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개의 촛불이 밝혀진 날, 나는 조금 일찍 움직여야했다. 꼭 가보고 싶은 mary 언니님의 합창단 공연이 4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장소는 성균관대였고, 여러 곳에서 사전 집회가 낮부터 시작되었다. 마침 대학로에서는 그리스도교 연합 시국 기도회가 있어서 여기 참석하고, 연주회 갔다가, 광화문으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채윤이는 3시에 탑골공원에서 있는 청소년 시국 집회에 가고 싶다고 한다. 현승이는 이랬다저랬다 하더니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가는 것으로. 종필 아빠는 멀리 이스라엘에 있는데 갈릴리 호숫가의 야경이 모도 촛불로 보일 지경이라나.   





지난 번 집회에서 이재명 아저씨에게 반해버린 채윤이는 2시, 대학로 집회에 이재명 시장 뜬다는 소식을 접하고 엄마와 같이 일단 대학로로 가겠단다. 채윤이와 나란히 앉아서 시국 기도회에 참석했다. 늘 그렇듯 기도회 진행은 아쉽다. 시국 기도회는 약간 흥분하고 선동하는 방식의 발언과 기도 일색일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마음을 담은 기도를 해도 좋을텐데. 그저 몸으로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이긴 하다만.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해 아래 고통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두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찬송을 부른다. 87년, 대학 1학년 때 절절한 마음으로 불렀던 찬송. 시위하면서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군화 발로 밟아 주시어....'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던. 성인이 다 되는 채윤이와 길바닥에 앉아 이 찬송을 부르노라니 감정이 밀려와 말이 나올 길을 틀어막아 버렸다.

 




촛불집회까지 버티려면 밥심을 충전해야지. 점심 먹고 채윤이는 청소년 집회로, 나는 조금 배회하다 성균관대로 갔다가 저녁에 광화문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채윤이 총총 사라지고 '하야 물결' 가득한 길에서 서성이는데 노란 물결, 세월호 가족들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연설이 들리기에 까치발 들고 봤더니 함세웅 신부님이다. 곧 광화문을 향해 행진이란다. 카페에 가 앉아 책 보면 좀 쉬다 4시 음악회에 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어느새 몸이 행진행렬에 파묻혀있다. 아, 이거 거부할 수 없는 걸음이구나. 노란 스카프, 노란 현수막, 노란 엄마들이 가득하니 이탈이 불가하다. 걷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낀다. 크고 작은 이름 모를 단체들, 삼삼오오 뭉쳐 걷는 사람들, 홀로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 어디에서들 이렇게 몰려든 것이오! 잠깐 행진하다 돌아올 생각도 있었으나 대학로를 빠져나가기도 전, 돌아갈 생각은 잊고 말았다.





'걷기'는 얼마나 좋은 운동, 아니고 기도인지. 더불어, 홀로 걷는 이런 걸음은 온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걷는 동안 내 마음에서 심령대부흥성회. 가끔 외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니고 박.근.혜.는/하.야.하.라. 세.월.호.를/인.양.하.라. 일.곱.시.간/근.혜.퇴.진. 외치고 다시 기도한다. 기도하고 다시 노래한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어느새 종로길, 탑골공원 앞이다. 한가득 파릇한 우리 애기들이 모여있다. 우리 채윤이 저 인파 어딘가에 앉아 있다. 채윤이 좀 찾아보려고 눈알을 굴렸는데 저깄다! 싶어 자세히 보면 다른 딸내미. 또 저놈인가, 싶어서 보면 다른 딸내미. 그래, 너희들 다 내 딸이고, 아들이다! 대견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꼬치너 몇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채윤이는 교회 찬양팀 연습에 갔다가 늦게 다시 광화문으로 달려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사거리는 이미 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도 꽉 차 있었다. 교보빌딩 앞 인도에 걸터앉았다. 사람구경 시작. 여기 모인 사람들이란, 진짜 남녀노소의 자유분방한 조합이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다. 헐렁했던 인도의 인구밀도가 몇 분이 다르게 높아지더니 내 얼굴 바로 앞에 사람들 엉덩이가 왔다갔다 한다. 한 시간은 지났나보다.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현승이가 충정로역에 내렸단 소식이다. 또 건너편 정동교회 쪽에는 꽃친 가족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제 진짜 촛불잔치, 아니고 촛불시위를 시작할 시간. 지금껏 많은 사람과 함께 홀로였다면 이젠 나의 사람들과 함께 함께이다.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가 만날 길이 묘연하다. 이미 길은 촛불로 뒤덮였으니. 어쩌지, 하고 일어서는데 눈앞이 뿌예진다. 혈압이 또 떨어진 게냐. 몸의 기운이 쏙 빠져나간다. 빨리 집으로 가서 눕는 수가 대수지, 싶다. 인파를 거슬러 종각으로 가기로.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어쩌다 침대까지 왔는지. 필름이 뚝 끊어진 것 같다. 채윤이 현승이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밤 10시가 다 됐다. 광화문의 바람을 가득 품은 두 녀석이 집회 상황 브리핑하느라 시끌시끌.


그렇게 우리 셋은 백만 개의 촛불 중 하나가 되었다. 아니 갈릴리 호숫가에서 마음만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아빠도 있으니 네 개의 촛불. 백만 분의 일 픽셀을 감당하겠노라는 이름 모를 마음들이 모였다. 백만 개의 촛불이 만들어내는 그림, 파도타기 영상은 정말 짜릿한 감동이다. 그런데 일 픽셀, 저 점 하나의 빛은 각각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아는가? 하나의 빛에 담긴 사연과 분노와 좌절과 기대와 기도는 우와아아아 파도타기 영상을 보며 터지는 탄성과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함이라는 것을. 백만 개의 초가 아니라 백만 개의 우주가 모여 박근혜의 인간 도리, 인간의 도리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촉구하고 돕는다는 것을. 이렇게 우주가 나서서 돕고 있다. 박근혜 씨, 제발 좀 알아들으라. 이 기회에 무엇을 얻을까 눈알 굴리고 있는 정치인들, 저 빛이 진실의 빛임을 좀 알아먹으라. 백만 개의 우주가 '길가에 버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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