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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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

lari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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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이다. 40일, 한 달, 21일. 이런 시간을 문득 인식하곤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애도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 40일은 아침, 저녁, 하루, 이틀로 분절되지 않는 한 뭉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21일째 아침, 한 달 되던 아침은 조금 달랐던 것도 같고 오늘 아침도 그렇다. 괜히 21일, 한 달, 40일이 아닌가 보다. 며칠이 지났지? 날을 세는 때는 나로부터 한 걸음 빠져나올 때니까 말이다. 한 걸음씩 물러나 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엔 엄마 떠나고 읽었던 책을 모아봤다. 노트북 옆에 쌓여 있거나 침대나 소파 옆 탁자에 굴러다니던 것들이다.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책꽂이에 꽂으려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때, 가장 좋은 진통제는 책이다. 책조차 읽을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동굴 속 40여 일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활자 덕분이다. 읽을 수 있었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고 특권인가. '애도'를 다룬 여러 책을 읽었다. 이미 읽었던 것을 다시 읽기도, 새로 주문한 책도 있다. 세상의 모든 애도를 다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며칠은 미친 듯이 읽어댔다. 공부로 읽던 때와는 비할 수 없는 공감이었다. 나를 통과한 읽기란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으로 복잡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설명'하는 내용조차 위로가 되었다. "이게 이런 말이었구나!" 비로소 알아듣게 된 문장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두 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한 인생 책으로 남을 것 같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와 스에모리 지에코의 에세이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이다. 이전에 읽었던 왕은철의 『애도예찬』에서 추천받은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주문해 읽게 되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 선택한 것 같다. 아니,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읽는 내내 죽음이란 죽음을 다 찾아다니는 주인공 시즈토의 애도가 우리 엄마에게까지 닿을 것 같은 희망, 아니 이미 닿아 연결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깊은 위로였다. 소설 한 권이 가장 어두운 시간을 버티는 촛불 하나가 되었다. 엄마 장례 후 처음으로 혼자 산책 나간 날이었다. 하염없이 걷다 지하철역 근처 성바오로 서점에 끌리듯 들어갔다. 막 나온 신간의 표지가 예뻐서 집어 들었다. 그대로 머리말과 몇 편의 글을 읽었다. 결혼 생활 11년 만에 갑자기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고이 키우는 중 아들이 사고 후 불치의 병을 얻고, 55세에 재혼한 철학자 남편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고 뇌출혈로 언어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긍정적이고, 언어가 곱다. 평소 같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책이다. 나는 엄마가 "부활을 믿네 못 믿네" 하며 분노와 냉소를 오가는 중이었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지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상실, 상실'들'을 이렇듯 순화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고? 깊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묘한 끌림과 거부감이 함께 일렁였다. 그래서 샀다.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이며 그림책을 편집하는 저자의 앞에 서니 기복 심한 내 감정과 얕고 경박한 내 믿음이 보여 작아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내가 참 멀리 왔구나, 착한 믿음과 순한 언어를 너무도 많이 잃었구나...... 당장 이런 나를 내가 품고 가는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절제된 언어로 이 시간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일기 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때로부터 시작한 '쓰기'가 나를 나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때의 '쓰기'는 뭐가 뭔지 모르는 쓰기였다. 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사라진 세상의 부조리를 유치한 질문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낮에는 그 무엇도 잃지 않은 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처럼 쾌활한 웃음으로 살고 밤에는 울며 불며 쓰고 또 썼다. 어린애가 살자고 선택한 방식이라니, 얼마나 안쓰러운가. 아니 그것이 '쓰기'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를 잃은 열세 살엔 뭘 모르고 썼다. 나는 뭘 모르고 글이 나를 썼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떠나보낸 나는 열세 살이 아니라 쉰둘이고, '치유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리님'(글쓰기 등 치유모임에서 쓰는 내 별칭)이다. 상실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발설의 힘을 안다. 소름 끼치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다. 뿌득 뿌득 포기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엄마 떠난 40일,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 없이 좀비 같은 날을 살지만 한 편씩 써내는 것에 사는 의미를 두고 쓰는 것이다. 처음 글쓰기가 상실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다면 나는 이제 충분히 의식화되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작가이다.

 

이 글들의 시작은 나를 위한 것, 숨쉬기 위한 인공호흡의 행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에 세우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엄마를, 아버지를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어정쩡하게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저도 그랬어요, 실은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던 건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뒤늦게 감정이 올라와요......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나는 아버지 죽음을 글로 풀어내게 되었고, 평생 그 상실의 경험을 쓰고 또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 생애 가장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아버지 부재가 결국 나를 만들었고, 나를 구축하는 힘은 '언어'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엄마를 잃은 사람, 아버지 없는 사람인데 쓸 수 있는 내가 써야겠다. 나라도 얘기해야겠다. 아버지 잃는 것이 엄마를 잃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지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고 말해야겠다. 빨리 정상화되지 않았어도 된다고, 당분간 미친년이었어도 된다고, 이제라도 얼어붙은 감정 몇 조각 녹여내는 것이 좋다고 떠벌이고 싶다. 내 안에 아직 다 울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 허용해주며 나와 연결된 당신에게도 그러자 하고 싶다.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과분한 행운이다. 아버지 죽음의 상실감으로 인생 자체가 실존적 피해의식 덩어리이다. 정희진의 말처럼 글쓰는 사람에게 '상처'는 권력이라고, 그 상실이 내게 힘이 되었으니 이 역시 남다른 행운이다. 상실의 역설이다. 그러니 나도 감사하려고 한다.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의 저자의 곱고 맑은 감사와 긍정은 없지만 너덜너덜하고 거친 언어로 빚는 감사가 있다. 스에모리 치에코, 그녀에게 언어가 빛나는 비밀인 것처럼 내게도 나름대로 소중한 비밀이다. 내 나름의 언어로 조금 더 쓰겠다.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죽음과 (권력이 된) 내 상실과 상처를 조금 더 쓰려고 한다. 쉰둘의 내가 열세 살 나와 손을 맞잡고 쓰는 거다. 더는 쓰고 싶지 않을 때까지 쓰고, 발설하도록 같이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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