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고 뚜렷하고 언제든 있는 그대로 표출되는 욕구, 채윤이의 욕구. 간절히 원하지만 주변을 살피느라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못하고 막상 묵살되고 나면 나중에 속을 끓이는 현승이의 욕구. 두 욕구가 충돌했을 때 뒤끝 작렬은 늘 현승이 몫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시점에서 감정형인 현승이에겐 논리가 의미없고, 사고형인 채윤이에겐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는데 계속 대화해야 하는 것이 미칠 노릇이다. 중재자인 엄마가 아무리 공정해도 현승이에겐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승이에게 엄마는 공정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무조건 편들어주라고 있는 것이니까.(MBTI의 T와 F가 갈등을 대하는 태도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관찰하는 것이 흥미진진하다. 엄마는 은근 즐긴다) 
채윤이에게 깔끔, 현승이에겐 앙금을 남기고 어쨌든 대화는 종료. 채윤이는 찬양팀 연습을 가고 엄마와 현승이 둘이 남았다. 카톡에 빠져있던 엄마가 배고프다는 현승이에게 '알았어. 잠깐만' 하면서 매를 벌고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현승이는 꽝꽝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반찬을 꺼내고 탁탁 밥을 퍼서 퍽퍽 먹고 있었다. "엄마가 삼겹살 구워주려고 했는데.... 잠깐만 기다려" "안 먹어. 안 먹는다구. 이것만 먹을 거야" 하는데 어르고 달래고 까꿍까꿍해서 마주보고 밥을 먹게 되었다. 힘이 빡 들어갔던 눈이 조금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엄마, 엄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싫었던 적 있어? 미운 거 말고. 싫었던 거.

많지. 엄청 많지. 특히 외할머니는 얼마나 싫었는데.

내가 싫다고 말하는 건 미운 거보다 더 싫은 거야. 미운 건 가끔 있을 수 있는데 싫은 건 정말 싫은 거야. 알아?

어, 알겠어. 아이들이 원래 자기 엄마 아빠 많이 싫어해.

나 아까 엄마가 정말 싫었어. 그러잖아도 엄마한테 쌓여 있었는데 진짜로 배고픈데 밥을 안 줘서 완전 싫었어.

미안해. 엄마가 잘못 한 거야. 엄마 미워해도 돼. 싫어해도 되고.

그런데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 전까지의 설명을 잘 들어보면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더 잘못했다는 것 같고, 내가 고칠 게 많다고 말하는 거 같애.

ㅋㅋㅋㅋㅋㅋㅋ 뭔 말인지 알겠어. 것두 미안해. 그런데 엄마가 미울 때 말고 싫을 때도 많아?

미울 때는 자주 있고 싫을 때는 거의 없는데 오늘은 아까 누나랑 셋이 얘기할 때부터 싫었어. 그런데 엄마가 싫을 때는 평생 안 풀어야지 결심을 하게 되거든. 평생 엄마랑 말을 하지 않고 엄마를 괴롭혀야지 하는데.... 어느 새 엄마랑 이렇게 말을 하고 기분이 좋아져 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왜 그런지 알아? 엄마가 너 풀어주려고 애썼잖아. 니가 아무리 엄마를 좋아해도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게 더 커서 그래. 원래 사랑하면 먼저 풀게 되어 있어.

그래서 엄마가 삐지면 아빠가 엄마를 풀어줘? 아빠가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는 거야?

응, 아빠 사랑이 더 커. 엄마는 사랑이 적어. 사랑하면 지는 거다! 하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거야. 하긴 우리 현승이도 엄마를 더 사랑할 때가 있다. 엄마가 너랑 대화하다 화가 나서 '마음대로 해' 하고 삐지면 니가 한참 있다가 와서 '엄마 미안해' 할 때가 있잖아. 그럴 땐 우리 현승이 사랑이 더 큰 거네.

음, 사랑하면 지는 거다.....

현승아 너가 클수록  사랑이 더 큰 사람이 되면 좋겠어. 아빠처럼 나중에 더 큰 사랑으로 먼저 풀어주고 품어주고 그런 멋진 사람이 돼.

엄마, 그런데 보듬어주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품어주고 이해해주고 아껴주고 그런 뜻? 왜? 어디 책에서 봤어?

아니, 개콘에서. '미안해요 형'에서 이상구가 '보듬어주세요 형' 그러잖아. 밥 다 먹고 개콘 하나만 볼까?

그래.

(엄마, 즐겁게 낚임. 사랑하면 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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