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 토요일 거실 세미나를 했습니다. 세미나 마무리 하는 나눔 시간에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끝내려고 왔는데 더 혼란스러워졌다구요. 자신의 유형을 잘 모르겠다는 말 이상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이 마음에 남아서 며칠 여러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전 같았으면 '더 혼란스러웠다.'란 말에도 '내가 강의를 잘 못했다는 얘긴가보다'하면서 바로 자기비난으로 가져갔겠지만 이제 그 지병은 조금 증상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러 울림을 만들어내니 이번 거실 세미나를 통해 얻은 한 문장닙니다.'나에 대한 고민을 끝내리란 기대로 왔는데 더 혼란스러워졌다.'


2.
생각해보니 처음 에니어그램 배우러 갔을 때 나의 심정이 그러했습니다. 이 오래된, 복잡한 나에 대한 질문에 속시원하게 답을 얻었으면.... 에니어그램이 심오하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그날 이후로 훨씬 더 어려운 내면의 여정을 걷게 되었고, 답은 오히려 더 요원해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게 끝은 아니어서 그 질문을 던지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고 그 여정에서 겪은 고통에 견줄만 한 자유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3.
그 이튿 날이 주일에는 강의
를 요청하는 어느 교회 청년부 임원들을 만났습니다. 강의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나는 연애강의도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끝낸다. 갈수록 쉬운 말은 안 하려고 한다. 연애, 대화, 양육의 기술에 관한 강의만 듣는 것은 궁극적으로 청년들을 더 유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특히 강의 들을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얘기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4.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처럼, 이 시대는 근심하며 돌아서게 하는 말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청년들을 만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순간적인 쉼, 반짝하는 희망을 위해 프로포플 주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겁고 피하고 싶은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보게하는 것. 이것을 나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답을 주는 강의가 아니라 혼란을 주는 에니어그램 강의, 연애 강의를 더욱 두려움 없이 해야겠습니다.


5.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중3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나름 연합고사를 준비하는 입시학년이었는데 국어 선생님께선 여러 번 글쓰기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받은 주제도 썼던 내용도 선생님께 받은 피드백도 모두 기억이 나는데, 첫 번째 주제는 '만남' 이었습니다. 반 아이들이 모두 비슷한 내용을 썼는데 나는 '나 자신과의 만남'에 관한 내용을 썼습니다.
'자신과의 만남'에 대해서 뭘 안다고 끄적였을까 싶지만.... 오래 전 어릴 적부터 '나'에 대한 관심이 있었구나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로부터 두 해 전에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까지 이어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묵은지 수준이었네요.


6.
여하튼, 올해의 마지막 거실 세미나가 여러 모로 좋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모인 분들이 다양했고, 짧은 나눔이었지만 풍성했고, 적당히 무거웠고, 적당히 유쾌했고요. 각자 돌아가면서 나름의 '근심'의 분량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데 그런 기대는 욕심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게 남은 근심이 나를 더 보게했고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었으니 족합니다. 함께 하신 분들의 여정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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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님, 커피 한 잔 주세요_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내적여정1>


저는 키가 난쟁이 똥자루입니다. 양손 엄지손가락은 뭣에 눌린 듯 뭉툭하고, 앞니가 삐뚤삐툴한 리아스식 치아를 가졌습니다. 작은 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편하자고 신는 운동화조차도 높은 굽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게임의 여왕이었으나 엄지손가락으로 숫자 만드는 게임인 ‘제로게임’은 결코 도전해본 적이 없고요. 들쑥날쑥한 앞니는 의학의 힘을 빌어 줄을 좀 맞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웃을 때마다 움찔하면서 입을 다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저의 콤플렉스들입니다. 헌데, 이제부터 공개할 콤플렉스에 비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뭐 그리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음악치료사이며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이고, 목회자의 아내로 청년들을 만나 상담하는 일이 일상인 저. 강의하고 치료하고 상담하는 주제는 거의 가 다 ‘마음, 인간관계’ 이런 것들이랍니다. 그런 저를 괴롭히는, 40평생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제껏 잘도 숨겨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관계’입니다. 제 마음 깊은 곳 은밀한 방에서는 너는 ‘관계의 실패자’이고 언제 누구와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이라며 정죄하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새어나오곤 합니다.



넘기 힘든 관계의 벽, 교.회.언.니.

사춘기를 지나며 정체성과 신앙적 자의식이 새로워지던 시기부터 저를 떠나지 않는 한결같은 의문과 좌절 하나가 있습니다. 왜 학년이 올라가서 반이 바뀔 때마다 싫은 아이가 한두 명 씩 꼭 있는 걸까? 1년만 버티면 되겠지. 어차피 반이 바뀔 테니까 하는 생각은 하나마나입니다. 반이 달라져도 어김없이 또 다른 비호감은 예비 되어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만나는 비호감은 그래도 낫습니다. 딱히 싸운 일도 없는데 사사건건 나를 걸고넘어지는 것 같고, 뭘 해도 예쁘게 보이질 않는, 그러다보니 어느 새 말 한 마디 나누기도 긴장되는 교.회.언.니.에 비하면요. 학교친구도 동네언니도 아니고 교회언니란 말이지요. 주일예배 한 번 드릴 때마다 ‘사랑’이란 단어를 최소 세 번 이상은 말하게 되는 곳이 교회잖아요. 좋게 말하면 신앙의 컬러가 다른 거고, 쉽게 말하면 그냥 이유 없는 비호감이예요. 사랑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좋게 생각해보려는 노력도 해보고요. 대입 시험을 칠 때는 ‘언니, 기도할게요. 축복해요’라고 적은 카드와 초콜릿을 주기도 했고 애써 생일도 챙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눌러놓은 미움과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 편한 친구 하나 앉혀놓고 끝도 없이 그 언니를 씹어대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뭘 해도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일 년에 한 번 있는 수련회의 저녁집회와 기도회는 소망의 시간이었지요. 뜨거운 기도회가 정점을 찍을 무렵 무엇인가에 이끌려 우리는 평소 불편했던 사람을 찾아가 손을 맞잡고 기도했었고, 물론 저는 그 언니와 부둥켜안고 회개와 화해의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미워하지 않으리라. 아~ 이젠 보혈의 공로로 다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리라..... 짜자잔. 그리고 ‘마지막회’ 라는 자막이 올라가면서 저의 이야기가 마치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련회가 끝나면 여지없이 다시 속세(?)로 돌아와야 했고 어떻게든 다음 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가고 있었지요. 안타까운 건 뜨거웠던 기도회의 감동은 어디로 가고 그 언니와는 헌신예배 때 부를 찬양 선곡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다시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은근 걸고넘어지고, 은근 비꼬고, 은근 밀어내기를 다시 반복하는 그녀와의 일상. 그 날의 회개와 화해와 불타오르던 사랑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저는 나이도 먹고, 학벌도 높아지고, 신앙의 경륜이 쌓였으며,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곁엔 이기적인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불편한 시댁식구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 교.회.언.니.가 늘 함께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저의 내면의 목소리는 기로에 섭니다. ‘나는 안 돼. 내가 지금 누굴 치료한다고? 누굴 상담한다고? 나와 상담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치는 이 사람이 내가 어떤 인간인줄 알까? 내 안에 어떤 폭탄이 숨겨져 있는 지 그 실체를 알아도 날 지금처럼 신뢰해줄까? 난 애초부터 밴댕이 속 같이 좁아터진 인간이었어.’ 라면서 자기비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아무 일 없다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오랫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 관계는 ‘내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야. 나는 진짜 열심히 사랑하려 노력했어. 그러나 마음을 열지 않았던 건 너야. 그러니 나는 선한 편이고, 너는 나쁜 나라지. 그런 식으로 사는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복을 받을 일 없고 조만간 큰 코 다치게 될 거야. 오케이! 노우 프라블럼!’ 라면서 책임전가하고 합리화하기.



관계에 있어 좋은 이정표를 만나다 

그.런.데. 자기비하와 책임전가회피를 오락가락 하는 내면의 전쟁 속에서도 끊임없이 양심을 터치하는 어떤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에 대한 희미한 자각은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과 자유함에 이르는 막연한 초청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계라는 무거운 짐에 대한 인식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부르심과 맞닿았고 그 지점에서 목이 말랐고 그 목마름은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날 그 날 잠시 마른 목을 축이며 근근이 살아가는 삶 대신 흐르고 넘치는 생수의 강에 몸을 맡기고픈 영원에의 목마름이었지요. 그렇게 목말라 우물가에 있는 저에게 ‘엣다, 이거 하나 읽어봐라’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처럼 <내 안에 접힌 날개>라는 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펼친 그 책의 서두에 에니어그램은 마치 20여 년 전부터 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제게 도전장 같은 질문 하나를 던졌고 도전장은 초정장이 되어 저를 깊은 내면의 여정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왜 그토록 자주 하나님께로 또는 이웃에게로 향해 나가지
못하고 계속
우리 자신과 부딪히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콤플렉스라고 고백한 문제는 사실 지속적으로 나 자신과 부딪히는 문제였습니다. ‘관계문제’라고 이름을 붙이면 나 아닌 타인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니까 마치 내 마음 바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꼬인 관계’는 엉켜있는 내면을 반사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는 거울은 이제 대놓고 제 내면을 비추어 줍니다. 20년을 끙끙거려왔던 초강력 울트라 콤플렉스는 빙산의 일각이었지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라는 끝도 없는 이기심의 늪을 직면하고 부인하는 과정 없이 이웃에게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부인’이란 그저 ‘화장실 청소와 복도청소가 있다면 나를 낮춰서 먼저 화장실 청소를 선택하는 것, 누군가와 나의 생각이 다를 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조금 더 쿨하게 내 의견을 포기하는 것, 갈등이 일어났을 때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등 주일학교 설교의 결론부분 적용처럼 몇 가지 덕목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니어그램은 ‘부인’은 아는데 ‘자기’는 몰라서 영적 성숙을 향한 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제게 좋은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이 누구인가요?’ 라고 빌 하이빌스 목사님은 묻습니다. 일천한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함께 찬양팀을 섬기던 친구가 내년엔 찬양팀 그만두고 주일학교 교사를 해야 하겠다는데 실은 그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당신 때문이라면, 하루는 맑고 하루는 흐린 종잡을 수 없는 당신의 기분에 모임의 모든 사람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쉽게 말해놓고 일이 닥치면 번번이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김을 빼는 당신에게 당신의 친구들이 기대를 접은 지 오래라면, 밤늦도록 긴 얘기를 나누며 헤어진 당신의 동역자가 ‘저 친구 도통 자기 속을 정직하게 얘길 하지 않아’ 하는 공허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몸이 안 좋아 좀 쉬어야겠다며 사직서를 낸 직장 동료의 진짜 사직이유는 바로 당신의 아무렇지 않게 던져대는 모욕적인 말을 견디기 어려워서라면, 새로이 GBS조를 짜는데 모든 조장들이 내심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기피 조원 1순위가 당신이라면....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나의 진실이라면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 많은 나의 의도하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약점들로 지금 누군가를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다면요. 그리고 나없는 어떤 곳에서 그 모든 얘기가 진실처럼 회자된다면요. 마치 내가 지금 누군가를 향해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무슨 소리냐고?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넌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고
? 저는 이제 최소한 그렇게 다짜고짜 방어하고 부정하는 건 조금 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에니어그램이 준 선물이지요. 어쩌면 나보다 타인이 나의 실체와 특히 약점에 관한한 더 잘 볼 수있다는 것도 인정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힘이 빠지다보니 ‘관계의 문제’는 오늘도 여전히 저의 아킬레스건이지만 조금 숨통이 트이고 살짝 가볍게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이 느껴져요. 문제는 여전하지만 그게 제 발목을 잡고 늘어지게 두지 않는 걸 배웠으니가요. 무엇보다 ‘
, 의 노력, 의 은사, 의 기도, 의 헌신...’ 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서 조금 공간이 생기니 이미 충만히 계셨던, 그렇게도 목마르게 젖어 들고 싶었던 그 분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장을 쓴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여러분을 에니어그램을 통한 내적여정에 초대합니다. 에니어그램과 함께 하는 여정을 위해 다음 달부터 여러분을 저희 집 거실로 초대하겠습니다. 저희 거실은 커피가 있고, 음악이 있고, 책이 있는 북카페 같은 곳입니다. 무엇보다 저희교회 청년들이 딱딱하고 칙칙한 ‘사모님’ 대신 ‘모님’이라고 불러주는 제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볶은 신선한 원두를 정성을 담아 핸드드립 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여러분과 마주앉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제 초대, 받아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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