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오우연애>는 '내 책 내는 거 맞찌? 내 이름의 책이 나오는 거 진짜 맞찌?' 황홀함에 들떠서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허둥대다보니 나와 있었다. 두 번째 책 <와우결혼>을 내기 위해서 만난 편집자 L 님의 첫 메일을 받고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길지도 않은 인사 메일이었다. 사람에 대한 촉이 필요 이상으로 발달한 나, 정신실이 아닌가.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 의존적이기 때문에 누구와 만나서 대화하고 일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 나다. 첫 메일에서 프로의 냄새를 맡았다. 적응력도 있는 나는 프로 편집자님께 프로 저자가 되기로 정해버렸다. 이것은 1층에 있던 저자가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타는 순간이었다.


메일을 보아하니 디게 깐깐한 분이다. 오타는 애교, 맞춤법 틀리는 건 살짝 부끄러운 거~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신경 안 쓴 척, 원래 꼼꼼한 척 깨알 같은 답신을 썼다. 그렇게 긴장한 상태로 얼마 후에 출판사에 가서 대면했는데... 뭐야? 왤케 부드러우심? 그 부드러움은 다름 아닌 저자에 대한 존중의 태도였다. 그 존중의 태도는 다름 아닌 책을 편집하면서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겠다는 의지였다. 아, 그냥 완벽주의 편집자가 아니구나,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와우결혼>을 만들면서 L 님의 완벽주의는 수시로 확인이 되었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설렁설렁 하려는 내 태도를 돌아보며 컴터 앞에 앉은 내 태도를 고쳐 앉게 하였다.


나는 오랜 기간 내가 수더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까칠하고 예민하다는 평에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어 했다. 까칠함이 나쁜 것이라고(엄마가 늘 말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오타가 나는 것도 '에이, 뭐 그런 거지. 오타도 보이고 그래야 인간적이지' 하곤 했다. 내가 까칠하지 않다는 것을 그런 것으로 증명하려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와우결혼>을 만들며 교정본을 받고 다시 보내고 하는 과정에서 오타와 비문, 정확한 인용에 대해서 화들짝 눈을 뜬 면이 있다. (또 다른 전문가적 완벽주의자 남편과 함께 한 작업인 탓도 있다.) 어쨌든  한 번도 내게 다그치지 않았지만, L님의 일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자랑인데, 내가 잘 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람에게 빨리 배우는 것이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심하게 부러워하면서 그 부러워하던 덕목을 배우고야 마는 그런 근성이 있다는 걸 요즘 깨닫고 있다. 헤헤) L님은 정말 내게 '와우~ 편집자님!'


그러나 어떤 면에서 <와우결혼>은 내게 결정적인 아쉬움을 남기고 세상에 나왔다. 그 아쉬움을 통해서 책이 나와서 마냥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수준이란 게 있구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수더분한 사람이 아니구나) 세 번째 책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은 L 님의 아내님의 손에 넘어갔다. 두 사람은 부부 편집단. <와우결혼> 출간 즈음에 결혼을 하셨으니 이건 또 무슨 즐거운 인연인가?  아무튼 에니어그램 책을 맡으신 아내 간사님 역시 일러스트를 찾는 것부터 내 기대치를 웃돈다. 아내 L 편집자님은 여자 김종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 남편과 비슷한 캐릭터. 그래서 그런지 책을 만드는 과정이 물 흐르듯 졸졸졸이다. 그리고 책 패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표지에 나의 '와우~ 편집자님'이 적극 참여하시며 짧은 저자 인생에서 얻은 작은 트라우마 하나를 치유해 주셨다. <커피 에니어그램>은 여러모로 내게 치유적인 책이 되었다.


토요일 저녁, 두 L 편집자님과 식사를 하고 커피를 나누고 풍성한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저 막연히 두 분의 편집자가 내게는 큰 선물이며 복이다, 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는 희미하게 보였으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니 그분들이 나를 알고 계시듯 나도 그분들을 알겠고, 선물이라 생각했던 심증은 확증이 되었다. 저자라고 누구나 좋은 편집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내 마음이 한층 자라고 글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게 되었으니 복과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늘 대화 중에 남편 L 편집자님이 던진 '게으름'이라는 화두가 긴 울림으로 가슴에 남는다. 어떤 소명의 자리로 부름 받은 사람,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자극에 둔감하고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게으름이고 '죄'다. '변화'는 늘 하던 것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어제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니 고통의 선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자 한다면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게으름이고 동시에 죄이다.


네 번째 책, '육아'에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엄청난 양의 글을 선별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자로서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새삼스레 반성하게 된다. 저자의 무책임은 무책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편집자의 짐이 된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히 알겠다. 느슨한 탈고를 하면서 구멍을 남기는 것이 인간적이라며 가볍게 굴었던 것도. 게다가 그런 걸 가지고 '나 까칠하지 않다니까' 합리화를 일삼았다. 저자와 편집자 관계에서 그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책임을 다하는 일이 늘 미끈하고 뽀대나는 일이 아니라 까칠해 보이고 주변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까칠함의 미덕을 새롭게 배운다. 저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까칠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착하단 소리 못 듣고, 잃고 가는 것이 많아지더라도 저자의 저자됨, 나의 나됨을 위해서 용기있게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실은 요즘 나의 까칠함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원고 하나를 매만지면서 배신 때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를 더 빛내줄 출판사에서 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으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한껏 치솟은 안압을 낮추기로 한다. 팔리는 책이 아니라 저자의 빛깔이 살아 있는 책을 만들려는 편집자,  저자를 빛나게 해  책 많이 팔기를 도모하지 않고 오히려 저자의 빛이 커져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어떻게 책임을 나눠서 질까를 미리 고민하는 편집자가 있다. 그분이 내 편집자이다. 때문에 나의 글 선생님이기도 하다.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까칠해서 더 좋은 편집자, 그 곁의 공평하며 중심 있는 짝지 편집자. 까칠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저자, 그 곁의 공평하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짝지 남편(이며 약간은 저자)과 대화가 무르익어가는데 대~애박, 창밖으로 무지개가 떴다. 갑자기 나타난 무지개를 보며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처럼 삶은 갑작스런 만남으로 인해, 그로 인한 인한 깨달음을 통해 깊은 탄성을 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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