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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교회에 다니는 그녀

larinari 2021. 7. 3. 19:32

<기독교세계> 7,8월호 기고글

 

 

K에게.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요. 늘 궁금했는데 연락해 볼 생각은 못했네요. 건강해졌다는 말 들으니 안심이 돼요. 그리고 아직도교회에 다닌다니 애석하고도 기쁘군요!^^ 첫 만남이 떠오르네요. 글쓰기 모임, 정확히 말하면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이었죠. 저물녘 호수 둘레를 걷는 K의 모습을 상상해 봐요. K의 글에 자주 등장했던 장면이죠? 걷다 보면 글쓰기 숙제에 관한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셨어요. K가 썼던 진솔한 글, 그 글을 낭독하는 떨리는 목소리도 다시 살아오는 것 같아요.

 

이런 이름의 모임에 있는 저 자신이 믿어지지 않아요. 제목(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자조. 모임.) 중 어떤 단어에 끌렸냐고 하셨지만, 이런 단어를 나란히 놓고 읽어야 한다는 게 싫고요. 남의 일 같은 이 일이 제 일이라는 게 어렵기만 하네요.”

 

이렇게 말했지요. 그런 모임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우리예요. K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K뿐 아니라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자매들을 만나며 수도 없이 해본 상상이죠. 어떤 자매의 말이 떠오르네요. 그 고통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주시길, 그 기억이 저장된 뇌세포를 도려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고요.

 

맞아요. 지우고 싶은 그 고통으로 연결된 만남에서 위로 그 이상의 것을 얻었던 것은 아이러니예요. 옆방 사무실에서 일하던 간사님들이 궁금해 기웃거릴 정도로 크게 웃는 일이 많았죠. 그러다 어느새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요. 그야말로 울고 웃는 모임이었어요. 저도 그립네요. 첫 만남의 긴장감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으면서 감정의 강이 자연스럽게 흘렀던 것 같아요. 웃어야 할 때 거침없이 웃었고, 그러다 갑자기 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어요. K만 해도 그래요. 첫날의 경직된 표정만큼이나 반달눈을 하고 웃는 모습도 생생하거든요. 성폭력 피해자 모임에서 깔깔 웃는 소리라니! 누군가는 피해자다움을 들이댈지 모르죠. 성폭력 피해자의 표정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누가 뭐라든 치유적이었어요. 울고, 웃고, 분노하고, 아파하던 그 자리요.

 

그 말을 기억하고 있군요! 그래요, 제가 여러 번 말했죠. 발설이 그대를 구원하리라!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이었어요. 고마워요, 좋은 기억으로 간직해줘서. 겪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구원의 첫발이 되었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오늘 메일로 만나는 K는 더 멋있어진 것 같아요. 변화의 시작이 쓰고 말했던 그때였다니 고마울 뿐! 함께 읽었던 김영서 작가의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기억나요? 목사인 친아버지에게 당한 성폭행의 기록이죠. 거기 나오는 말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라던 그 사람의 말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사실을 말하면 죽게 될지도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은, 내가 집에서 아빠에게 겪은 일을 한 사람 두 사람 외부인에게 말하게 된 때였다. 그 과정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아빠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K의 메일을 읽자니 저자의 이 고백 못지않은 힘이 느껴졌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가슴으로 알아듣고 있다니 뭉클하네요. 그렇죠?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달라요. 폭력을 당하고, 우리가 의식적으론 알아요. 잘못된 일을 당했다는 것을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내 잘못으로 가져오죠. 많은 학대 피해자들이 그러하듯 가해자의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게 되는 거예요. 힘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학대가 남기는 치명적인 상처죠. 더욱이 가해자가 목회자라면 깊은 영적 상처가 될 거예요. “그 자리에 왜 갔느냐, 제 발로 간 것 아니야, 저항하지 않았잖아!” 같은 2차 가해의 목소리는 흔하고, 잔인하게 음해하는 소리까지 더해지면 피해자는 자기 비난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죠. 자아의 분열 속에서 몸과 마음은 얼어붙고, 주입된 감정이 작동하죠. “내 잘못이야.” 스스로 자기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상태에서는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어요. 발설이란 불가능하죠. 게다가 가해자가 존경받는 목회자인데요. 내 말을 믿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모임이 서로에게 제공한 것은 안전함이었을 거예요. 안전하다는 믿음 속에서 어렵게 입을 떼보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쓰고 말하는 연습을 했던 건데. 그 짧은 만남 이후로 혼자 보내는 시간 쉽지 않았을 텐데, ‘내 잘못이 아니었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니요. 어떻게 치유의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이 돼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죠. 분열된 몸과 영혼으로 입은 닫은 채로요.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요. 없는 척 눌러둔 상처는 반드시 되돌아와요. K에게 일어난 일처럼, 조용히 무너지던 마음이 몸으로 신호를 보내죠. K 말대로 무너진 몸, 몸이 보낸 증상들이 결국 K를 살리는 일이 되었네요. 청년부 시절 담당 목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도 전과 다를 것 없이 신앙생활 했다고 했었죠.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도 무리 없이 했고요. 겉으로는! , 겉으로는요. 진실을 억압한 채 겉모양만 유지하는 괜찮은 삶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잠들지 못하는 밤, 끝없는 무기력과 여러 증상 끝에 결국 몸이 무너졌죠. 그렇게 병원에 가게 되었고, 비로소 묻어두었던 그 일이 드러났어요. K 말대로 부서질 대로 부서진 상태가 되어 병원에 가게 된 거네요. 정신과의 약물이나 여타 치료로 효과를 보면서도 병원에 계속 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어요. 치료 과정 중 의사에게 들었다는 말, 제 마음에도 아프게 살아있네요. “목사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직 교회에 다녀요? 하나님 얘길 아직도 해요?” 그리고 건강해지려면 종교활동을 끊으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했죠.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더 큰 혼란에 빠졌고, 아마 그즈음 글쓰기 모임에 문을 두드린 것이었죠.

 

제가 K를 자주 떠올렸던 것은 바로 그 지점 때문인 것 같아요. K가 썼던 글, 했던 말 중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요. 목사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은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었죠. “왜 아직도 교회를 다니냐는 말을 듣고 광신적 행위로 비치는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이 트라우마에서 회복되려면 정말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혼란스럽다고 했었어요. 막상 교회로 와 같은 고민을 털어놓으면(털어놓을 곳도 없었겠지만) “용서해라, 은혜로 잊어라라는 말에 증상이 더 악화되고요. K의 이런 이야기들을 정말 아프게 들었어요. 우리 생존자 모임에도 교회에 발을 끊은 지 오랜 분들이 많았어요. 무신론자를 표방하는 분도 있었고요. 성폭력 경험을 진실하게 마주할수록 목회자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커지는 것이 당연해요. 목사에 대한 분노가 쏟아져 나와 말이 거칠어질 때마다 혼란스러워 흔들리던 K의 눈동자를 기억해요.

 

교회와 멀어지고 떠나는 것은 아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은 그런 맥락 안에 있겠지요. 이 딜레마는 여타 성폭력 피해와 다른, 성직자에 의한 폭력이 유발하는 영혼의 고통이에요. 정신-신체적, 심리적 처치를 통한 치유와 함께 깊은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것이지요. 성폭력 피해, 특히나 영적 권위자인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한 영혼을 어떻게 분열시키고 망가트리는지 피눈물이 나도록 생생하게 목도 했습니다. K는 바로 그 지점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던 것이고요.

 

오래전 상담했던 한 분이 떠올라요. 청소년 시절 열심히 따르고 배웠던 목사에게 성폭행당했지만, 회복의 여정을 잘 통과하셨어요. 어릴 적 경험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증언하고 공론화하여 가해자 목사는 법적 처벌까지 받았죠. 그런데 모든 과정이 끝나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긴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을 돕던 기독교 활동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으셨대요. 이분은 청소년 시절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그루밍 성폭력이란 이름을 붙인 후 심정적으로 신앙에서 완전히 떠났어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거침없이 살았지요. 비슷한 또래의 활동가들을 보면서 떠오른 거예요. “나도 한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잊었던 어릴 적 꿈이 생각났지만 이제 자신은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청소년 시절 내내 가해자 목사에게 배웠다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할 수 없대요. 이 말을 들은 날 밤, 저는 분노와 슬픔으로 잠을 잘 수 없었어요. 한 청소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며 열심히 공부하고 뜨겁게 기도하며 키운 꿈, 이제는 망가지고 짓밟힌 이것을 어떻게 다시 이어붙이고,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 가해자 목사가 감옥에 가고, 목사직을 박탈당한다고 해서 되돌려질까요.

 

성폭력은 몸은 물론 존재 깊은 곳에 해로운 수치심을 심는, 영혼을 향한 폭력입니다.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의 부끄러움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있는 온갖 선하고 아름다움까지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참가자 어느 분이 썼던 표현이 생각나요. 반짝반짝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중등부 시절 목회자에 성폭력을 당했지요. 어느 글에서 이런 표현을 했어요. “나는 내가 반짝거린 게 부끄러웠어.”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출구 없는 자기 혐오의 덫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동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은 아이가 신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매개자, ‘중간대상과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상()’을 투사하는 중간대상이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무의식적으로 영적 부모가 되는 것이고요. 때문에,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은 하나님 상에 치명적인 분열을 유발해요. 존경하던 목회자에게 배웠던 그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하나님을 만나는 다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신과 약으로, 심리치료로, 단순한 기도로 되지 않는 영혼의 치유입니다. 혐오스러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직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른 한 목사의 얼굴을 넘어서야 하는 일이지요.

 

한때 영적 부모였던 사람이 동시에 치명적 범죄자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반갑습니다. 섣불리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요. 맹목적인 용서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목사 중 한 사람이라고 여길 만큼 K가 강해진 것 같아요. 아픔과 혼란 속에서 아직 교회에 다니고, 아직 기도하고 있고,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 K가 존경스럽습니다. 보고 싶네요. 얼굴 마주하고 차 한 잔 할 날을 그려보겠습니다.

 

정신실(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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