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20

 

 

나를 좋아해주는 착한남자와 내가 좋아하는 나쁜 남자가 있습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요?’ 흔하게 접수되는 질문입니다. 형식은 같고 내용만 바뀌는 응용버전도 많습니다. 양자택일형 질문이라 해두죠. 질문자의 딜레마는 짜장면을 먹자니 짬뽕 국물이 아쉽고 짬뽕을 먹자니 중국집! 하면 짜장면인데..... 하는 심경일 겁니다. 다행히 중국집에는 짬짜면이라는 메뉴가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인생에는 짬짜면이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선택의 대전제입니다. 위의 질문이라면 착함을 선택하여 매력을 버리든지 아니면 그 반대 경우가 가능하겠지요.

 

이런 경우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욕심때문이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이 적실합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갖겠다는 것이 욕심 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친을 몇 가지 조건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부모님이런 경우에도 부모님과 여친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착한 아들이며 동시에 책임 있는 남친이 되는 미션 임파서블을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일종의 완벽에 대한 욕심입니다. 여친 눈에는 우유부단함으로 비춰지겠으나 표면 아래에서는 완벽을 위한 죽기 살기의 버둥거림일지 모릅니다. 누구를 선택해도 일정 정도 행복하고 어느 순간 후회가 밀려드는 것이 결혼이고 인생인데요.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의 선택일 때 같은 행불행 속에서도 다를 수 있습니다. 엄마 때문에, 네가 하도 따라다녀서 결혼했더니 불행하잖아! 탓할 곳이 있고 원망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탓을 해도 내 탓을 해야 합니다. 실컷 자책하고 난 후에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책임지겠다는 결단이 가능합니다.

 

단언컨대 결혼을 해도 안 해도 삶은 힘듭니다. 그러나 선택하고 책임지는 두 주체가 만난다면 힘든 삶은 더 큰 나, 더 큰 사랑의 디딤돌이 됩니다. 일찍이 에릭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했습니다. 사랑의 성패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에 달려있다고요. 사랑의 능력은 사랑의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 안의 기본설정입니다. 사랑을 선택할 때는 동시에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튼 짬짜면은 없고요. 짜장면과 짬뽕 사이, 착한남자와 나쁜 남자 사이, 성실함과 두근거림 사이, 착한 아들과 믿음직한 남친 사이 둘 중에 선택하셔야해요. 다시 원점인가요? 그러니까 누구를 선택해야 하냐구요? 니가 선택하시라니까요.

 

그러면 예제 하나 풀어봅시다. 비신자와 결혼하면 안 되나요? 신학적인 논쟁은 잠시 넣어두시고요. 하던 얘길 계속 해보자고요. ‘비신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전제가 깔린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 된다를 그대로 자기 것으로 가져갑니다. ‘비신자와 결혼? 당연히 안 되지. 올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싱글벨 싱글벨 부르며 외롭게 보내야한다 해도 비신자와 소개팅을 하지는 않을 거야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비신자와의 결혼이 왜 안 되냐물을 일도 없겠습니다. 이 선택에 따른 책임이라면 스스로 만남의 폭을 좁혀놓은 것을 인정,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겠죠. 외로운 싱글의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파이팅입니다.

 

비신자와의 결혼이 왜 안 되냐자꾸 묻게 될 뿐 아니라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에 대해 화가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괜찮은 여자(남자)를 단지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떠나보내야 하는 입장에 처했을 수도 있지요. 헤어지라는 압력을 받으며 괴로울 수도 있고요. 한국교회 미혼 청년들의 성비가 3:7이라는데 어찌 기타 맨 교회 오빠만 바라보고 있겠는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비신자와의 결혼이 꼭 불행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와의 결혼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요. 다만 이 역시 선택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 싱글들이 흔히 꿈꾸는 로망이 있지요. 햇살이 눈부신 주일 아침, 아이의 손을 하나 씩 잡은 부부가 교회로 향하는 모습. 또 부부가 나란히 성가대나 주일학교 봉사 하는 모습도 있고요. 이런 로망에 대해서 기꺼이 내려놓는 것, 무엇보다 상대에게 나의 신앙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일 것입니다. 고심 끝에 짜장면을 주문했다면 애초 짬뽕 맛은 낼 수 없는 배우자에게 얼큰한 국물맛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어떤 이유에서든(특히 성인과 성인 사이) 상대를 바꾸려는 행동과 뜻은 사랑의 행위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의 선교사가 되겠다헌신하는 마음으로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모험과 교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결혼은, 관계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차 불행해지는 지름길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안의 보물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은 열정 자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닌 것 알죠?

 

여전히 메뉴판 앞에서 짬뽕과 짜장 사이를 고민하고 있다면 더 치열하게 고민하시고, 용기 내어 정하시고, 선택에 책임지겠노라 결단하며 나머지는 모두 그분께 맡깁시다. 인생에 짬짜면은 없지만 인생의 주관자이신 그분께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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