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째 듣고 있는 '영성과 철학상담'이라는 강의 중 있었던 일이다. 강의와 집단상담으로 진행되는데 집단상담 첫날이었다. '한계상황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K.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으로 배우고 나누는데 내게는 정말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집단상담에서 어느 분이 자신이 경험한 한계상황을 얘기했다. 믿고 존경했던 성직자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 금액은 본인이 30년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란다. 그분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희망이 있을 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는 내용이었다. 그 성직자가 마음을 돌이켜 나타나줄 것이다,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다, 이런 희망이 온전히 무너진 순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는 얘기. 


분위기가 술렁술렁했다. 어머, 어머, 세상에! 내 옆에 옆에 앉은 나이든 여자분이 내 옆에 앉은 분에게 뭐라뭐라 끊임없이 속삭였다. 속삭임인지 투덜거림인지. 내 자리에선 그분의 눈썹이 보였는데 기본적으로 3단 정도 꺾여 있는, 짙고 강한 눈썹이었다. 얼핏 '신부, 목사, 목사, 신부' 하는 것으로 들렸다. 아, 이 그룹의 멤버는 주로 가톨릭 신자들이다. 강사가 철학과 교수이며 예수회 신부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삼단 눈썹이 자꾸 거슬렸다. 자신의 한계 상황을 고백했던 분의 말이 끝나고 '한계상황과 실존'에 대해 한 말씀을 기다리며 인도하는 신부님을 고양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님 말씀 '아니, 당사자를 찾아가든지, 도망가서 없으면 주교님 찾아가야죠. 가서 신부 못하게 만들어야죠.' 라고 말했다. 한계 상황녀께서 주저주저 말씀하셨다. '아..... 그..... 저는 개신교 신자라..... 신부님이 아니라 모.... 목사님이.....'  그러자 바로 삼단 눈썹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신부님은 그럴 리가 없어. 신부님이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사기를 쳐' 짙은 삼단 눈썹이 씰룩씰룩 요동을 쳤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분은 '나는 딱 듣자마자 목산줄 알았는데요' 한다. 여기저기 그럴 줄 알았다, 그럴 리 없다, 가 릴레이로 터져 나왔다. 


나는 혼자 얼굴이 벌개지고,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부여잡고 소외감도 아닌 분노도 아닌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삼단 눈썹녀가 눈썹으로 말하는 그 소리들이 견딜 수 없었다. 엄마, 아니 남편이 보고싶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이후 시간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쿵쾅쿵쾅 내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발언자는 예수회 수사님이었다.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한계상황은 역시 예수회 입회 직전이었지요'라는 말로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좋아했단다. 운이 좋게도(라고 표현했다) 관련 전공으로 대학엘 가고, 쉽게 취업을 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돈 받고 하게 되다니, 행복할 줄 알았단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하는데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더란다. 오히려 공허함이 차올랐다고 했다. 가장 공허했던 순간은 첫월급을 받던 날이었다고.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 날 퇴근하려고 일어서다 건너편에 앉아 일하는 부장님인지 팀장님인지의 뒷모습을 주시하게 되었단다. 그 모습이 10년, 20년 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확들었다고 했다. 


아, 이 공허함을 어디서 채움받을 수 있을까? 하느님께 가면 될까? 피정을 다니곤 했단다. 곡절 끝에 '다행히 아직 결혼도 안했으니 하느님께로 가자' 하고 예수회에 입회를 하고 사제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그런데 이것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었다며, 여기에도 행복은 없다며, 한계상황은 늘 새로움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끌어 가신다는 희망 때문에 행복하다고 훈훈하게 마무리 하였다. 몰입해서 듣다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비약적 희망에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 찰나, 강사 신부님께서 '희망에 대한 회의'라는 말로 뼈 있는 코멘트 하셔서 좋았다.


2주가 다 되어가는 일이다. 내내 이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몰래 파견된) 개신교 대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낯이 뜨겁도록 (몰래 혼자서) 모욕감을 느껴다. 내가 목사도 아니고, 사기 친 목사는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동일시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목사와 신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마지막 발언했던 수사님의 얘기를 들으며 '소명 확인, 실존적 고민'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다. 기도해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런 게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진리를 찾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도자의 몸부림 말이다. 


나도 사기꾼 목사들이 무지 싫다. 내가 몸담은 개신교, 개신교의 목회자들에 대한 환멸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목회자의 아내이며, 목회자의 딸이고 목회자의 누나이다. 목회자와 나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목사들을 보며 최전선에 서서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실은 추락하는 그들은 나의 교회이며 나 자신이다. 돌을 던지는 측이 아니라 돌을 맞는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아 혼란스럽다. 이것이 나의 고통스런 실존이다.


남의 집 밥이고 김치라 색다르게 보일 뿐, 우리집 밥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좋은 목사님은 좋고 이상한 목사님은 이상하고, 신부님들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날 그 순간 조용조용 와글와글 '신부님이 그럴 리 없다'는 이견 없는 여론은 참 부러웠다. 그나마 신부님들은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음일까. 구도자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여전히 찾고 구하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다 자신이 예수님인 줄 착각하여 '아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어! 암만. 암만. 그렇고 말고!' 자아팽창과 어리석은 자기확신에 빠진 목회자와 성도들과 교회가 함께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든 목사든 길을 잃은 자가 길을 안내할 수는 없다. 높고 높으신 하나님, God을 찬양하기 전에 god의 이 노래를 함께 불러볼 일이다. 진리를 찾고 따르는 길은 두려움과 떨림, 역설로 가득찬 것 아닌가. 길찾기의 시작은 현위치 설정이니 지오디의 노래 <길>, 이 가사 만큼만이라도 정직하게 우리의 실존을 마주하려 한다면....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 명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오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우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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