네요.' 라니요.


저는 천성적으로 저를 오픈하고 사는 것이 쉬운 것 같아요. 끝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이 없구요. 그래서 남편에게 엽기적인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몰라도 오래 비밀리에 준비하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해준 적이 없습니다. 저의 내면이니 심지어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제 기질의 소산입니다. 그 때문에 기고를 하는 동안에도 블로그에 걸어놓고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기고할 때를 생각하면 몸으로 많이 앓으면서 썼던 것 같아요. 제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지 않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요. 그러고는 또 금세 고통은 잊어버리고 이내 써냈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칠렐레팔렐레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이 되어 나올 날이 임박하자 제 안에서 의외의 반응이 꿈틀거렸습니다. 정말 나오는 거구나? 어.... 어떡하지? 인쇄되어 나온다는 날은 가라앉는 마음이 극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찾아와 읽어주는 여기 블로그도 아니고, 정기구독하는 분들이 정해진 매체도 아닌 저잣거리에 내보내며 새삼스레 안절부절하는 이 심정을 어찌 하오리까. 비록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을 강점 삼아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지만요. 내 속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드러낸 내 내면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그 누군가가 읽고 있을 상상을 하면 마음은 벌써 지옥입니다. 그런데 그때 들은 소식이 인쇄사고로 이미 찍은 2,000부를 버리고 다시 찍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출간을 두려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내 부정적인 마음 탓인가, 괜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루한 기다림 속에 저자도 받지 못한 책(죠이 간사님들이 잘못 인쇄된 책을 미리 받으시고)을 읽고 쓰신 서평이 속속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리며 약간 불편심이 생겼습니다.


고상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은 누군가가 맨 얼굴에 옷도 제대로 안 걸친 누더기 같은 내 속을 드러낸  책을 들고 읽으면서 '니가 그럴 줄 알았다. 니 속이 그렇지' 할 것만 같은 소설이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애써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나의 글이든 삶이든 무엇이든 그로인한 찬사도 비아냥도 내 것입니다. 아니 사실 찬사도 비아냥도 글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의 것입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에 비추어 나를 읽는것이고, 엄밀히 말하면 읽고 감동받거나 비판하는 것도 투사입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때 페북에서 자신의 책을 대놓고 홍보하는 저자들을 비아냥거렸었는데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운운하며 시작한 맥락과는 닿지 않는 분열인데 제 나름은 통합입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그래서 정말 미치도록 부끄럽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홍보도 합니다. 책 출간과 함께 죠이에서 기획하는 에니어그램 강의도 할 거구요. 다음 주 토요일에는 팟캐스트로 내보낼 강의도 녹음합니다. (이 부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드러나고 감추는 것 사이에서 마음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해 더욱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나를 너무 많이 집어넣은 글'을 내놓은 책임으로 더 투명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쓰는데 뜬금없는 눈물이 나네요. 어쨌든 책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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