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여자, 쓰는 여자
출옥이다. 격주로 글을 쓰던 연재 감옥, 글 감옥에서 출옥이다. 《슬픔을 쓰는 일》이 '쓰인 글'로서 그냥 흘러나온 글이라면, 이번 '신앙 사춘기 너머'는 짜내고 짜내어 '써낸 글'이다. 게다가 청탁이 아닌 '자발'로 시작한 글이다. 글을 시작하며 했던 인터뷰에서는 독자의 요청이라고 했지만, 내 안의 어떤 사람의 요청이었다. 이걸 써야 자유를 얻을 것 같았다.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고자 했는데 찌르기만 하고 충분히 싸매지 못한 채 마치고 만 것 같아서이다. 2019년 이후로, 누구도 지우지 않은 부담감과 책무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나 자신에 대한 책무감이다. 그래서 징징거릴 수도 없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쓰는 글이니까.
글이야 쓸 때는 괴롭지만, 그에 못지않은 생산의 기쁨이 있다. 산고 끝의 출산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그 기쁨조차 어정쩡했다. 한숨 돌리고 바로 다음 글을 써야 했으니까.
마지막 글을 쓰면서 다리가 꺾였다. 나름 매 회마다 초안이 있었고, 마지막 글에 관한 한 거의 완성본에 가까운 초안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 있던 말은 거의 쓰지 못했다. 글은 제 방식으로 나를 끌고 갔다. 결국 또 여기야?! 서른여덟에 시작한 신앙 사춘기 얘기가 닿은 곳은 또다시 아버지 장례식이었다. 쓸 수밖에 없었지만, 지긋지긋했다. 또 이 얘길 해야 한다고? 신앙 사춘기 얘긴데, 생애 초기까지 끌어오겠다고?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쓰지만, 내 안의 누군가가 밀어붙이는 덕에 탈고에 이르기 때문이다.
글 감옥은 독방이라, 참으로 외롭지만 고백하자면 실은 그리 외롭지도 않다. 이런 분들이 함께 해주어서이다.
먼저는 록산 게이이다. 아버지 장례식 얘기를 다시 쓰면서 지긋지긋해하는 내게 록산 게이가 다가왔다. 록산 게이의 목소리를 빌려서 내가 나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다. 너만 그런 것 아니라고, 글쓰기의 단군 할머니 선생님인 록산 게이도 그랬다고.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록산 게이 《헝거》
쓰다 보면, '전에 어느 책엔가 썼더 말인데...' 싶은 때가 있다. 자주 있다. 그러면《나의 성소 싱크대 앞》《슬픔을 쓰는 일》《노을이 물드는 시간》같은 것을 들춰봐야 한다. 자기 표절을 검열하는 시간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그거네, 싶으면 또 좌절이 되는데. 이 순간에는 엔도 슈사쿠 선생이 익살 가득한 얼굴로 등장해 등을 토닥인다. 한 배우자와 살 듯, 하나의 운명을 사는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지 않고 내 옷으로 바꿔 입으려 애쓰는 것이 인생 아니겠느냐, 글쓰기 아니겠느냐, 하면서.
사람은 많은 반려자와 살 수 없는 것처럼 많은 종교나 사상과도 살 수 없습니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저에게 그리스도교는 인연이 먼 양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벗지 않고 어떻게든 제 몸에 맞는 일본 옷으로 바꾸려고 애써온 인생이었습니다. 그게 제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도 있지 않을까요?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아버지 장례식 얘기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던 나를 고백하는 것이고, 내 존재의 근본적 흠을 드러내는 일인데. 나는 또 그러고 있지. 하지만 괜찮다. 아니 에르노가 있으니까. 내 아무리 옷을 벗고 투명해진대도 《부끄러움》을 쓴 아니 에르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용기 낼 수 있다. 제목에 끌려 읽게 된 《내면 일기》서두에 아니 에르노의 '일기'에 인터뷰가 들어 있었다. 공감의 위로를 얻었다.
일기는 사랑이 찾아들게 한 사람,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 우리가 상실한 사람, 상처를 준 그런 사란들에게 답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그리고 인간의 삶에 널리 퍼져 있는 혼란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소피 퓌자스 · 니콜라 말레 《내면 일기》 중, 소피 퓌자스의 ‘서문’에서
글쓰기는 사회와 사랑으로부터 버려진 것만 같은 격렬한 외로움을 치유해 줬다. 새 노트를 펼쳐 날짜를 쓰는 건 어떤 계획의 시작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앞으로 꾸준히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기억이 없다. 그냥 그게 다였다. 《내면 일기》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 중
무엇보다 이 문장. 나도 내 일기장 속 나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앙 사춘기 너머'를 써야 한다고 나를 설득하고 설득했던 이유는 이것인지 모른다. 일기장 속 나와 '신앙 사춘기' 저자로서의 분열에 대한 고통이다. 나는 달라졌다. 신앙 사춘기를 쓸 때의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야 수시로 바뀌고 바뀌면서 흘러가는 것이지만, 생각!도 달라졌다. 달라진 생각을 어떻게든 내놓아야 했다. 내 일기장 속의 나는 평안해졌고, 순해졌다. 독한 표현과 제목이 인기를 얻는다는 것을 알지만, 최대한 착하게 쓰고 싶었다. '신앙 사춘기'를 쓸 즈음에도 사실 그리 독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나쁘게 쓰고자 했었다. 사춘기 아이처럼. 사춘기를 겪는 누군가가 '나만 그런 것 아니네. 내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구나...' 이렇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여하튼 내 요즘 일기장 속의 나, 내면일기 속 내 목소리와 발행하는 글의 목소리가 일치해야 내가 살 것 같았다.
나는 항상 ‘나의 일기 속 여성’에 놀란다. 《내면 일기》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 중
공교롭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일도 같은 또 다른 책이《리스펙토르의 시간》가 내 손에 들어왔다. 몇 년 전에 아빌라의 데레사《영혼의 성》으 로 논문 쓸 때, 처음에 '여성의 자기 고백적 글쓰기'로 주제를 잡았었다. 그래서 탐독했던 저자가 엘렌 식수였는데. 엘린 식수가 소개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리스펙토르의 소설은 함께 구매해 두고 읽지는 못했다. 읽지는 못했어도 연재 내내 노트북 옆에 부적처럼 세워둔 것이 리스펙토르의 책이다.
글을 쓰다 막히면 에라 모르겠다, 자고 내일 쓰자! 꿈이 새로운 창의성의 길을 열어주겠지, 하며 노트북을 덮는데. 그러고 침대에 누워서는 엘렌 식수의 《리스펙토르의 시간 》 몇 줄을 읽었다. 잠 들기 전, 꿈도 꾸기 전에 무엇이 열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나는 위험에 처한 여자를, 위험한 여자를, 자유롭게 따라가던 중이었다. 글쓰기의 위험에 처한 여자, 글쓰기의 충만함 속에 있는 여자, 위험에 이르기까지 글을 쓰고 있는 여자를. 그 위험은 우리가 원천을 향한 여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위험들이다. 오류의 위험, 거짓의 위험, 죽음의 위험, 무의미에 빠질 위험, 살인에 가담할 위험, 눈멂의 위험, 불의의 위험, 부주의의 위험, 위선의 위험. 우리는 위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찾아 나선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가장 큰 위험은 두려워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렌 식수 《리스펙토르의 시간》
내가 대견하다. 이 16주를 버틴 것. 평생 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 참 대견하다. 그러나 쓰고 읽고 사는 삶이 혼자 잘나서 된 일이 아닌 것을 안다. 앞서 간 여성들이 낸 발자국이 있어서, 그것을 따를 수 있어서 쓰기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겠다. 문득, 아니 마지막 글을 쓰면서, 아니 연재하는 내내 엄마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특히 엄마가 했던 이 말이.
야야, 너 교만하지 말어. 너의 너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여.
엄마, 이제 이 말에 신경질이 나지 않아.
끄덕끄덕... 인정하게 되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 깊이...
여자 엄마, 엄마인 여자가 낸 길을 따라 가는거야.
엄마가 낸 길은 기도의 길이라서,
엄마를 따르다 보면 포기할 수가 없어.
기도는 희망이니까.
엄마가 내 존재에 쏟아 부은 사랑으로
나는 나의 선함을 믿는 것 같아.
내가 싫고 부끄럽고 미워도
결국 나를 포기하지 못하겠어.
이런 내가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이고,
엄마가 준 사랑이야.
이 위험한 세상, 위험하게 사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게.
사랑하며 기도하며 사는 것 말이야.
엄마가 그랬듯...
엄마, 많이 보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