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딸내미 수학여행을 보냈다. 딸내미는 내 딸 아니랄까봐 오로지 패션에만 올인하여 수학여행 준비를 하였다. 나는 그것이 매우 꼴비기 싫었다. 난 고딩 때 여차저차한 이유로 수학여행도 못 갔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내 패션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엄마였다. 그런데 내 딸내미는 나보고 옷을 사줘야 한다는 압력을 계속 넣었다. 나는 사주고 싶기도, 절대 안 사주고 싶기도 하였다. 결국 여행 전날에 딸내미 마음에 쏙 드는 바지와 벨트를 사 주었다. 짐을 싸는데도 나는 도와주고 봐주고 싶기도 안 봐주고 싶기도 하였다. 내 물건을 자꾸 가져가고 싶어했다. 나는 주고 싶기도 안 주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다 애 속만 벅벅 긁어놓고 줄 것은 다 주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엄마였다. 새벽에 딸내미를 공항에 태워다 주었다. 어떤 아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 할 수학여행을 갔는데.... 딸내미 학교 수학여행이 괜시리 못마땅하고 마음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딸에게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안녕, 다녀올게. 하고 가는 딸내미의 뒷모습은 거의 걸그룹 같았다. 흐뭇했다. 내 속에서 저런 기럭지가 나오다니..... 
 

 

나는 오늘 남편을 노회에 보냈다. 노회는 일 년에 두 번 가는 곳인데, 말만 들어도 따분한 곳이다. 어렸을 적에 우리 아버지가 엄청 다니시던 곳이 노회였는데 그때부터도 뭔가 따분한 것 같았다. 남편은 지금 소속도 애매해서 노회에 가는 것이 꽤나 불편한 것 같다. 정말 가기 싫어하는 것이 역력했다. 나는 막 수영에 다녀온 길이었다. 노회에 가더라도 월요일 점심은 언제나처럼 외식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게다가 원하는 메뉴는 면류였고 집에는 면류를 만들어 낼 재료라곤 없었다. 나는 수영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완전 빡센 수영을 하고 와서 완전 기진녹진(기진맥진에 플러스 녹초) 상태였지만 하나도 빡치지 않았다.(몸이 귀찮다고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 빡친다는 사람들, 이해할 수가 없다!!!)  다만 싫다고 몇 번 뻐팅기다 문득 냉동실에 있는 빠넨지 뭔지 하는 빵이 생각났다. 라볶이를 해서 거기 집어넣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벌떡 일어나 라볶이를 만들었다. 남편은 '이거 일인분이냐? 이인분이야?' 하면서 혼자 이인분을 거의 폭풍흡입 했다. 그리고 남편이 나가려고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 나는 책을 들고 소파에 누었다. '잘 거지? 아, 진짜 부럽게' 했다. 나는 아니라고 책 볼 거라고 했다. 분명 남편이 양복 다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걸 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은 없고 시간은 한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이 '정신실과 떡실신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난 정말 책을 보려 했었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 커피를 볶았다. 다음 날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갑자기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가 너무 여유로와서 '좋아하는 모임이지만 내가 준비하는데 부담을 많이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도 머리도 안 쓰고 몸만 움직여 커피를 볶으니 거참 재미 있었다. 연거푸 두 번을 볶았다. 여름에 커피 볶는 일은 불가마 속에서 설렁탕 먹는 기분이다. 로스팅 한 번 하고나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게다가 냉각기 없이 베란다 창문에 매달려 열을 식히노라면 이게 식는 건지 더 뜨거워지는 건지 헷갈릴 정도이다. 커피를 볶아 채반에 들고 창가에 섰는데 와우! 솔솔 부는 가을바람이 이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다. 후후 불어 폴폴 날아가는 체프를 바라보는데 내 몸이 다 날아갈 것 같았다. 딸내미 수학여행 보낸다고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공항에 다녀왔지, 빡세게 수영했지, 예상에 없던 점심 만들었지..... 정말 피곤한 하루였는데 말이다. 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순전히 다 한 시간 반의 떡실신 덕분이다. 참 보람있는 하루였다.

 


 


 

'그리고 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하나의 가족, 동인이  (4) 2014.12.06
캐릭터가 살아 있는 사람들  (2) 2014.11.02
단골 미용실  (0) 2014.10.01
인사  (6) 2014.06.30
지금 여기 사는 것  (4) 2014.05.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