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0416

진정성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진정한 슬픔

larinari 2019. 7. 6. 23:49



나의 진정성을 몰라준다! 분통 터트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절규가 절절해지는만큼 진정성은 그 진정성에서 멀어지는 것 아닌가. 타자에게 피력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내 안의 진정성을 스스로 묻고 의심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드러나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만이 진정한 진성성이지 싶다. '제발 나를 믿어달라'는 사람을 신뢰하게 되지 않는다.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진정성이란 이미 틀려먹은 진정성이고, 진정성을 우기는 것이 곧 자기방어임을 깨달았을 때, 정말 큰 자유를 느꼈다.  


이 지점에서 늘 떠오르는 청년 시절 일화가 있다. 청년들과 눈만 마주치면 "우리 아내와 상담해라. 밤 12시에 전화해도 된다" 하시던 교회 어른이 계셨다. 결혼 이후엔 젊은 부부에게 그러셨다. "우리 부부는 여태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했다. (당시 아마도 60대).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때 언제든 우리 아내와 상담해라."라고 하셨다. 상담은 커녕 일상적 대화를 위해서도 찾고 싶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 마음을 얻는 일이다. 에로스 사랑을 물론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어느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 그것은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의 진정성을 내 편에서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가 말했다. "말하지 않을 작정이냐? 나는 너를 풀어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요 19:9-10)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사 53:7)


진정성의 숙명은 자기변호가 불가한 고결함에 닿아 있음이다. 예수님처럼. 진정성은 결국 오해로 버림받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픈 이유 역시 자기 정당성을 증명할 언어를 스스로 잃기로 작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도,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도 그러하다. 내 혀 끝에 매달린 수많은 해명과 변명의 말들, 내놓지 못한 그 말을 밀어내지 못한 억울함으로 빨라지는 심장박동. 내가 아직 나의 선생님 예수님의 발끝도 미치지 못함이다. 


김정숙 여사의 파란 브로치를 두고 '멍멍'하는 소릴 들었는데, 저 사진을 뉴스에서 봤다. 해명과 변명의 말대신 몸으로 다가가 눈을 맞추고 손 내미는 문대통령 부부, 두분의 행동으로 감동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진정성이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이렇듯 비루한 해명을 해야 하는, 진정성을 증명하는 오욕이 안타깝다. 멍멍 소리에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 보유국 국민이라 참 좋은데, 되돌려 드릴 수 있다면 싶었다. 진정성을 해명할 필요 없는 자리, 양산의 '집'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