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음악치료에 관한 글을 쓰느라고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꺼내 읽었다. 얼 마만인가. 결혼하기 전에 읽은 책이니. 생각해보니 20대 때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과 글을 열심히 찾아 읽었었다.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분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있었음에도 내가 원하던 소설을 정확하게 한 방에 찾아낸 것이 신기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머리로는 내가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 반대이다.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지 못하고, 진심으로 스스로 칭찬하지는 못한다. 그런 내가 작년  맘때의 나에 대해서는 꽤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진심으로 내가 참 잘 했다 생각하고 있다.


작년 이맘 때 친정엄마가 고관절 골절로 수술하시고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 하기도 했다. 두 군데 요양병원을 거쳐 집으로 지팡이 짚고 돌아오시기까지 말로 하기 어려운 절망과 슬픔의 시간이었다. 그 기간  내가 참 잘 지냈다. 엄마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 엄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어른스러웠다고 자부한다. 동생 부부를 비롯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가장 아픈 것들은 내 마음에 묻어두고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엄마에게 엄마처럼 잘 행동했다. 위기의 순간에도 잘 벼텼다고 생각한다. 그즈음 <크로스로>에 엄마에 관해 쓴 두 개의 글이 증거자료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그러하듯 작은 외면적으로는 자뻑이 과대하기 때문에 그 일을 생각하며 두고두고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의연했지?' 하면서. 그런데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읽으면서 깜놀했다. 중단편의 소설 속에 여러 '노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작년에 내가 맞닥뜨린 유사한 상황이 많았다. 그리고 전에 내가 그걸 읽으면서 유난히 공감하고, 쓸쓸해하고, 오래도록 여운으로 간직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작년에 엄마 문제를 그렇게 잘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순간 내 안에서 생성된 힘이나 지혜가 아니었다. 20여 년 전에 읽었던 소설 속에서 미리 체험했던 감정이고 그 간접경험으로 인해서 예행연습 된 일을 제대로 겪은 것이다. 아, 그랬구나. 현승이의 얼마 전 일기 '사실이 아닌 사실'이 떠올랐다. 스스로 알아낸 것 같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라는 것.


조금 충격이었다. 늘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음 페이지 넘어가면 그 앞 페이지가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냐? 머리가 이렇게 나쁜가?' 생각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분명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으며 너무 새로와서 화가 난 적도 많다. 도대체 책을 어디로 읽는 것이야! 그런데 이렇게 어디로 날아가지 않고 내 머린지 가슴인지 어딘가에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지혜도 있구나.


내 것으로 생각하는 통찰들, 지식의 조각들이 언젠가 어디서 배웠고 읽었고 들었던 것이라는 (남편이 주야장천 말해오던) 것을 가슴으로 알아들었다.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진심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다 잊어버린 것 같아 속상하더라도도 너무 좌절하지는 말아야겠다. 20년 후 어느 날 딱 필요한 순간에 툭 튀어나올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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