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주일예배를 본당에서 드리지 못했다. 주일에 강의가 있어서 집에서 가까운 별관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두어 주 집을 비우기도 했고 이래저래 본당까지 가는 길이 멀기만 했었다. 그러나 담임 목사님이 계속 설교하셨더라도 그 정도 이유로 본당사수를 포기했었을까? 끝없이 밀려드는 교인들을 보면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모여들까?' 생각하면 담임 목사님의 설교이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떠나서 지난 2년여 목사님의 설교가 교회생활의 전부라 여기며 살지 않았던가. 이 교회로 오기 전 몇 년 동안 깊은 회의 속에서 기독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세세하게 어루만진 것은 담임 목사님의 설교였고, 새신자반으로 시작하는 '반' 시리즈였다. 가톨릭 영성으로 도피하여 방황하던 따뜻하게 안아 제자리 찾게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단지 목사님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본당사수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진 것에 대해서 내게 물어야 한다. '아직도 권위자를 의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니?'


오랜만의 본당사수 예배를 드린, 초심을 잃은
 내게 설교 본문은 말했다. "네가 초심을 잃은 이유를 말해줄까? 30 분씩 서둘러 집을 나서고 그럴 때마다 설렜던 바로 그 열정이 사라진 이유를 말해줄까? 열정이 사라진 상태,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마음 상태,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겠다는 경직된 심장이 원인을 알고 싶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부요하다 하고, 부족한 것이 없어 나 스스로 충분하다는 존재론적인 교만이 나를 눈 멀게 하여 정작 배고프고 목마른 내 영혼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 교회 사람들은 다들 담임 목사님 설교 때문에 교회 다니는 거지, 공동체를 지향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제자가 아니라 회원일 뿐이다. 맘에 드는 예배를 서비스받는 미끈한 단체에 다닐 뿐이다. 라 생각했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담임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면서 말이다.


보다 진실하게 나를 돌아보면 내 영혼 많이 외롭다. 이 교회 처음 왔을 때처럼 아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애쓰다 상처받고, 그래도 또 다시 일어나 애쓰다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어서 외롭다. 외롭고 공허할수록 나는 부요하다, 부족함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 혼자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잘 가지고 있다, 교회 밖에서 좋은 벗들을 만나 풍성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이 가난하고 곤고한가! 라며 속이고 있지만 내게는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열정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괜찮지 않다. 누구보다 가난하고 누구보다 목마르고 누구보다 헐벗었다. 내 발로 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여전히 좋은 설교에 내 신앙의 수준을 걸고 있는 유아적인 의존성 아래 있다. 본당으로 가길 잘 했다.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이 필요하다. 그것들이 촌스럽고 지질해 보여도, 사실 나는 그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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