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미용실이 하나 새로 생겼다. 내 또래의 말이 없는 여자분이  미용사인데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다. 현승이 한 번 가고, 이후에 남편도 그곳으로 보내고 있다.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데 거의 손님이 없다. 미용사분 혼자 조그만 난로 가까이에 손을 대고 불을 쬐며 TV를 보는 모습이 늘 똑같다. 아효, 오늘도 손님이 없네. 걱정을 하면 아이들이 엄마는 왜 그리 남의 집 장사에 신경을 써? 한다. 머리 잘 자르는데 장사 안 되서 문 닫을까봐 그러지. 라고 대답하고 만다.


그 옆에는 여름엔가 봄인가 오픈을 한 카페가 있다. 훈남 청년이 하는 건데 손쉽게 원두를 살 수 있어서 좋다. 블랜딩한 원두가 꽤 맛있었는데... 갈수록 조금 아니다 싶다. 동네 카페들과 달리 특별히 로스팅을 잘 하는 곳에서 원두를 받아온다고 했었다. 장사가 잘 안 되니까 단가가 낮은 원두로 바꾼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도 지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여름엔 장사가 좀 되더니 날이 추워지니 손님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왜 이리 신경을 쓰고 그래? 엄마~아! 하는 아이들에게 '생각을 해 봐.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는 준비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쓰며 시작한다구. 어쩌면 돈을 은행에서 빌렸을 지도 모르고, 가진 돈을 다 썼을 지도 몰라. 그러면서 얼마나 기대를 했겠어? 그런데 막상 손님은 없고 매일 저렇게 앉아 있으려면 정말 속상하겠잖아. 그러다 정말 문을 닫기라도 하면 희망이 무너지지 않겠냐? 그런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래. 엄마도 카페 하고 싶어 하잖아. 엄마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니? 마음이 아파.



그러다보니 아이들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엄마, 미용실에 사람 하나 있더라.' 하며 (지들이 되려) 신경을 쓰고 그런다. 지난 12월 28일. 채윤이는 그 미용실에서 방학 기념 매직 퍼머를 했다. 점심 때를 넘기고 있었다. 카페에서 라떼 한 잔과 코코아 한 잔을 사서 가져다 주었다. 괜히 뿌듯해진다. 늘 마음에 쓰이던 양쪽 집을 한 번에 챙긴 느낌. 그리고 채윤이를 미용실에 두고 현승이 손을 잡고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별다른 일도 없고, 무력하고, 슬픈 성탄절을 보내고 난 후였다. 성탄절 이브에는 집에서 혼자 따뜻한 전기장판 켜고 낮잠을 잤다. 25일 성탄 예배에 가서는 정말 영혼의 잠을 자고만 싶었다. 이렇게 등 따시고 배부른 내가 더럽고 천한 마굿간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고 모실 수 있을까? 페북을 통해서 접하는 이웃의 탄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데 참된 '안녕'은 천국에가 가야 이뤄지는 것, 여기서 아둥바둥 할 게 뭐 있냐며 그저 내 일신의 안위만 붙들고 사는 하루하루다. 무력해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잠이나 처자고 싶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28일 시청 앞 집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한 번 나가자 나가자 하면서도 남편 시간이 날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저 가기로 했다. 하필 이 날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잡혀가면 어떡하냐, 물대포 쏘면 어떡하냐며 엄마 가지마 가지마 하는 현승이를 설득해서 손잡고 나갔다. 얼마 전 새로 사귄 형아를 만날 수 있다고 꼬셨다. 시청역 출구에서부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잠시 일행을 잃고, 추위에 동동거리고.... 그러다 빠져나와 일행과 함께 코코아 한 잔 하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현승이가 '나는 안 갈 거야. 엄마도 가지 마. 잡혀가면 어떡해?' 라며 걱정에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채윤이가 그랬다. '현승아, 엄마랑 같이 가. 안 잡혀가. 그리고 가면 재밌어. 누나도 깁스만 안 했으면 가고 싶어.' 현승이가 겁이 많고 기질적으로 새로운 자극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문득 채윤이랑 했던 2004년 광화문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채윤인 그 경험을 아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 역시 채윤이 기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때와 다르다. 2004년의 광화문에는 기가 막히는 적반하장에 어이없는 한숨은 있었지만 이렇게나 절망적이지 않았다. 수십 년 뒤로 물러난
민주주의 시계를 감지하면 삼엄함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2002년은 현승이를 가진 해이다. 돌이켜보니 현승이를 품고 민주당 경선을 지켜보며 인생에서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감동과 희망을 경험했다. 임산부의 몸으로 한 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문성근씨의 연설을 들으며 남편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일, TV가 없어서 친구 집에서 대선 개표방송을 보고 당선 확정 결과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 추운 겨울 춥지가 않았다. 세 살 우리 채윤이가 앞서서 춤추며 걸어갔다. 내 마음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말을 알아듣을 만큼 커서 그 시절을 보낸 채윤이에겐 시위도 즐거운 축제가 될 수 있었으니 '현승아, 괜찮아. 가. 가면 재밌어.'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현승이가 가진 좋은 성품에 깜짝 놀라 때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 마음결이 고울까? 특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2002년 대선과 함께 한 그 드라마 같은 경험이 정말 좋은 태교가 되었겠다. 그랬겠다. 시편의 기자가 그렇게나 목놓아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 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통받습니까?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정직한 사람은 왜 늘 약자이고 폭압 아래 있어야 합니까? 어찌 악인은 높아지고 승리합니까? 이다. 몇 천 년 후를 사는 나 역시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싶다. 그런데 2002 그때. 힘없고 빽없고 정직한 정의가 이길 수 있구나를 경험한 것이다. 그 기막힌 경험을 하는 엄마의 몸 속에서 나온 좋은 에너지가 어찌 현승이 성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 매매가 되어 본의 아니게 이사를 해야할 상황이었다. 우리집 역시 계약기간이 끝나서 대출이 늘어나는 것으로 결론이 난지 얼마 안 됐다. 엄마랑 동생네 걱정을 하며 얘기하다 "엄마, 우리 나라에서 집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절약하고 착하게 살아도 2년만 지나면 그냥 빚이 늘어'나. 그런 세상이야." 했더니 공감을 하시며 "그르니께 애들 잘 켜(키워), 공부 잘 혀서 성공허라고 혀." 라고 하셨다. 90 노모 앞에 무슨 말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을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안녕이라는 고지를 점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 전까지 안녕하지 못할 이 세상에서 안녕하지 못한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사람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천국을 진짜로 믿고 사는 사람, 하필 가장 더럽고 천한 마굿간으로 오셨다 가신 예수님을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 이웃의 안녕하지 못함을 담보한 나의 안녕과 부와 힘은 허상일 뿐인 샬롬이다.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더 자주 아이들과 함께 현장에 가려고 한다. 이 아이들에게만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거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서도 아니다. 역사가 지속되는 한 늘 안녕하지 못할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가르쳐주고 싶다. 안녕하지 못한 이웃의 곁,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자리가 예수님 자리 아닌가.


결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닌 동네 미용실과 카페와 동생네와 우리네의 불안한 일상. 내 이웃의 안녕과 우리의 불안한 일상. 때로 기막힌 절망의 일상. 마라나타를 저절로 되뇌이게 되지만 그 주님이 이미 이 낮고 가난하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로 오셨었다. 그 자리를 애써 피하지 말고 내가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긴 한데..... 참으로 절절한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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