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오늘 책 읽지 마"
새벽기도 갔다가 옷 갈아입으러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다정하면서도 짜증스럽게.
"오늘은 애들하고 집안 정리 좀 해. 당신은 학자가 아니야. 뭐든 대충하고 책 보려 요즘 집안이정리가 안 되고 있어. 너희들, 오늘 엄마랑 같이 다 정리해!"

이건 정말 정리되지 않은 집구석에 대한 불만인가,
아니면 책 읽을 여유없이 살고있는 삶이 공허해 속상해 죽겠는데, 
소파에 늘어져 책이나 보고 있는 여자에 대한 부러움을 지난 질투인가.

사실 엄마가 다녀가신 이후로, 그 주간 혼신의 힘을 다해 세 끼 밥을 하고나서
살포(살림포기) 상태였다.
원고 마무리 해야하는데 도통 글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테이블 밑에 벌써 언제부터 쌓여 있던 참고서적.
보지도 않으면서 치우지도 못한다.
쌓아두고 있으면 원고에 손을 놓고 있어도 조금 위안이 된다.
당장 하고싶은 건 지금 읽고 싶은 책을 연달아 죽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살림을 제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원고를 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닌,
스마트폰 들고 교황방문과 세월호 뉴스 등을 들여다보며 늘어져 있는 어정쩡한 나날이다.
강의가 있는 날, 그 전날에는 조금 시간이 팽팽해진다.

책에 대한 욕심,
원고에 대한 압박,
챙겨 봐야할 뉴스를 내려놓고 집안 정리에 나섰다.



 


한 주간 캠프 다녀온 현승이,
피정 다녀와서 바쁜 아빠,
수련회 후유증을 앓으면서 늘어져있는 채윤이,
다중이 페르조나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엄마.
넷이서 오랜만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제대로 준비해보려고 망원시장에 갔다가 무청 다 떼내고 무만 있는 알타리 발견.
'김치 하긴 해야하는데...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게 알타린데...'
갈등하고 있는데,
"언니. 이거 다 털어서 만 원에 가져가. 이렇게 쪽파 천 원어치 넣어서 김치 해"
처음 보는 동생이 부추겼다.
옆에 있던 현승이가 낄낄거린다.
"엄마보다 훨씬 늙었는데 왜 자꾸 엄마한테 언니라고 해?"
처음 보는 늙은 동생의 간곡한 요청도 있고 해서 김치 하기로 결정. 
늦도록 수고하여 김치 완성했다.


상당히 맛있을 것만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다.
이 맛있는 김치의 숨은 공로자는 역시 현승이.
알타리와 파가 든 큰 비닐 주둥이를 묶으니 자루 모양이 되었다.
굳이 그걸 제가 들겠다고 우기더니  어깨에 떡 짊어지고 좋아한다.

"아~나, 이렇게 하는 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엄마, 나 머슴같지? 케케"
무를 다듬는데 옆에 와서,
"나 칼로 하는 거 하고 싶은데 뭐 좀 시켜줘" 한다.
쪽파 대가리를 자르라고 했더니
다듬는 것까지 해주었다.
중간에 눈 맵다고, 이럴 땐 썬글을 쓰고 하면 된단다.


또 하, 또 하..... 또 하루 멀어져간다. 
언제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또 하루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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