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그것도 남편의 설교를 퍼나르는 일은 조금 오글거리는 일이지만 참 좋아서요.
오늘 남편의 새벽설교 내용인데 교회 홈페이지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2, 3번의 내용, 그리고 기도가 오늘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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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잠언 21:1-31

잠언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지혜’교과서입니다. 잠언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삶의 준칙으로 삼으면, 하늘백성으로 산다는 것의 묘미를 맛보게 됩니다. 잠언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경구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경구일 것입니다(잠 9:10). 그것이 하나님나라, 제자학교의 교과서 제1장 제1조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임의로 인도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잠언 21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 앞의 겸손’이라는 이 두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1절)
고대 근동에서 왕은 힘과 지혜의 상징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 최강자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강한 자가 없고, 그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이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은 왕의 마음도 당신 뜻과 당신 섭리대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왕일지라도 때론 막고, 때론 끌고, 때론 높이고, 때론 낮추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왕도 임의로 인도하신다’는 이 교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30-31절)
아무리 높은 지혜도, 아무리 깊은 명철도, 아무리 뛰어난 모략도 하나님과 견줘봐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끼리는 하버드대학 나온 사람이 대단하고, 아이큐 150이 천재이고, 5개 국어를 구하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1억’이라는 숫자가 ‘무한’이라는 숫자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피조물의 지혜는 창조주의 지혜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선한 의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인 불결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과 맞서지도 말고, 이 세상의 마병을 의지하지도 말며, 오로지 지혜와 힘의 최강자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만을 희망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2.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지혜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은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내면세계를 샅샅이 살펴보며,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2절)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합리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욕망의 정체를 애써 외면하고, 욕망을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화의 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찰하다’는 말은 ‘저울로 무게를 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의 동기의 무게를 재시며, 우리의 순수성과 진정성이 순도 몇 %인지 정확하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아신다’는 이 잠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뿐 아니라, 돈 버는 수단과 방법의 정직성의 무게를 재시는 분입니다(6절). 타인에게 주는 선물이 진심으로 하는 축하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가장한 거래요 뇌물인지도 하나님은 아십니다(14절). 만면의 미소를 띤 얼굴의 표정 또한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인지 마음을 속이기 위한 더러운 가면인지 우리는 혹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29절).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드러내고, 매일매일 부패한 내면을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말씀으로 속사람의 동기를 비추고, 성령으로 추악함을 도려내는 자가 진짜 지혜로운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삶이 담보된 예배를 기뻐하신다.
안타깝게도 예나 지금이나, 잠언이 쓰여 진 시대나, 예수님 당대나, 지금이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망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아둔함과 어리석음의 비극적인 결과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3절)
하나님의 간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울 왕의 어리석음이 무엇이었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몰랐던 데에 있었습니다(삼상 15:22). 다시 말하면, 삶과 예배의 괴리입니다. 말씀 따로 실천 따로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과 주중의 이원화된 삶, 교회와 일터의 이율배반적은 우리의 삶을 애통해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잠언 21장, 3절 이후에 등장하는 악인은 뉴스에나 등장할 법한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삶이 담보되지 않은 채 예배의 형식에만 집착하는 우리를 향한 고발인지도 모릅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이웃을 코앞에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호의호식하는 자가 누구입니까(10절), 가난한 자의 배고픔은 외면한 채, 자신의 삶의 여가비를 구하는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13절), 사회적인 약자들의 탄식과 아우성의 소리에 귀 막고 눈 먼 자가 누구입니까(13절), 타자와의 공감, 이웃과 나누는 공평의 노력에는 단 한 시간도, 단돈 1천원도 나누지 않으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탐욕과 탐심에 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17절, 26절), 양심의 눈을 감은 채 불법으로 돈 버는 일엔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그 돈으로 하나님께 바치며 일신의 안녕과 무병장수의 복을 비는 파렴치한 싸구려 종교인은 누구입니까(27절).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조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라보며 미가 선지자가 외친 가슴 절절한 호소는, 단 한자도 버릴 것 없이 2700여 년이 지난 2013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미가서 6장 6-8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기도하겠습니다.

한 뼘밖에 되지 않는 우리 마음조차 다스릴 줄 모르면서, 한 주먹밖에 되지 않는 우리 머리조차 통제하지도 못하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지혜도 없으면서, 하나님 없이 만용을 부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직 하나님 손에만 붙들리게 해주십시오. 오직 우리 속사람의 숨은 마음의 동기를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가 생활화 되고 생활이 예배화 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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