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집이 좋고, 좋고, 좋은 이유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좋은 이유는 새소리이다. 얼마 전까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뻐꾹 뻐꾹뻐꾹뻐꾹' 소리가 앞산에서 울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 암호로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잠들기 전 행복 전달자였다. 아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이 가까이서 멀리서 들린다.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 자체가 이미 높은 곳에 있어서 베란다 창 앞으로 날아다니기도 한다. 휙, 바로 코 앞에 번개 같이 지나가기도.

 

새를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 습관 중 하나인데, 거실에 앉았으면 고개를 들어올릴 필요도 없이 새가 아주 가까이 보이고 느껴진다. 이래도 되나 싶게 행복하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신간 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를 만났다. 대뜸 집어들었다.  읽다 보니 젊었을 적 읽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 우리들의 선생님』 생각나 다시 끄집어냈다.두 권을 오가며 읽었다. 나쁘지 않은데 어쩐지 내가 아는 새, 내가 좋아하는 새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한참을 두고 읽고 또 새를 보고,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새소리를 듣다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새는 저 멀리 나는 새였구나! 결코 내 시야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불시에 나타났다 훨훨 날아가버리고 마는, 그 새들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 토방에 앉아 얼마나 자주 올려다봤던가. 저 멀리 키가 큰 미루나무 위의 새 둥지, 둥지를 오가는 새들이 또렷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엄마한테 혼나고, 쓸쓸하고, 외로울 때 늘 거길 바라봤던 것 같다. 훨훨 나는 새를 보면서 '초월'을 꿈꿨다. 지금의 나를 뛰어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보고 새를 보게 했구나 싶다. 새에 끌리는 것은 저 멀리, 여기를 초월한 어떤 세계에서의 자유 같은 것이었구나. 두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나를 보게 하였다. 

 

나리꽃을 좋아한다. 글쓰기나 꿈모임, 집단 여정을 이끌 때 별칭을 쓰곤 하는데 늘 나는 'nari'이다. 꾸미지 않고 제 모양대로 피어 있는 들의 나리꽃처럼 살고자 함이다. 영성적 삶의 모토 "있는 그대로"란 뜻이기도 하다. 벗들이 길에서 본 나리꽃을 그냥 지나치치 않고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한다. 모든 들꽃에 관심이 있지만 나리꽃은 더욱 오래 들여다 보고 마음을 담는다. 

 

새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고, 나리꽃을 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떤 땐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고, 많은 경우 고개를 떨구고 땅으로 보며 산다. 요즘은 새와 나리꽃만으로 마음이 충만하다. 나리 철이 끝나가긴 하지만 나리 대신 능소화가 피고, 능소화가 떨어지면 또 다른 꽃과 들풀이 생명과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의 들꽃, 그 사이 공간에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명이었다 죽음이었다, 사랑이었다 고통이었다 들쭉날쭉이다. 시간을 아껴서 '사랑이 있는 곳, 위안(consolation)'에 더 많이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이다. 메마른 곳을 일부러 찾아 맴돌 필요는 없다. 하지만 황폐(desolation)한 곳을 무작정 피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황폐함이라면 위안의 날을 기다리며 머무르는 것이 좋다. 그런 날에 시선을 돌려 자유로 비상하는 새를 바라보거나, 제 모습 그대로 꾸미지 않고 피어있는 나리꽃과 눈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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