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 시에 하나, 저녁 5시부터 9시까지 연속해서 둘. 강의가 몰려있는 날이었다. 하나님이 날 만드실 때 '따까리 마인드'를 약소하게 탑재하신 탓으로 이럴 때 아이들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집에 있게 된 현승이의 세 끼 식사는 이러했다. 

 

# 아침

 

'엄마 곧 나가야 한다. 너희 둘이 알아서 계란 프라이 하고, 베이컨 굽고, 빵이랑 먹어'

엄마 닮아서 따가리 마인드 부족한 채윤이가 재빨리 업무분장을 했다. 

'김현승,  니가 베이컨 잘 굽지. 나는 그거 못하니까. 니가 베이컨 맡고 내가 계란 할게'

화장하고 있는데 베이컨 타는 냄새에 '왜 벌써 뒤집냐고~오?' '아, 어찌라구~우' 싸우는 소리에 난리도 아니다. 그렇게 그들을 아침을 먹었다.

 

# 점심

 

피아노 연습을 가야하는 채윤이는 가서 언니들과 먹는다고. 10시 강의를 마치고 현승이랑 점심을 먹으려고 서둘러 집에 왔다. 며칠 전부터 가고 싶다던 동네 일본라멘 집에 가려는 생각이었다.  이 녀석 전화기도 안 들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서 행방불명. 배가 고픈데 밥도 없고, 일단 나는 신라면을 끓여 먹었다. 다 먹고 났는데 어슬렁거리고 들어왔다. 점심 어떻게 하겠냐니까 라면을 먹겠단다. 일단 내 마음이 여유가 없으니 라면 외에 줄 것이 없었다. 그렇게 현승인 점심을 먹었다.

 

# 저녁

 

채윤이는 늦에 올 거고, 마침 남편과 함께 하는 강의라서 현승이만 남겨두고 나가야 했다. 외삼촌 집에 버스타고 가네, 강의에 따라가네 하다가 집에 남기로 했다. 친구랑 놀다가 '주리주밥'이라고 착한 아줌마들이 하는 동네 김밥 집에서 참치김밥을 사갖고 와서 저녁으로 먹겠단다. 세 끼를 다 이렇게 먹이는 게 짠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강의 마치고 돌아오니 밤 10 시가 되었다. 그 사이 채윤이도 들어와 있다. 저녁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채윤이는 연습하다 언니랑 햄버거를 먹었단다. ㅠㅠ 현승이는 김밥을 안 먹고 식탁 위에 있던 식빵을 먹었단다. '저녁으로 먹으니까 하나만 먹으면 영양이 부족할 것 같아서 두 개를 먹었어. 엄마. 그리고 쨈도 아주 듬뿍 발랐어. 잘 했지?' 아이씨, 갑자기 미안함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아이고, 가엾은 내 새끼들. 하루 종일 대체 뭘 먹은 거야' 했더니 이 녀석들 아랫입술 말려들어가면서 히죽히죽 하는 게 내심 좋은 것 같다. 현승이가 '엄마 밥을 너무 못 먹었다. 내일 아침엔 꼭 엄마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애. 알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교회 간 부녀는 어쩔 수 없었고, 따순 밥에 계란말이에 배추국에 현승이와 밥을 먹었다. 저녁에는 김장김치 얻어 온 것도 있고해서 보쌈을 했는데 세 식구가 정말 정말 맛있다며 폭풍흡입을 해서 행복했다. '여자라서 햄볶아요'

 

 

세 끼 밥 먹는 문제는 보통일이 아니다. 이 엄청난 일을 조금만 소홀히 해도 과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 과한 감정은 내게도 가족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좋은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의 원칙을 세워가고 있다.

 

 

1. 엄마에게 의존하지 않고 배고프면 뭐든 찾아서 먹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 라면을 끓이는 것은 기본, 계란 프라이 하기(스크램블 에그나 삶은 계란으로 변주도 가능), 빵 구워 먹기, 과일 깎아먹기(깎기 싫으면 깨끗이 씻어먹기), 김밥 사다먹기, 국수 포장다 먹기. 등등.

 

2. 엄마가 늘 식사를 담당해 챙겨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무한 유세를 떨어서 '감사'를 세뇌시킨다. 매 끼니 다르고 맛있는 식사를 위해서 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무거운 장을 봐야하는 것, 맛있은 걸 먹으려면 비싼 재료를 사야한다는 것, 밥하는 게 힘든 노동이라는 것 등을 늘 주입시킨다. (여기에 얻어먹는 입잡이 같은 아빠가 유세에 동참하면서 엄마를 띄워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

 

3. 시간이 되고 에너지가 될 때, 특히 아이들이 뭔가를 먹고싶다고 말하는 음식이 있을 때 그것을 최선을 다해 만들어준다. 채윤이 같은 경우 특히 디스플레이에 신경을 써서 내주면 완전 하나님 보듯 엄마를 보면서 경외감을 내비친다. 이렇게 포인트 쌓아서 평소에 형편껏 먹고 사는데 쓰기.

 

 

사실 나에게도 '엄마 밥'이 꼭 필요하다. 나 자신이 내 엄마가 되어 해주는 엄마 밥, 금방 한 밥에 뜨끈한 국과 김치만 있어도 좋은 엄마 밥을 좋아한다. 사실 엄마 밥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라기보다는 따스함이 고파서 먹는 것이다. 

 

 

* 이 주제와 관련해서 전에 썼던 두 개의 글이 있네요.

 

<밥하는 아내 신문 보는 남편>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1

 

<나의 성소, 씽크대 앞>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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