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관계에 치인 '설날'의 느낌보다 그저 '새해'의 느낌이 강한 설연휴 마지막날에 네팔에 다녀오다.
컨디션 핑계를 대고 썰매 타러가는 나들이에 쏙 빠져서 침대에 뒹굴며 하루만에 일독을 해버린 것이다.
히말라야의 선물.
히말라야의 '말레'마을 열 한 가정의 커피재배 이야기.
커피로드 촬영을 위해 세 달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던 EBS 촬영팀을 따라 갔다오니 커피 한 잔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 달라졌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패션커피로 워킹커피로 우리의 손에 들려진 커피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재배되고 전달되어 왔을까?
커피로드의 길을 따라 하루여행 다녀오니 내가 마시는 맛있는 커피 한 잔의 여유와 고상함은,
사랑하는 남편을 아빠를 이주 노동자로 보내놓고 손이 갈라지도록 커피농사를 짓는 어느 젊은 엄마의 고된 노동과
슬픔이 베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그 커피가 원산지가 어디든 나는 히말라야 고지의 말레를 떠올릴 것이고 그 여러 장의
살아있는 사진으로 수십 번 눈을 맞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꿈과 그들을 슬픔과 커피에 담긴
희망 또한 떠올리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잠시나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를 오늘 아침 마지막 장을 덮었다.
한 달 정도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여행을 마친 셈이다.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신 이후로 2005년 까지 우리나라 다방의 역사를 따라걷는
여행이었다. 자료의 달인 강준만과 그의 제자가 엮어낸 책인 만큼 2011년 서울 명일동 우리집에서 내가 핸드드립을 하여
커피 한 잔 마시기까지 이 땅의 커피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그냥 요약해서 얘기해준다.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로 대변되는 '인스턴트 커피 대국'인 우리나라에 확실히 커피취향이 달라지고 있다.
아, 일단 내가 달라졌으니깐.
우리 동네에도 며칠 지나면 카페가 생기고, 또 생기고, 인테리어 공사했다하면 거의 카페고...
이런 걸 보면 괜히 불안해지고 조급해지기도 하는 게 솔직한 심정.ㅠㅠㅠㅠ
책의 맺는 말에서 강준만이 말한다. '커피는 이제껏 한국인에게 안정된 미학을 보여주는 음료가 아니었다.
차분한 성찰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뭔가 우아하고 고상한 척 하는 효용을 있었을지 몰라도 말이다'
아, 맞다. 내가 핸드드립 커피에 빠져든, 그리고 혹시 내 인생의 진로를 변경하여 뭔가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카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커피가 가진 차분한 성찰의 분위기.
이제껏 나에게든 우리 문화에서든 커피, 카페가 관계맺음과 소통의 도구였다면,
'성찰의 도구와 공간으로서의 커피와 카페는 어떻겠냐는 것이다.
'우리 커피 한 잔 하자' 라는 말도 참 그럴듯 하지만 혼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그림을 어떻겠냐는 것.
그래서 언젠가 트위터에서 영애가 '나 혼자 카페에 있다' 내지는 '나 아메리카노 마시는 여자!'라는 멘션을 날렸을 때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날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지난 12월 커피여행을 위해 원주를 다녀온 적이 있고,
요즘도 기회가 되는대로 남편과 함께 여기 저기 카페를 기웃거리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카페순례 포스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가 맘에 드는 카페가 없어서였다.
커피가 맛있으면 주인이 철학이 없고, 주인이 철학이 있으면 너무 고자세에다 커피를 숭배하시는 것 같고...
원주에 가서도 같이 간 커피동지에게 '철학이 있어야 돼. 카페를 하더라도 철학이 있어야 된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으니...
결론은 JP님이 내려주셨다.
'그래서 당신이 카페를 못하는거야'
ㅠㅠㅠㅠㅠㅠㅠ
맞아. 운명철학 카페도 아니고 철학은 무슨 놈의 철학!
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라떼아트나 로스팅 기술 배우는 것은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고,
그저 난 좀 커피에 관한 망할 놈의 철학을 위해서 더 많이 읽고 공부하겠다는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인 다짐을
해본다. 말하자면 커피 한 잔에 깊은 성찰과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담는 내공을 쌓는달까?
이런 정신실답지 않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그런 의미로 좀 늦었지만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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