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상담 전문가가 수선해 줄 필요가 있는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아야 한다.



연구소 연구원 스터디 첫 책을 마무리 하며 마음에 새긴 한 문장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 즉 내담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우리는 다르게 읽었다. 개인상담, 집단상담, 내적여정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고, 연결이 끊어져 생명을 찾을 수 없는 ‘소외된 영혼’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나음터를 찾으시는 분들을 만나겠다는 의지이다. 세상에 상담소가 허다하지만 굳이 '나음터'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상담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상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구원 H와는 20년이 훨씬 넘은 인연이다.  10여 년 상담을 하다 7,8년을 쉬고 이제 다시 내담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10년 상담을 그만두도록 뽐뿌질 한 것도 나다. 그 이후 이젠 상담 다시 하라고 쪼아댄 것도 나다. 연구소를 시작하고 H가 말했었다. "언니, 나 이제 상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쪼아대도 상담은 안 하겠다던 H가 저 말을 하기까지 통과하 지난한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저 구절에 대해 나누면서 고백했다. 10년 상담을 실패라 규정했노라고, 상담으로 사람을 고칠 수 없다는 결론, 자신은 상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요. 그리고 다신 상담하지 않겠다며 다른 일들에 마음을 주며 살았다. 


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자기 스스로를 수선이 필요한, 뭔가 잘못된 손상된 자아로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연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타인을 만난다. 타자를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고, 배제하는 이들로 상처 입는 때가 있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신비로운 존재로 대하며 선의의 해석으로 여백을 둘 줄 아는 사람은 필연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 H가 지난한 내적여정을 통해 손상된 자아가 아니라 소외된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이 간극은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가까운가! 자기와 타인을 고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연결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타자, 하나님과 연결이 필요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알아들는다는 것은. 


훌륭한 상담자를 만나고 신령한 영적지도자를 만나면 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누군가 날 고쳐주겠지, 가 아니라. 연결되기 위해 힘을 낼 때 문제는 해결된다. 고립시키고 고립되는 한, 치유와 성장은 불가하다. 나와 타자를, 우리와 당신들을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악'이다. 상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연구원들과 함께 정말 좋은 상담자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성찰하고 기도한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상담자든 그를 찾는 내담자든 인간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진정한 내 자신과 연결이 끊어진 소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짧은 영상은 연구소 한 벽을 장식한 치유의 실을 처음으로 연결시킨  조소희 교수님의 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손놀림이지만 예술이다. 그분은 저런 단순한 손놀림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한다. 싸구려 무명실을 이어 만든 작품처럼 가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라도 연결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예술이고 작품이다. 연결이 치유이고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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