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걷기: 나의 발로





열흘 전쯤, 서울 갈 일이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나가서 명동쯤에서 약속을 잡는 일이 있다. 책이나 업무 관련이지만, 이런 만남은 대체로 설렌다. 이날은 특히 '일로 만난 사이'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 싶은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원고 끝난 주간이라 마음도 한 없이 가벼웠다. 동네에 있는 '식빵이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은 식빵을 사가지고 가서 선사해야지! 시골쥐가 서울 가는 느낌으로, 설레고 기분 좋은 발걸음이었다.
빵집에 도착하니 10시에 연다고, 받아주질 않네... 시간 정말 넉넉히 잡고 나가야 한다는 채윤이 말에 넉넉히 나오긴 했지만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하나 놓치면 30분인데, 빵을 포기해 말아 하다 포기하지 못하기로 했다. 15분 정도 남는 시간, 상가 뒤 예쁠 것 없는 길을 걸었다. 걷자니 손짓하는 친구들이 있고. 선씀바귀, 노란선씀바위, 꽃마리, 아직 피지 않은 개망초... 이 친구들과 놀자니 15분 아깝지 않고. 불친절한 직원에게 살짝 긁힌 마음도 싹 사라졌다.





지난 수요일에는 교회 중보기도팀과 함께 광림수도원에 '걷는 기도'를 하러 갔다. 우리집에서 걸으면 1시간 거리라서 '걷는 기도'를 위해서 미리 한 시간 '걸어서'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역시나 예쁜 길은 아니었다. 길 닦는 공사 중이고, 땡볕이고... 그 와중에도 세상 가장 당당한 존재인 들꽃 친구들이 말을 걸어서 심심치 않았다. 별꽃, 괴불주머니, 자주괴불주머니, 소래풀꽃. 자꾸 불러주어야 이름이 입에 익고 더욱 마음에 들어온다.
전에 채윤이가 함께 숲을 걷다가
"그거 뭐지? 부모가 늙으면 산에 갖다 버리는 거..."
"고려장. 왜 엄마 아빠 늙으면 고려장 하게?"
”아니, 그게 아니고. 엄마 아빠 숲에서 이러고 좋아하는 걸 보니까 고려장 해주면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오, 괜찮다! 요양병원서 죽는 것보다는 숲에서 죽는 것 좋겠다...."
라고 답하며 잠시 생각하니 안 되겠다.
"안 되겠다. 밤이 너무 무서워. 밤에 숲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으... 안 되겠다. 그냥 요양병원으로!"

멀쩡한 길에서도 삐끗 하고 넘어지는 게 일인데. 털고 일어나서 잠시 창피한 것 넘기면 괜찮은 경우가 많고, 다쳐봐야 인대 늘어난 정도였는데. 평소보다 붓고, 아프다 했더니 골절이다. 약속된 강의 일정도 걱정이고, 당장 집안에서 움직이고 밥 하는 일도 문제이지만. 이 좋은 계절에 나가서 걸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큰 상실감으로 온다. 지난 주일에 설교하러 가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고통을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알 수 있겠는가, 겪어봐야 하는 고통일 것이다,라고 얘기했는데. 걷기를 박탈당해버렸다. 얼마 전에는 신을 벗고 맨발로 연꽃이 필 듯한 진흙밭을 자박자박 걷는 꿈을 꾸었었다. 깁스를 하자니 그 발에는 신을 신지 못한다. 걷기만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큰 자부심으로 여겼던 나의 일부를 잃은 느낌까지 와서 상실감이 크다. 실은 그 어느 때보다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스스로 잃고자 애쓰고 있는데... 주님, 얼마나 더요? 더 포기하고 더 내려놓아요?라고 물었더니 오늘 아침 영적 독서로 이런 답을 주셨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경우가 아니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지 않는다.
상실한 것을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이 무력하지만, 희망하려고 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니까.(롬 5:5) 밖에 나가 걸을 수는 없지만, 마음의 정원, 마음의 숲길을 내 발로 걷는 것은 멈추지 말아야지, 한다. 어릴 적엔 외적인 어둠이 무섭고, 나이들면 내 안의 어둠이 무서운 것인데. 이참에 내 마음의 어두운 숲길을 맨발로 자박자박 걸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