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채윤이 큰아빠 집에 다녀오셔서는 걱정이시다.

채윤이보다 한 달 늦은 사촌동생이 있는데 아기 적부터 말하는 것, 걷는 것 등이 채윤이랑 많이 차이가 났었다. 실제 차이는 한 달이지만 1월 생이라서 나이가 다른데 정말 한 1년 정도 차이나는 것으로 식구들이 인정하고 있었다.


헌데, 그 사촌동생이 글을 다 읽더란다. 받침 없는 글씨는 물론이고 웬만한 받침 글씨도 다 읽는다 하시면서 은근히 걱정을 내비치셨다.

'인생의 낙오'란 그런 것이다. 다들 글씨 알고 학교 가는데 글씨도 모르고 셈도 못하면 거기서부터 낙오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씩 낙오되다 보면 다 뒤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피아노 가르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학원을 보내서 글씨를 가르쳐야 한다.

 

그 자리에 채윤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ㅜㅜ


이제 시부모님 앞에서도 웬만한 얘기 맘 편히 할 수 있는 며느리.

아버님의 태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소신을 펼쳤다.

'아버님! 글씨 먼저 안다고 공부 잘하는 거 아녜요. 제가 유치원 교사도 해보고 초, 중, 고생 과외도 다 해봤어요. 시은이는 돌이 넘어서부터 선생님 붙여서 한글공부 했는데 당연히 글씨 읽겠죠. 채윤이는 제대로 앉아 글씨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그나마 몇 글자 읽고 쓰는 것이 다행이죠. 채윤이가 글씨는 늦게 깨치는 것은 맞지만 괜찮아요. 학교 갈 때까지 모르면 학교 가기 전에 한 두 달 붙잡고 시켜도 되고요.....

제 생각엔 애들이 글씨 배우면서  공부 싫증내는 걸 배워요. 글씨를 부담없이 배워야 처음부터 공부 싫어하지 않아요. 글씨가 좀 늦되면 늦되는대로 가르쳐야죠. 저는 걱정 안해요. 아버님! 채윤이가 꼭 공부 잘 하리라는 보장도 없구요.

채윤이 나이에는 신나게 노는 게 최고의 공부예요. 좋은 유치원은 글씨 안 가르쳐요. 유치원에서 애들하고 젤 하기 쉬운게 글씨 가르치는 거예요. 어린 것들이 앉아서 책 베껴 쓰고 있는 것 저는 안되 보여요.

아이들이 제 나이에 맞게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는데 글씨는 학교 가기 전까지 천천히 배우면 돼요. 차라리 편식하지 않고 먹는 거, 친구랑 동생이라 사이좋게 지내는 거, 인사 잘 하는 거, 잘 자는 거 이런 거 배우는게 중요하죠. 그게 안 되는데 글씨만 배워서 뭐해요. 채윤이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지 생각 똑바로 말하고 그러잖아요.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해요'

 

물론 이렇게 정리해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아버님이 뭐라 하셔도 사실 나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학교 가자마자 알림장 쓴다고 하니 올 겨울에는 쫌 집중적으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있고, 수민이 같은 경우만 봐도 누가 가르치치 않아도 지가 좋아서 혼자서 터득하기도 하니까 올해 안에 그런 시기가 오면 좋겠고...

또 공부를 잘하는 채윤이가 되면 좋겠지만 공부 잘하는 것은 글씨을 먼저 알고 아니고가 아니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게 염려가 되지도 않고..


설령 채윤이가 공부를 못해도 낙오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채윤이게 가르치리라. 채윤이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으로 자존감이 너무 낮아진다면 대학, 대학원 내내 과외선생으로 먹고 살던 엄마가 가르치면 될 것이고, 공부를 못해도 스스로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면 될 것이고...

공부를 잘한다면 물론 더 바랄 것이 없에 좋겠고...


부디, 지금 이 마음을 나 자신이 잃지 않기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