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옴

 

 

박광혜 권사님 떠나신 지 벌써 일 년이다.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헤아려 보면 권사님과의 만남이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구나! 그러나 어쩐지 권사님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다. 운을 떼어 놓고 보니 일 년 내내 그랬던 것 같다. 3년 여의 시간, 함께 한 시간이 권사님의 70년 넘는 이 땅의 시간의 마지막 시간이었다니.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처음 뵈었을 때는 이렇게 빨리 이별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사님은 떠나셨지만, 그래서 생긴 텅 빈 자리로부터 새로운 권사님을 만난다. 엄마 애도일기를 쓰고 마무리하며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배웠다. 누군가에 대해 쓰는 것은 그분의 아니라 나를, 그분의 삶에 비친 나를 해석하는 것이다. 떠난 이가 남긴 존재의 빈 자리를 응시하며 보이는 것은 그분이 내게 남긴 사랑이며 가르침이다. 그것을 알기에 쓰려고 한다. 무엇이든 쓰려고 한다. 쓰고 싶다. 써서 알아내고 싶다. 내게 남기신 권사님의 흔적을. 삶과 죽음에 관한 설교 묵상이라는 부제를 단 김영봉 목사님의 책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제목과 같다.

 

추도예배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던 중, 권사님 며느님께서 "어머님이 사모님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했다. 남편이 거들면서 "맞습니다. 권사님이 저보다 제 아내를 더 좋아하셨어요."라고 했다. 나도 안다. 아니 돌아보니 확실히 알겠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다. 내 커피를 좋아하셨고, 내가 꾸며놓은 거실을 '북카페 같다'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시며 칭찬하셨다. 아이들 키우는 것을 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 가정이 있구나! 실제로 이렇게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봤다."라고 하셨다. 교회에 처음 오던 날,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어깨가 움츠러들어 내내 긴장이었다. 그날이 한참 지나고 권사님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니, 잘 모르는 학생인데 내가 뒤따라 들어가는 걸 알고는 교회 출입문을 한참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착한가 봤더니 현승이였어. 마음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에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말씀하셨다. 현승이는 이 말씀을 듣고 좋아서 콧구멍이 벌렁벌렁. "엄마, 봤지? 나 그런 사람이야." 추운 날의 따뜻한 기억이다. 

 

채윤이에게 특별히 마음을 쓰셨다. 한창 대입 실기 시험 중이었다. 1차 발표가 속속 나고 있었고. 시험을 잘보기도 하고, 못 보기도 했다. 한두 번 실수한 것으로 크게 낙심하고 있는데, 기대했던 학교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망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재수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채윤이 모르게 남편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권사님께서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으셨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권사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사모님. 우리 채윤이 꼭 합격할 거예요. 하나님이 꼭 붙여 주실 거예요!" 정말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다. 교회 처음 부임했을 때, 권사님이 사랑하는 손녀딸이 한창 입시 중이었다. 권사님이 어렸을 적부터 혼신을 다해 뒷바라지하신 손녀이고,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 손녀딸을 위해 기도하시던 절절함과 비슷하며 다른 절절함 같았다. 결국 채윤이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을 했고, 그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셨다. "사모님, 내가 된다고 했죠? 하나님이 채윤이 같은 아이를 안 붙여주시면 누구를 붙여주시겠어요?" 눈물이 왈칵났다. 그리고 손녀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요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 색깔이라며 화장품을 사서 선물로 주셨다. 곱고 고운 필체로 정성스레 쓰신 카드와 함께.

 

돌아보면 이렇게 따뜻한 기억이다. 실은 돌아보니 비로소 이렇듯 따뜻한 것이다. 권사님은 사실 '칼같음, 철저함' 같은 형용사가 어울리는 분이다. 완벽하고 빈틈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갖춘) 분 같았고, 특유의 자부심도 충만하셨다. 아나운서 같은 낭랑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우아한 말투셨다. 그런 말투로 돌려 말하기보다 직설로 꽂으셨다. 실은 그래서 권사님이 조금 무서웠다. 부임한 첫 해, 내적 여정 세미나를 길게 진행했는데 쉽지 않은 동반이었다.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내적 여정 참여자들은 자발성 100%에 목마름 200% 정도를 장착하고 온다. 톡 건들면 그저 마음을 활짝 여는 분이 대부분이다. 교회 내적 여정은 자발성보다는 관성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여정의 목표인데, 웬만큼 준비되지 않으면 마음의 여정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동반하고 이끄는데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권사님은 교회 에니어그램 포함, 내가 이끈 내적 여정 집단을 통틀어 최고령 수강자이시다. 정말 열심히 듣고 필기하셨고, 매주 철저하게 복습하셨다. 그리고 매 시간 "너무 어렵다."라고 하셨다. 가장 열심히 하시면서 가장 어려워하시는 모범생이었다. 상담이나 마음의 여정에서 "모르겠다"는 반응은 "마주하기 힘들다"로 받아들이곤 한다. 내적인 부침이 있다는 뜻이다.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상담자 또는 여정 동반자로서 분별이 필요하고, 버티는 힘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질문이 많으시고, 그만큼 어려워하셨다. 왜 아니겠는가?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정직하게 내면을 마주하는 작업인데. 아무튼 권사님 뿐 아니라 전통 교회 신앙생활에 익숙한 분들과의 여정은 내게 참 어려운 시간이었다. 

 

 

 

 

마지막 시간 소감문을 써 제출하시도록 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권사님스럽게, 활자 같은 필체의 소감문을 반듯하게 접어 깨끗한 봉투에 담아 스티커로 밀봉해 건네주셨다. 역시나 권사님스러운 정직한 소감문이었다. 여정에 참여하며 겪으신 내적 갈등을 그대로 고백하셨다. 그럼에도 여정이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히 알고 계셨다. 마지막 문장 '쿵쿵 울림'이란 두 단어는 내 마음에 남아 아직도 쿵쿵, 울리고 있다. 그 연세에 살아오신 세월을 돌아보며 '잘못 살았구나' 하신다. 권사님 정말 오롯이 에고의 그림자를 마주하셨었구나! 누구보다 내적 여정을 진실하게 걸으셨구나! 이제와 다시 보인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삶과 신앙을 '고민하고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으로 마주하며 성찰하셨던 시간은 어떠했을까. 더 헤아려드릴 걸, 아쉽고 아쉽다. 쓰다 보니 더욱 아쉽고 텅 빈 마음에 아픈 바람이 스친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을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워낙 나의 뇌세포는 더 이상 지식이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이 평생 쓸데없는 것까지 차곡차곡 싸여 있었기에. 슬프고도 부끄러운 1강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중에 어떤 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뭔지 모를 충만함에 2강이 듣고 싶어서 '기도하며, 고민하며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에...... 여기 저기 다 있는 나. 아직도 정확한 내 유형을 못 찾고 있긴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됨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여전히 난 잘못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십자가, 예수님의 와전한 사랑이 나를 회복시키심을 믿는다. 있는 그대로. 모든 학습에서 낙제였지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그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 기울이고 싶다. 

시간 시간 마음으로 쿵쿵 울림이 있었던 내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권사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멀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멀다고 생각했기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는데 바싹 다가가 "권사님, 내면 마주하는 일이 참 힘드시죠? 권사님, 여기까지 정말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씀 드릴 용기가 없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아들들 시험기간에는 열심히 하던 에어로빅도 쉬셨다고 했다. 엄마가 몸을 흔들고 있으면 공부하는 아이 정신 산란할까 봐 그랬다며 회한에 잠긴 표정으로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면에서 나는 권사님의 반대쪽 끝에 있는 엄마가 아닌가. 내 또래 엄마가 같은 말을 했다면 단칼에 정죄하고 말았을 텐데. 권사님께는 조심스러웠다. 내 소신이 권사님을 아프게 할까, 회한 가득한 권사님의 눈동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곳에 처음 이사오고 며칠 안 지나서였다. 며칠이 지나도 집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래된 집의 좁은 주방은 많지도 않은 그릇을 다 받아내질 못했고, 대충 지어지고 무성의하게 증축되어 생긴 방과 구조에는 아귀가 맞게 들어가는 가구가 없었다. 쓰던 가스오븐레인지는 들어올 수 없었고, 휴대용 버너로 최소한의 식사를 하며 지냈다. 춥기는 또 왜 그리 추웠는지. 바닥에 앉아 배달음식 먹으며 두 아이 중 누군가가 말했다. "꼭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아. 아빠가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아."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아직 가스 연결이 안 됐다는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다. 뭘 해도 완벽하게 하시는 분이다. 손수 만드신 듣도 보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네 식구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미술을 전공하신 권사님의 동양자수 작품이 갤러리처럼 걸려 있는 거실과 칼같이 정리된 주방 서랍까지. 머나먼 세계 같았다. 맛있게 먹고 돌아와 우리의 새집에 앉아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누구나 자기 세계, 자기 우주를 산다. 사람 사람 지문이 다르듯,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 세계가 다르다. 두 세계를 각각의 고유함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려면 갈등이 불가피하다. 갈등을 피하기 좋은 방법은 마주하는 세계를 없는 것처럼 지우는 것이다. 마주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먹고 사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차피 내가 알 수 없으니 환상으로 치부하면 불편할 것이 없다. 나는 조금 그렇게 차단했다. 그래서 권사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돌아보면 권사님은 그 세계의 경계를 넘어 내 세계로 들어오셨다. 채윤이 대입 즈음에 보여주셨던 확신은 내 가슴에 와닿은 진정성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키운 권사님의 손녀딸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키워진 채윤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은 우리 집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 와중에 북카페처럼 꾸며놓은 거실을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어떻게든 살겠지, 내 알 바 아니다." 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마음을 쓰며 나의 세계에 침투하셨다.

 

1, 2학기에 걸쳐 내적 여정을 마친 늦가을. 권사님께서 몇 번 입지 않았다면 빨간색 트렌치 코트를 주셨다. 이름만 들어본 다른 세계의 브랜드였다. 내 몸에 꼭 맞게 수선을 해야 한다시며 수선비용까지 내셨다. 다시 새로운 세계였다. 수선비가 내가 몇 년째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장롱 안에 그 코트가 있다. 권사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입고 나갔던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 코트의 가격이 대충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입어지지가 않는다. '나 이거 입는 사람이야' 보여주기 위해 명품을 입는 마음이나 그것을 입지 못하는 나나 옷을 돈으로 보며 타인의 시선에 매여있기는 매 한 가지다. 암튼, 그 코트를 입고 권사님께 데이트 신청을 했다. 단풍 끝자락의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내 최애 점심과 커피로 함께 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참 좋아하셨다. 봄에 한 번 또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스치듯 하셨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아 있다. "미안해요. 목사님과 사모님께 참 미안해요.” 개인적 관계에서 미안함은 아니었다.  그 순간엔 몰랐는데, 복기할수록 그 한 마디가 내 깊은 어떤 것을 건드렸다. 그때 당시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어쩌면 하나님께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한 마디 들으면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던 바로 그 말이었다. 바로 그 말을 권사님이 해주셨다.

 

권사님 장례식을 마친 자리에서 하신 아드님의 부탁이 있었다. 1년 후 추도예배를 꼭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남편에게 하셨다고 한다. 권사님 사셨던, 흐드러지는 벚꽃이 뵈는 창이 있는 집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그 거실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1년을 기다린 것이다. 추도예배를 드리며 마음이 울렁거렸다. 권사님께 하고픈 말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많은 것이 감사했다. '우리 사모님'의 커피를 특별하게 여겨주셨던 것, 나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와 주셨던 것. 무엇보다 권사님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3년을 함께 하게 해 주신 것. 인생 마지막 인사, 장례예배 집례를 남편 김종필 목사가 해드릴 수 있었다는 것. 완벽한 자기 관리로 일궈내신 삶과 신앙이 생애 마지막 10여 년, '교회 사태'라는 이름의 풍랑을 겪으시며 어떻게 흔들렸는지 잘 알고 있다. 울며 울며 걸으셨다는 탄천 길을 내가 함께 걸었던 느낌으로 생생하게 여러 번 들었다. 교회와 목회자로 인해 겪은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치지 않으셨다는 것에 깊이 안도하며 감사한다. 권사님 투병 중에 '목사'라는 사람과 쉬지 않고 소통하며 두려움을 내비치시고 거침없이 기도 부탁을 하실 수 있으셔서 감사하다. 권사님은 당신 큰 아들과 나이가 같은 데다, 청빙위원에 소속되어 있었던 책임감으로 김종필 목사를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열정을 뿜어내며 선동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흠결 많아 마음 놓이지 않은 김종필 목사가 투병 기간 내내, 임종 직전까지 권사님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어서 나는 감사했다.

 

남편이 목사인 것이 나는 늘 부끄럽다. 목사가 쓸모 없는 시대에 목사로 사는 것이 안쓰럽다. '목사의 쓸모없음'을 전제로 세워진 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는 것이 안타깝고 민망하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늘 의문하고, 기준도 높은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 박광혜 권사님의 투병기간과 장례식, 그 이후 일 년을 지내고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남편이 목사여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목사의 아름다운 권위로, 거기에 권사님을 향한 사랑을 담아 그 시간을 함께 해드리는 것이 좋았다. 목사들에게 받은 치명적인 상처로 아직 분노와 슬픔이 가시지 않은 권사님 곁에 그저 조용히 손잡아 드리는 목사로 함께 해드릴 수 있어서. 카리스마는 없지만 대신 속 깊은 진심을 가진 사람인 걸 권사님도 아시겠지. 추도예배를 마치고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서 아드님들과 대화하는 남편이 참 보기 좋았다. 처음으로 목사의 쓸모를 생각했다. 쓸모없음으로 깊이 좌절하고 자주 흔들리는 남편이(내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 이 역시 권사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뭔가 쓰고 싶은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다. 권사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쓰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기나긴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쓰다보니 죄송함과 감사함, 그리움과 슬픔으로 마음이 쿵쿵 울린다.

 

사랑하는 권사님, 세계와 세계의 마주침에서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한 것 죄송해요. 감사해요, 권사님. 정말 다른 세계에 계셔서 제가 사는 삶은 알지도 못하고 안중에도 없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경계를 허물고 들어와 주시고,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늦게 권사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죄송해요. 권사님이 주신 빨간 트렌치코트, 평생 간직하면서 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새길게요. 구분하고 나누고 벽을 세우는 것 없는 나라, 두려움 없이 만나고 거침 없이 연결될 좋은 나라에서 곧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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