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서원을 앞 둔 안나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본인이 원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지도하는 수녀님의 명이었고 물론 소명을 향한 그분의 이끄심일 것이다. 이모 '완다'는 거침없이 욕망을 따라 사는 판시이다. 술과 섹스와 냉소의 여인이다. 순백의 눈밭에서 걸어나온 안나와 이모 완다의 만남은 흑과 백의 만남이며 반쪽과 반쪽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해 흑과 백은 각각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가톨릭의 수도자로 종신서원을 앞둔 안나는 완다를 통해 자신이 폴란드인이 아니라 유대인임을 알게 된다. 폴란드인 안나가 아니라 유대인 이다(Ida)였던 것이다. 부모님은 갓난 아기 적에 폴란드인에 의해 학살되었단다. 그 엄청난 출생의 (어쩌다보니) 비밀(이 된)을 알게 된 백색 이다는 흑색 완다 이모와 함께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곡절 끝에 유골을 찾아 덤덤하게 품에 안는다. 며칠 간의 여행을 통해 백이다와 흑완다는  갈등하고 고뇌하다 일정 정도 긴장을 해결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가며 이다의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완다의 어린 아들도 그때 함께 학살되었던 것. 같은 상처로 각각 다른 삶을 살아온 완다와 이다는 각자 부모의, 아들의 유골을 끌어안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나 이다가 완다 이모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나름대로 자아를 찾아 떠난 여행을 통해 백색 이다가 자신 안의 욕망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 중에 만난 섹소폰 연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충격적 출생 비밀도, 부모를 죽인 살인자와의 만남도 흑백 사진 한 장처럼 덤덤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이다의 로맨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릴 뿐이다. 이 모든 자아찾기 여행을 뒤로 하고 이다는 다시 수도원의 흑백 일상으로 돌아간다.

 

안나가 이다가 되었고, 이다가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 수도원의 일상은 침묵과 흑백이다. 여행 후 안나, 아니 이다가 식사 중에 혼자 큭큭 웃음보가 터진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기치 않은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는 것은. 이다를 수도원에 보낸 완다는 풍성하고 예쁜 머리칼을 꽁꽁 감추고 수녀복을 입은 조카 이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잊었던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창밖으로 뛰어 내려 죽음으로 달려간다. 이모의 죽음이 다시 이다를 속세로 불러냈고, 장례식을 치뤘고, 죽은 이모 집에서 수녀복을 벗고 가슴이 패인 드레스을 입어 보고 하이힐을 신어본다. 그리고 섹소폰 연주가 남친과 춤을 추고 몸을 섞는다. 흑이 백에 물들었을 때는 밥 먹다 혼자 빵터지는 변화가 있었다면 백이 흑에 물들었을 때,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달렸다. 완다 이모의 삶이 너무 아프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남친이 말한다. 해변으로 연주여행을 가, 같이 가자.  가서 해변을 같이 걷자. / 그 다음엔? / 우리 둘이 살 집을 짓고 아이를 낳지 / 그 다음엔? /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벗었던 몸을 다시 수녀복으로 무장하고 이다는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장면은 수도원을 향해 걷는 이다의 코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함께 걸으며 찍었나보다. 그렇게 이다는 다시 한 번 그 자리로 돌아간다. 두 번의 자아찾기 여행을 마친 후이다.

 

 

 

 

 

함께 영화 본 H 샘은 나랑 참 비슷하고 참 다른 사람이다. 이런 식의 표현 피하고 싶지만 굳이 해야겠다. H와 나는 에니어그램으로는 같은 유형인데 MBTI 기질로는  NF와 SP로 다르다. 때로 너무 잘 통하고 때로 너무 다르다고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이대 정문을 통과해 나오며 H쌤이 말했다. '마지막 장면 봐바.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넘치잖아. 자아를 찾고 깨달은 거지.' 그 말에 나는 헉! 했다. 그 장면을 나는 '흔들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의지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선택했지만 그녀의 내면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H의 해석은 경험했고,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힘을 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아찾기 여행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곳에 다다랐지만 일상은 여전히 힘들 것이라는 것에 꽂혀 있었다. 또 다시 식당에서 웃음보가 터질 것이고, 게다가 남자의 몸이 그리울 것인데 더 많은 것을 알았기에 더 힘들 수도원 생활의 순간순간이 염려가 되었다. 각자 자신이 읽어낸 '자아를 찾는 여행 그 후'에 대해서 항변을 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이 지금 같은 얘길 하는 거야!'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얘길 한 건 아니다. H는 깨달음을 얻은 이다가 자발적 선택으로 들어간 수도원을 이전과 차원이 다를 것이라데 꽂혀 있고, 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살아낼 일상은 더 지난하다는 데 꽂혀 있었다. 분명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순간 답답했다. 그러나 같은 얘기를 다른 각도로 보고 있다, 설령 다른 얘기라도 괜찮다는 태도가 그녀와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영화가 준 감동보다 이 대화가 준 감동의 여운이 오래 가고 있다. 그녀를 만나면 마음이 상해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늘 나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마음이 상하더라도 마음을 닫아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나와 달리 큰 틀에서의 믿음과 사랑이 굳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고 항변할 이유도 없다. 자신 안의 이다를 통합해내지 못한 완다의 아픈 결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깨달을수록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나를 감싼다. 그러나 그 내적인 자유가 일상에서 져야 하는 크고 작은 짐들을 어떻게 해주진 않는다. 그 버거움은 여전하다. H 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깨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징징거렸다 웃었다 하는 나와 달리 큰 틀에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고맙다. 그래, 자아를 찾은 이다에게도 선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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