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두고 혼자만의 특별기도 기간이었다. 설거지하며, 운전하며, 운동하며, 침대 누우면 잠들 때까지 '이 땅을 긍휼히 여기소서' 시시각각 기도가 올라왔다. 이 부조리한 나라, 이토록 추악한 조국 교회에 그분의 시선이 머물까? 과연 그러할까? 자주 생각한다. 실은 그분을 믿는 만큼 더 자주 상심하게 된다. 선이 이기고 약한 자가 우뚝 서고, 우는 자가 눈물을 그치게 되는 일이 있었던가? 동화 속 이야기도 아닌데 왜 강하고 착한 사람은 없고, 착한데 잘 되는 사람 찾기 어려운 걸까? 상심하지 않기 위해 기도했나 보다. 어떤 결과를 보더라도 그 12월의 멘붕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마음 단단히 먹자, 하는 기도.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부조리하고 추악한 나라와 교회의 궁극적 통치자가 그분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 할지라도 사실 나는 믿는다. 그래서 더욱 절절한 기도였다.


남편 퇴근하고 돌아오면 잠시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 남편이 그날그날 판세를 읽어 분석해주고 나는 주로 한숨 내쉬거나 분통 터뜨리며 감정을 쏟아 놓는다. 실은 그 시간마저도 기도이다. 냉정과 열정, 두 개의 마음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이다.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 그것을 꿈꾸는 기도이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 정청래가 컷오프되었을 때는 사실 눈물이 났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 제일 싫다. 정치인도 마찬가지. 정치적인 정치인이 싫다. 언어에 이중 메시지를 담은 사람과 대화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다. 뒤에 뭔가가 잔뜩 있는 것 같지만 당장 하는 말과 처신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 이런저런 팟캐스트를 들어봐도 정청래 컷오프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치 무관심자가 되자, 결심했다. 작심삼일. 무관심은 무슨! 정치는 일상과 가장 가짜이 닿은 세계인데 어찌 무관심이 가능하리.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정청래 컷오프라니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손혜원이 안 되면 저 정말 또 며칠 못 일어나요. 손혜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밀어주세요'


컷오프된 분들이 정청래를 중심으로 탈당하지 않고 유세단을 짰단다. '더컷유세단'이라 지은 이름을 손혜원 님이 '더컸유세단'으로 다시 작명했다고. 임영수 목사님 계신 양평의 '모새골_모든 것을 새롭게' 역시 카피라이터 손혜원 (이제는 의원님이다!!!!)의 작품인 걸 아시는지. 더컸유세단을 보며 희망의 불씨를 마음에 담았다. 반장 선거에 나가 떨어져도 그 상실감이 한참 가더라. 많은 국민(당원?)의 사심없는 지지를 받는 좋은 사람들이 컷오프를 당하고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그리하여 다들 당을 뛰쳐나가지 않던가. 헌데 유세단을 구성하여 내 자리를 꿰찬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춤을 추며 응원을 할 수 있다니. 감동, 감동, 감동이다.


이기심 vs 이기심, 움켜쥠 vs 움켜쥠, 나만 옳다 vs 나만 옳다. 끝없는 갈등이 양산되고 양산될수밖에 없는 정치판의 기저이다. 어디 정치판뿐인가. 갈등하는 교회도, 갈등하는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를 맞다니! 재빠르게 네 대 때리고. 컷오프라니! 욕하고 탈당하기. 다들 (해봐서 잘) 아는 갈등대응 방식이다. 헌데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한 대 맞았는데 '아야, 에잇..... 공평하게 양쪽 다 때려줘. 왼쪽도 한 대 더 때려' 한다면. 컷오프 됐는데 '어디 나 퇴출시키고 그 자리 지키나 보자'하지 않고 그 자리 지키도록 돕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정말 감동 아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멀리 내다보는 고레벨의 정치 안목이라 해도 당장 이러기는 쉽지 않다. 높이 산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들이 상처 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가시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언제든 찌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자, 피해자로 규정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더컷'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더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권리 당위를 깨고 나온 사람들. 짤렸지만, 짤려서 상처받고 아프지만 그 자리에서 뒹굴지 않고 한 뼘 더 크기로 선택한 것이다. 크기로(자라기로) 선택하다니? 키 크는 것이 내가 크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인가? 성경에도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 하지 않는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에선 가능하다. 상처라는 악의 순환고리를 끊고 궁극의 긍정을 지향하기로 한 사람들, '상처 입은 치유자'라 불러도 좋으리. 자신의 상처를 다 치유한 후 작위처럼 수여받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프지만 거기 뭉개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 거창하지도 않은 그 자.발.적. 의지 하나면 족하다. '더컷'과 '더컸'은 결국 '시옷' 하나 차이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지 못하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처 입은 자신을 방어하고, 방어하기 위해 잔인하게 공격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아니, 얼마나 자주 그러고 사는가. 선거를 위해 기도했다. 아니, 선거 이후의 나를 위해 기도했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설령 선거에 이기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할 테니) 개표 결과로 일단 기쁘지만 생각이 자꾸져 먹구름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 웃음 끝이 자꾸 쳐지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그래도 좋을 걸 생각하자! 정말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안 된 것을 보면 다시 입꼬리 승천. '거봐, 하나님 살아 계시쥐?! 음하하하.' 무엇보다 손혜원을 우리 동네 국회의원으로 가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잖아. 박주민 변호사 당선은.... 정말 이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난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꽃은 '더컸유세단!'. 내겐 그렇다.  


총선을 위한 나만의 특별기도회, 기도 응답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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