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아,

영화 보고 나와서 네가 그랬지?

"좋은 영화라고 하지만 결국 다 똑같애. 주인공들은 여러 번 총을 맞아도 안 죽고, 잠깐 나오는 경찰이나 그런 사람은 딱 한 발만 맞으면 바로 죽어"

영화 어땠냐고 물었던 아빠가 의외의 대답에 놀랐나봐.

잠시 후 차 안에서 아빠가 그랬지.

"현승이가 영화 별로라고 해서 아빠 마음이 좀 아프다"

실은 엄마도 비슷한 심정이었는데 한 마디 거들 힘조차 없더라.

그렇게 지나갔지만 다시 생각하니 현승이가 아빠 말의 뜻을 이해했을까 싶어.

 

엄마 아빠의 고질병, 교훈병 증세였을 거야.

영화를 봤으면 뭔가 교훈을 얻어야지, 특히 이런 영화라면.

그리고 그 교훈의 내용은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는 망상, 그런 병이지 뭐.

엄마 아빠는 너희가 그 무엇보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든 감동 또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나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하여튼, 그렇고.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네.

 

엄마는 대학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보내질 못했어.

여기도 찔끔 저기도 찔금, 발을 담궈보려 했다가 에잇, 성에 안 차.

강의 땡땡이 치고 혼자 잔디밭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그렇지 지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지도가 엄청나게 달라진 시기인 건 분명하지.

엄마가 대학에 가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반민특위'였단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잠시 나왔었지?

대학 1학년 5월, 교정에 전시된 광주민주화항쟁 사진도 꽤 충격이었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에서 접한 반민특위에 관련된 내용은 처음에 소설인가 싶었어.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조국의 아픈 역사였지.

심장이 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어. 

그후 엄마는 아픈 우리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그때 만약 반민특위 활동이 계획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친일파가 명확히 색출되고 정리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며'  하는 가정을 수없이 해봤어.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를 백만 번 되뇌어도 소용없는 일이지.

그래 소용없는 일이야.

 

요즘 엄마는 '소용없음'에 꽂혀 있어. 

많은 것들이 소용없이 느껴지는 병에 걸렸다.

누나가 영화 보고나서 미쳐있는 하정우(하와이 피스톨)의 하정우의 대사를 읊조리고 싶어.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내 마음 상해가며 사랑하고 기다려준다고 사람이 바뀌나?

피케팅 한 시간 한다고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나?

선거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내 아이 하나 학원 안 보낸다고 교육 지옥이 천국 되나?

뭐 이런 버젼으로 얼마든지 베리에이션 연주가 가능한 것 같아.

영화든 현실이든 결국 승리는 매국노의 몫인데, 하나 둘 제거한다고 무슨 좋은 세상이 오겠어?

 

엄만 진짜 하정우만은 살기 바랬거든.

상해 미라보에 안옥윤과 마주앉기를 정말 정말 바랬어.

그런데 결국 죽더라.

너는 그 장면이 싫었지?

하정우가 총 몇 발을 맞고도 계속 일어나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짜증났을 거야.

엄마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어.

결국 죽을 목숨이지만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하와이 피스톨의 표정에서 뭔가 읽었거든.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멋진 주인공은 끝내 포기하면 안되는 거야.

쓰러져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염석진의 가슴에 꽂은 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지?

염석진은 살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고 살아.

심지어 그 칼자국을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둔갑시키지.

(아, 광복 70주년 오늘에도 얼마나 많은 염석진과 강우석과 그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있는지...)

엄마도 주인공이 절대 안 죽는 미션 임파서블식 영화 싫어하지만 이 영화, 이 장면은 좀 달랐어.

결국 죽겠지만, 맞아도 맞아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결연한 마음이 되었어.

그런 많은 이들의 총맞고 살아나고 칼맞고 살아난 많은 분들의 일어섬이 있어 그나마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거야.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지 뭐야.

"16년 전이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실행합니다."

우리의 안옥윤과 명우가 염석진을 징벌하는 것 말이야.

역사 속에서 꼭 실행되어야 할 임무였지만 70년이 지났어도 그 임무는 미완이야.

그래서 현승아, 그 미완의 임무는 엄마 아빠의 몫이고 너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역사의식이란 말을 썼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다윗의 가족나무 안에 들어 있으신 거 알아?

현승이 한 사람의 역사는 가족의 역사와, 가족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별개의 것이 아니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덜렁 '김현승과 하나님'만 떼내어 생각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는 흐르고 흐르는 역사의 강 어느 언저리를 살고 있어.

이 강이 어디로부터 흘러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해.

그것은 현승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단다.

현승이가 좋아하는 오달수 아저씨가 안옥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나?

어이, 삼천 불. 우리 잊으면 안돼!

현승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명과 정의를 위해서 죽어간 분들을 잊으면 안돼. 

또 권력을 무기삼아 거짓으로 정의를 위장하는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다' 지나쳐 버리면 안돼.

 

이 글을 쓰면서 엄마도 다시 힘을 내려고 해.

'소용없음 병'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보려고. 

결국 하정우 아저씨처럼 죽겠지만, 다시 일어나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려고.

잊으면 안돼.

아픈 역사를 잊으면 안되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으면 안돼.

그래, 잊으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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