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 지도 몰라요.’(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어려워진 관계를 풀어보려고 애를 써보는데 풀리기는커녕 더 골이 깊어지는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나는 노래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회복이 있겠는가. 온갖 오해와 미움 벗어버리고 맑은 얼굴로 만날 날이 있으리라. 지금 여기 말고 그 나라, 그 좋은 나라 말이다. 이 노래가 주는 위로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천국은 너무 멀고, 당장 이번 주일에 ‘당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문제’는 나남이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소그룹 모임에서 반드시 피해야할 토론 주제가 있는데 ‘정치’ 라고 한다. 분명하게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맞붙어 얘기해 봐야 서로의 말에 베이고 찔려 피차 상처받는 것 외에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제랄드 싯처가 <사랑의 짐>을 통해 내놓는 해법은 ‘서로’에 방점을 찍고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달고 나왔던 제목, <차이를 넘어선 사랑:Loving Across Our Difference>은 ‘서로의 차이 vs 서로 사랑’의 공식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첫 장을 ‘서로 반가이 맞아들이라’, 즉 ‘인사하라’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나와 달라 힘겨운 그 사람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심장이 쿵 내려앉지만 ‘인사’하는 정도의 ‘사랑’은 다시 해 볼 수 있겠다 싶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관계 문제로 인한 분노와 죄책감의 ‘수고롭고 무거운 짐’ 을 내려놓고 대신 쉽고도 가볍다고 하는 그 분의 멍에, ‘사랑의 짐’을 지겠노라는 결심 같은 것이 선다.

 

 

 

 

살짝 틀어진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은 '그 사람은 나쁘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꼬리표를 붙여버릴 때다. 그 사람이 나쁜데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선할 수 없다. 결국 나도 같이 나빠지기로 하면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심리상담가이지만 성경적 인간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저자는 끊어진 관계가 다시 결속되는 것은 내 안의 선한 충동이 이끌어져 나올 때라고 한다. 내게 선한 충동이 있다고? 설령 있다 해도 그 선한 충동이 나에 대해 험담하는 친구, 고집대로만 사는 대화가 안 통하는 남편,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통제하는 목사님에게 풀려나가야 한다니? 래리크랩은 독자보다 먼저 이 의문을 제기하고 답한다. 그렇단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흘러갈 선한 것이 내 안에 있단다. ‘선한 충동’은 제랄드 싯처가 말하는 ‘서로 사랑’의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 하니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끊어버린 페이스북 친구를 다시 구제하여 연결되는 그런 소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좋은 나라에 가기 전에 바로 여기서 말이다.

 

 

인면수심의 범죄자 이야기에 치를 떨지언정 솔직히 말하면 그를 용서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내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 그(그녀)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는 것보다는 말이다. 아니 말 자체의 모순이다. 그 범죄자는 아무리 지은 지가 중해도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대상은 아니니까. 힘겨워진 관계를 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서 크든 작든 ‘용서’는 필수 과정이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며 쌍방과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틀어진 관계는 용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립 얀시가 ‘용서 전문가’라고 부르는 루이스 스미디스의 <용서의 미학>은 다짜고짜 용서하라 설교하지 않는다. 용서의 ‘용’자도 떠올리기 싫은 해를 당한 우리 마음을 깊이 알아준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쓰라린 마음과, 그가 나의 또 다른 지인과 아무렇지 않게 히히덕대는 걸 보면서 분노로 빨라지는 심장박동도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안내한다. 결국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게 되는 것임을. 용서전문가의 안내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그(그녀)가 ‘정말 잘되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용서를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잠깐의 위로나 받자고 부르는 자위의 노래가 아니라 온전히 회복되는 그 날을 기대하는 참된 소망의 노래로 말이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곳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 거예요.’

 

<큐티진> 4월호, 주제가 있는 책 소개 -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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