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사람

밤 산책, 친구

larinari 2021. 5. 24. 09:11

주방을 등지고 앉은 내게 채윤이가 말했다. "엄마, 해가 나오고 있는 거 알아?" 채윤이는 주방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환해진다. 해가 질 시간인데 환해진다. "밥 먹고 한 바퀴 돌고 올까?" "그래" 잠깐 얼굴을 보여준 해가 이내 지고 어두워졌다. 늦은 밤 산책을 나갔다.

일명 '남의 아파트 돌아다니기'로 밤 산책 콘셉트를 정했다. 이 동네, 오래된 여러 단지가 모여 있어서 좋은 점이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많고, 나무 사이사이 새가 많고, 그 나무 아래를 걷는 즐거움이다. 온종일 내린 비에 젖은 큰 나무 사이를 걷는다. 개코 채윤이가 그런다. "아, 이 냄새! 수련회에서 집회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냄새. 이 냄새 맡으며 숙소로 가서 치킨 먹을 시간이야! " 나도 아는 그 냄새를 채윤이가 느낀다니! "글치, 글치. 수련회 중에 하루는 꼭 비가 오지. 비가 그친 다음에 나는 숲의 냄새!" 남의 아파트 캄캄한 둘레길을 스마트폰 조명을 의지해서 걷는데 "어, 이건 천로역정 마지막 코스 느낌인데!" 한다.

수련회의 추억을 걷다 넓은 길로 나왔는데, "엄마, 나 쫑알쫑알거려도 돼?" 하더니 대답 필요없는 말을 쏟아낸다. 친구 이야기,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저렇게 어렵다는 이야기. 문득 내 친구가 떠오른다. 요즘 자꾸 꿈에 등장하는 친구다. 중 3때 만나서 결혼 전까지 심하게 붙어 다녔던 친구. 친구는 엄마가 없고 나는 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그것 하나로 이 친구가 좋았는데, 돌아보면 정말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이었다. 요즘 꿈에 자꾸 나와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니겠구나, 싶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들어주었고, 머리가 무척 좋았고(천재일지도 모른다. 한때 서로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KFC에서 치킨을 먹다 운 적도 있었네.), 시, 음악, 소설...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나와 치명적으로 다른 것이 자기 과시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십 대 중반부터 20대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사람이다. 수련회 가서 뜨거워져 돌아와서도 이 친구와 후기를 나눴다. 교회 안에서 어려운 얘기도 죄다 이 친구에게 쏟아냈다. 교회 안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래서 얻은 유익이 컸겠다. 말이 많지 않은 친구지만, 말의 영향력이 컸다. 둘만의 표현법이 있었고, 둘만의 언어 세계가 있었다. 친구와 끝없는 대화, 주고받는 편지가 준 가장 큰 선물은 교회 죽순이였던 나를 기독교 게토 언어에서 구원한 것 아닐까 싶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서적, 청계천 헌 책방에 가고. 고등학교 때 학교가 갈라졌는데 야자 끝나고 10시 반에 되어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호떡 먹고 헤어졌다. 친구가 재수하던 시절에도 재수학원 앞 분식점에서, 음악다방에서 꼬박꼬박 만나 놀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가 달랐는데 시간표를 같이 짰다. 교양과목 시간표를 서로 잘 짜서 걔네 학교 우리 학교 오가며 같이 강의를 들었다. 직장 다닐 때도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났다. 내가 기타 치고 노래하면 그걸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었다. 같이 옷을 사서 바꿔 입기도 했다. 같이 하지 않은 게 없었던 것 같다. 싸울 법도 한데, 크고 작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이 없는 것은 정말 특별한 그 친구의 성품 탓이다.

친구네 집에 자주 가서 자곤 했는데.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친구가 알려주길 그 아주머니는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나이가 한참 많았는데... 40 정도 되었나? 멋지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40에 편지를 주고받자! 그런 말 했었는데... 40이면 많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 40보다 한참 지난 나이가 되었다. 친구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지 알 듯하다.

산책 길 끝에 종일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넝쿨 장미를 만났다. 쫑알쫑알 떠드는 채윤이의 친구들 같다고 느껴졌다. 찬란하다. 제 딴에는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겠지만 20대 찬란한 날들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친구들 이야기. 나의 20대도 찬란했었지. 그 친구가 있어서 특별히 찬란했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진다.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