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서 공적 마당에 내놓는 것은 꽤 위험한 일입니다. 쓰는 사람은 글에 담은 자기 선의만 생각하거든요. 선의와 함께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을 독자들이 읽어줄 거라 기대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긴 시간 피 흘리며 배웠습니다. 글이 길 때는 끝까지 읽어주는 독자도 많지 않은데, 필자의 뜻까지 헤아리길 바라는 건 과욕이지요. 제목과 저자의 인상만 보고 쉽게 판단합니다. ‘나만 보기’ 설정의 글이 아닌 다음에야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악플이란 표현도 무게감으로 느껴질 만큼 쉽게 내뱉은 댓글이 가진 폭력성. 글의 맥락과 연관을 찾기 어려운 긴 댓글도 달립니다. 한 번은 기본적 맞춤법도 모르고 공적 글쓰기 하는 사람으로 단정되어 창피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일단 글이 나가면 댓글이나 반응은 안 보는데 꼭 제보해 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저는 맷집이 약해서 비난의 그림자만 스쳐도 휘청거리곤 하거든요.

하지만 역지사지로 압니다. 저도 좋은 뜻, 좋은 글을 취향 때문에 패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좋다는 글, 사람이 왠지 내겐 거북하여 안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린 페친의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을 보는지 모릅니다. 타자에 비친 내 마음을 보는 것이지요. 고혜경 박사의 말처럼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투사(projection)의 드라마일지 모릅니다.

이 글은 <신앙 사춘기> 연재 초기에 썼던 글입니다. 초고를 어찌어찌 완성해 놓고 매번 미루고 미루다 결국 탈고하지 못하고 연재를 끝냈습니다. 초안으로 치면 5, 6년 전에 잡았던 글입니다. 그나마 이모로 저모로 가장 괜찮은 (건강한 작은 개혁)교회 사모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문드러진 마음, 무너진 몸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어찌된 일인지 그때로부터 ‘그것은 알고 싶지 않다’ 시리즈물이 제게 상영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좋은 교회라는 자부심에 어깨가 올라간 교인들이 있고, 정작 그 교회 목사님과 가족들은 말 못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한국교회 희망이 되는 것 같은 진보적이고 훌륭한 분 일상의 자기장 안에서 그분의 그림자에 질식하는 분들이었습니다. SNS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분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자꾸 제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신앙 사춘기’라는 언표로도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었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당장 한 영혼이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제 눈앞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글에 담긴 마음은 정말 복잡합니다. 연재를 마치고 책 출간을 위해 추가글을 쓰면서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글입니다. 이조차도 너무 힘겨워서 포기할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신앙 사춘기> 연재 시작하며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겠노라, 쓰고 싶다, 했습니다. 한 편 한 편, 정말 그런 마음으로 썼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통과한 연민’ 없이 찌르지 않으려고 쓰고 덜어내고, 쓰다 멈추어 울기도 했습니다. 매 글마다 각각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그를 편들기 위해 찔러야 했습니다. 그를 대신해 작정하고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뜻도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글, 탈고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은 복수의 칼날조차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도 100%의 사랑과 연민일 수는 없지만요) 이 글은 맨 처음 글의 초안을 잡게 했던 그분과 그분의 남편 목사님 헌정입니다.



번외 편 <신앙 사춘기> 올린 글을 페이스북에 링크하며 붙인 글이다.

10개월, 아니 5, 6년 묵힌 글인데도 도통 써지질 않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도 글이 한 문장도 나오지 않고, 마음에 돌덩이 하나 얹은 느낌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를 집어 들었다.


"평생 쓰던 글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한 문장에 끌렸고 첫 페이지의 제목 또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작은 책을 손에 쥐고 거의 한달음에 다 읽고는 조금 허무해졌다.

알고도 낚이는 법이지만, 예상된 바지만 글빨을 뚫어줄 뾰족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

행간에서 나만의 답을 '자신의 은밀한 결핍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을까.

실은 엉뚱한 통찰이 내게 와 힘이 되었다.


"후지게 쓰는 것보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 나는 가장 두렵다."


세계적인 작가로서는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워 글이 막힐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후진 글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글의 후짐보다 마음의 후짐이 늘 괴로웠다.

글의 후짐으로 치면 이런 에피소드도 겪는 후진 작가이다.

"밥벌이로써의 글쓰기"를 내놓고 '로서'와 '로써'도 구분 못하는 사람으로 몰린 적이 있다.

더 부담과 상처로 남은, 

<뉴스앤조이>에서 깐깐한 편집자로 소문난 담당 편집 기자님까지 싸잡아 넘겨졌던 것.

(심지어 이분은 내가 처음 보낸 제목을 '로서'로 고쳐 글을 올리셨다.

부러 '로써'로 쓴 것이니 다시 수정해 달라는 요청 드려 '밥벌이 로써'가 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낯이 뜨겁고, 부끄럽다.

(책 출간 때는 제목의 '로써'에 따옴표를 붙여 강조할 예정이다.

지질한 뒤끝 작렬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이 뒤끝은 평생 갈 예정이다.)


문법과 문장의 후짐은 쉽게 드러나 부끄럼 당하고 무시 당할 수 있으니 다행인지 모른다.

소설도 아니고, 내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를 쓰면서 후진 마음으로 쓴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마음의 후짐이란, 글로 나를 속이는 행위를 말한다. 

투명하지 못한 마음이 후진 것이고, 후진 마음은 후진 글이 아니라 악한 글이 된다.

내 글에 내가 속는 것, 이 얼마나 악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내 글이 특별히 투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을 쓰며 그 지점이 늘 부끄럽고 고통스럽단 얘기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저 책이 힘을 주었다.

나같은 무지랭이가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후지가 쓰더라도 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쓰지 않았으면 인생의 어두운 숲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글도 사람도 다소 후지지만,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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