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렘브란트

고난주간 지나고 있습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 성토요일입니다. 작년에 깊은 공감으로 읽은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의 부제목은 '죽음과 부활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이었습니다. 금식과 눈물 콧물로 성금요일을 지내고, 우리는 바로 부활의 새벽으로 도약했습니다. 부활을 성경공부로만 배운 탓입니다. 정작 우리의 일상은 이미 덮친 고통의 실존을 살아내는 토요일인데 말입니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 성토요일. 저는 더 이상 여기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머물러 느끼고, 견디고, 애도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 뿐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은 상실의 늪에서 오지 않은 부활을 상상하는 법을 배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깊이 머무르지도 못합니다. 남편이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일주일 동안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신학도로서 본문을 연구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상상력을 덧입혔습니다. 이번 주에는 밴드에 글이 올라오는 알람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로마 병사들, 빌라도, 백부장이 등장했는데 오늘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오늘 아리마대 요셉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감이 됩니다. 전문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집에만 있자니 너무 분하고 답답했습니다. 골고다로 가자니 차마 그분의 죽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열린 산헤드린 의회 때, 광기에 휩싸인 의원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반대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단 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려 드는 의회원들의 기만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자기들이 하는 일이 여호와의 명예를 가리는 일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내세우고, 전통을 보수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도둑놈들임을 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온갖 특혜는 다 누리며 권세를 부리는 의회원들은 죽은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위선에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실 때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바꿔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요셉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고 했을 때, 드디어 그날이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어떤 방법일지는 잘 모르지만, 선생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때가 왔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했습니다. 의회는 유월절 전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저는 여러 사람을 만나 어떻게 해서든 이를 막아보려고 했는데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만두면 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정체를 숨긴 채 중립적인 척하면서 예수 선생을 지켜주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비겁했습니다. 제가 더 확실히 노력했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의 운동이 좌절된 것 같아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골고다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그분이 죽었다고 알려줬습니다. 아,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쯤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될 텐데, 자칫 선생의 시신은 공동묘지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서둘러 빌라도의 공관으로 갔습니다. 총독을 단독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쪽저쪽에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는 숨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시신이라도 잘 거둬 최소한의 장례를 치르게 해야 그나마 제 마음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패로 몰려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사람을 보내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순순히 내어 주더군요. 그는 끝까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었습니다. 빨리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얼른 한 사람을 시장으로 보내 시신을 쌀 삼베를 넉넉하게 사 오게 하고, 또 다른 종을 보내 제가 죽으면 가족 묘로 사용하려던 무덤에 선생의 시신을 임시 안치할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예수의 어머니와 여인들에게 장례 절차를 설명해 드리려고 저는 서둘러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예수의 시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마치 아기를 안 듯 안고 있는 모습에 저는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었어야 했는데. 돈을 좀 써서라도 의회원들의 마음을 좀 돌려놨어야 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시신을 들것에 옮겨 두고, 운구할 종들을 지목했습니다. 예수 선생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니고데모 의원의 말을 듣고 저 역시 밤에 그를 찾아갔었지요. 저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오래 기다리고 기도해왔던 메시아 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무수히 보아왔던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따뜻했지만 그 지성은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율법의 의미가 그렇게 선명하게 이해될 줄 몰랐습니다. 예수의 묵직한 손을 무심코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너덜너덜해진 그의 손은 차마 보기가 민망하고 끔찍했습니다. 가만히 예수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 보았습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랍비여, 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가져다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용기가 없어서 오늘 새벽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마귀처럼 날뛰는 의회에서 제가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온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목숨 부지하고자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지 못한 까닭입니다.’

저는 울움을 참아야 했습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얼른 움직여야 했습니다. 무덤은 가까웠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준비한 향품과 향료를 서둘러 발랐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삼베로 시신을 둘둘 싸매었습니다. 마지막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선생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다짐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죽었지만, 여러 차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선생님의 꿈은 내 안에서 죽지 않았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예수여, 잘 가시오. 못다 이룬 꿈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이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가족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얼굴을 삼베로 싸매고, 인사를 드리고,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습니다. 1년 후에나 다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간 시신의 뼛조각을 모아 유골함에 담아 드릴 때나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울면서 무덤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보낸 백부장의 부하들이 무덤 앞을 지키기로 했나 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갈 것을 대비하는 모양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그동안 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왔습니다. 실은 의회에서 제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리면 저는 곧장 파문당할 것이고, 제 사업장은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께서도 제게 굳이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라고 하진 않으셨습니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당신의 시신을 거두는 때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하고 송구할 뿐입니다.

3일 후 선생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갈릴리를 다녀온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저도 부활하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할 일이 많을 거라며,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긴히 부탁하셨습니다. 지난번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의회에 붙잡혀 왔을 때 이미 의회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풀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들은 광장에서 복음을 전했고, 저와 니고데모는 의회에서 우리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일로 정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야고보 사도는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힘내십시오. 여러분 뒤에 제가 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맡은 의회원 요셉 드림

<마가복음 15: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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