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이 시작하기를

대통령 탄핵 안이 기각되었다. 그간 쓸데없는 일로 가슴 졸인 것이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만,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문제의 한 원인이 본인들에게 있을진대 그건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무조건 사과’를 요구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상식적인 힘’을 행사하고, 시시비비가 가려졌는데도 ‘치사하게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자니, 정말 미성숙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헌재가 판결을 내리자마자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소추위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해야지’ 라는 대답을 했다는데, 참 그렇게 미운말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사과하고 용서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이미 천국이 왔어도 수십 번은 더 왔을 것이다. 전쟁 할 이유도 없고 부부간에 이혼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싸우고 등 돌리고 보복하고 화해하려고 하는 저들의 미숙한 행태를 보고 있자니, 신혼 때 우리 부부의 갈등패턴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 싸움의 패턴은 계속 순환할 거다. 그러나 패턴을 객관화해서 보고, 그 순환의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계의 성숙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으리라!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사랑이란 오~래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말해준다. 내가 아내의 응답을 기다리며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견뎌내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근데 그것도 자꾸 반복되고 패턴이 되다보니 기다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패턴이라 함은 이런 악순환을 얘기한다.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한다.(나는 모르고, 아내는 안다.) 그것이 반복되면 아내는 참다 참다(그걸 좋게 말 하지. 왜 그리 참느냐 말이다) 침묵으로 시위한다. 대충 실수와 잘못을 감 잡은 나는 사과한다. 아내는 그 정도의 사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로부터 ‘인내’를 학습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내는 단호한 결심을 한 듯, 그간의 내 문제와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고 승부수를 띄운다. 나는 더 이상의 악화를 막기 위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도 (혹 아내가 짐 싸들고 도망 갈까봐?) 무조건 잘못을 시인한다. 어느 정도 화해의 분위기가 되면, 정서적 하나됨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남자인 나는 서둘러 육체의 하나됨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고 다 해결된 듯 안심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 해결되었을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한 듯, 여자는 그렇지 않은 듯 -.-)
아슬아슬 신혼을 즐기다가 나의 실수는 반복되고 아내는 어느 날 또다시 침묵의 세계에 빠지고, 나는 또 사과하고... 말하자면 대충 이런 패턴이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인내의 한계 끝에 여럿 의문이 고개를 든다. ‘와이프에게 너무 잘해 주지 마라. 버릇든다’ 는 한 선배의 말이 혹시 맞는 말 아니야?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하는 거야! 이거 원, 내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뿐이잖아. 나는 뭐 속 터지는 일이 없는 줄 알아? 누군 뭐 으다다다 할 줄 몰라서 그런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만 참으면 되는 건가?

나는 ‘미안해’라는 말을 꽤 잘 쓰는 편이다. 원래 타고난 ‘평화주의자’여서 그런지, 갈등이 생기면 내 편에서의 원인제공에 대해 즉각적으로 살피는 버릇이 있고, 인정된다 싶으면 지체 없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물론 장단점이 다 있다. 불필요한 갈등으로 비화시키지 않고 조기 진화 성공률이 높다는 데에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외면적 평화를 진짜 평화로 착각할 때도 적잖이 있으니 그것은 좀 문제다. 그나저나,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미안해’ 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화해와 평화의 미학을 모를 일이 없을진대, 어째서 아내는 이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일까? 그뿐 아니다. 내가 하는 이 말의 진정성을 어찌 그리 쉽게 의심한단 말인가? 해결의 실마리로서, 꼬인 대화의 물꼬를 트는 말로써, ‘미안해’만큼 좋은 말이 없는데, 어째서 아내는 완전한 화해의 뜻으로서만 이 단어를 고집하는 것!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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