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체리쥬스를 얼린 얼음조각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음악치료에 쓰는 물건이다.
물론 음악치료 관련 어떤 책에도, 메뉴얼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들려주며 입에 넣어 줄 음악치료 선생님표 아이스케키이다.

초등학교 특수학급 음악치료를 하면서 몇 년 동안 공들여 하고 있는 것이 음악감상이다.

'곰 세 마리' 노래 하나 정확한 가사로 부를 수 없는 아이들에게 비발디, 바흐, 헨델이 웬말이냐.
그것은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은 내 것이기도, 그 녀석들의 것이기도)
'여름'을 음악으로만이 아니라 원초적인 감각으로 느끼게 해주고픈 마음으로 만들었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관찰가능, 측정가능'한 데이터를 내는 것이 '치료'라고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고 다니기도 했었다.
음악치료에 입문하고 15년이 훌쩍 넘은 지금 나는 점점 '음악치료 선생님'이 아니라
'음악치료 아줌마' 내지는 '음악치료 엄마'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측정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기록에 정신이 팔리다보면 측정할 수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친다.
지난 음악치료의 세월은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아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체리쥬스를 만들어 얼릴 생각을 하고는 내 자신에게 무한 칭찬을 해줬다.
어떻게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했을꼬! 대단해, 정신실!
측정할 수 없는 것, 해도 티가 안 나는 것,
치료평가서에 뽀대나게 적을 수 없는 것이 치료사로서의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는 것을 갈수록 제대로 느끼고 있다.

인생도 그러하다.
책을 낸다거나,
있어 보이는 글로 인기를 끌거나,
유명한 사람들과 말을 틀 뿐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은 행복의 '겉'일 뿐이다. 

딱히 자랑할 수는 없는 일상을 가지는 것,  
작가나 전문가가 아니라 엄마나 아줌마로서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지는 것에 행복의 속살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냉동실에 얼음을 얼리는 것처럼 미미해 보이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말이다.

한 때, 내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게 하는 타이틀이 '음악치료사 정신실'이었다.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열정에 겨워 노래를 불렀었다.
내가 만나는 그 안타까운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었다.
내 노래의 아름다움으로 날개 정도는 얼마든지 달아줄 수 있을 거라고,
이 아이들을 얼마든지 저 멀리 무지개빛 세상으로  날려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내 노래는 그냥 노래다. 날개 따윈 없다.
날개 없는 노래를 가진 나는 체리쥬스를 얼리고 보온병에 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날개는 없지만  저 빨간 얼음조각을 만들어 놓고 행복하다.

그럼 됐다. 

애초부터 날개가 없는 노래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해도 괜찮다.
이제라도 헛되이 꿈꾸는 일을 접고 지금 여기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게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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