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산책에 실패했다. 비가 그쳤나 싶어 나가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비 맞으며 걸을까, 들어가 우산을 챙겨 나올까 갈등하다 생각보다 차거운 비에 집으로 들어오기를 두세 번. 완전히 그친 것을 확인하고 밤산책에 나섰다. 길은 젖었으나 적당한 기온, 적당한 바람에 며칠의 결핍감이 싹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탄천 길 좋다. 아, 좋다.

 

향기로 존재감 뿜뿜하는 아카시아가 코와 눈과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나님, 아카시아 향기가..."로 시작했다는 어머니의 대표기도가 다시 생각난다. 아카시아 향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감성과 영성이 우리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 영혼의 아름다움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어머니는 아카시아꽃이다.

 

탄천에 찔레꽃이 있었다고? 길 오른편에 흰꽃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찔레꽃이다. 몇 년을 산책하며 처음 보는 것 같다. 찔레꽃은 우리 엄만데... 어릴 적 목사관 화단에 커다란 분홍 찔레꽃. 그 꽃을 꺾어 강단을 장식했던 엄마의 똥손이 기억난다. 어린 눈에도 참 볼품없이 꽂았던 것 같은데... 손이 똥손이라고 마음까지 그랬던 건 아닐 텐데. 꽃을 사랑하고, 꽃으로 강단을 장식하던 엄마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 아는 엄마, 나만 기억하는 엄마이다. 분홍 찔레꽃의 기억에 더해 하얀 찔레꽃은 엄마 돌아가시고 울며 울며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이기도 하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밤다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사실 내가 어렸을 적에 좋아하고, 동요대회 나가서 부르기도 했던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고.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우리 엄마는 찔레꽃이다.

 

그렇게 걷노라니 "아, 내일이 어버이날이구나!" 엄마는 안 계시고, 아픈 어머니의 어버이날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는 형편이네. 그리운 찔레꽃 엄마, 그리운 아카시아꽃 어머니... 가슴이 둔탁하게 아프고 흐르지 않는 눈물이 몸 어딘가를 맴돈다. 고개를 떨구고... 그렇게 걷노라니 바닥에 한가득 비에 젖은 토끼풀이 싱그럽다. 땅바닥에 딱 붙어 비 젖은 모습이, 젖었으나 이제 비 그쳤으니 다시 뽀송해질 토끼풀이 꼭 나 같다. 찔레꽃 엄마를, 아카시아꽃 어머니를 그리워 목을 빼고 쳐다보는 나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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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4주기 추도예배를 뉴질랜드 다녀온 주일에 조금 늦게 드렸다. 엄마 얘기 그만 하려고 했는데, 4주기에 맞춰 글을 쓰게 되었으니 좋은 핑계로 당당하게 다시! 거기 쓴 말을 그대로 다시 경험하는 일이 생겼다. 4주기에 엄마가 여러 모양으로 다시 말을 걸어온다. 나는 매일 엄마를 새롭게 만나가고 있다. 이제는 더 조금씩 알아듣고 있다. 엄마가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엄마 없는 하늘,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와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쓰기’로 숨을 쉬었어요.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어요. 슬픔을 드러내면 누군가는 같이 울어준다는 것을요. 물론 위험한 일이었어요. 그만 잊어라, 장수하시고 좋은 곳 가셨는데 뭘 그리 유별나게 구느냐, 믿음의 사람이 천국을 소망해야지... 그런 소리가 이미 들리는 듯했고요. 슬픔 앞에서, 아니 모든 감정 앞에서 다들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허둥지둥 내놓는 위로의 말이 많이들 어설퍼요. 어설픈 말은 ‘아무 말’이 되어 티슈같이 얇아진 슬픈 마음을 찢어내곤 하고요. 엄마, 그래도 내놓기 잘했어요. 상처투성이 알몸을 내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말없이 함께 벗어주는 이들이 있더라고요. 어설픈 말 대신 조용히 자기 흉터를 내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드문 공감과 연결에 힘을 얻었어요. 슬픔을 쓰고, 슬픔을 내놓고, 몰래 눈물 훔치던 손들을 맞잡고 보니 내놓길 잘했구나 싶어요. 그래서 엄마, 나는 엄마를 잃고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의 딸로서는 달라졌어요. 무엇보다 이렇게 새롭게 엄마를 만나고 있잖아요. 엄마도 이미 알고 있죠? <복음과 상황> 4월호 기고글 "그리움을 일깨우는 그리움" 중에서

 

연구소 개인상담 신청을 통해 연락해 온 《슬픔을 쓰는 일》 독자 한 분을 만났다.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했지만 어쩐지 만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있다. 그냥 만났다. 별과 같은 이야기와 함께책 표지를 담은 케잌을 가져오셨다. 감동인 것은, 이것 하나를 가져오기 위한 노고와 마음 씀이다. 슬픔으로 가득찬 그 벗님의 눈과 마음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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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쏟아지듯 빛나는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펠로우십교회 리더십 수련회로 시작한 뉴질랜드의 여행이었는데. 첫새벽에 '일단' 보고 말았다. 캠핑장이라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가느라 잠든 남편을 깨워서 나갔다. 혹시, 하고 무심코 하늘을 봤는데 안경도 끼지 않은 눈인데 이미 반짝반짝...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남섬 여행 둘째 날에 테카포 호수에서 본 밤하늘! 작은 성공회 교회 하늘 위로 사진에서나 보던 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남섬 여행 정보를 이렇게저렇게 주워들으면서 존 맥클린의 <Vincent>를 흥얼거리게 되었었다. 엄마 4주기와 맞물려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자꾸 흥얼거리다 보니 가사 한 문장만 결국 남았는데, 최대환 신부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제는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존 맥클린이 노래한 이 가시 역시 단지 고흐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누군가 떠난 빈자리에서 그 사람의 존재가 더욱 커지고 투명해져, 비로소 우리는 그 존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별 보러 나간 테카포 호숫가에서 꿈같은 저녁식사, 꿈같은 별구경을 하고 돌아온 숙소. 숙소 앞 하늘도 별이 한가득이었다.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 도착한 다음 날 밤에 엄마 꿈을 꿨는데. 엄마가 서 있는 곳에 숙소 앞의 벌판 같았었다. 고개를 젖히고 목이 빠져라 바라보다 툭 말이 나왔다.  "엄마, 이젠 알겠어요. 엄마가 나에게 말하려 했던 것을..." 오늘 보는 별빛은 과어의 빛이라고 한다. 별과 별 사이 먼 거리 때문에 이제야 여기에 다다른 오래전 별빛이란다. 심지어 이 순간엔 이미 우주에서는  사라진 별도 있다고. 얼마나 신비로운가, 별빛은... 별은... 영혼은... 엄마와 나의 만남은...

 

여행 출발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원고가 있었다. "내가 그리은 얼굴"이라는 주제의 <복음과 상황> 4월호 커버스토리 기고글이다. 돌아오니 인쇄된 글이 도착해 있다. 낯선 느낌으로 내 글을 다시 읽었다. 이런 내용을 썼었네... 별은 그리움이다. 그립고 그리운, 그 그리움의 끝이 어디에 닿는지 나는 이제 안다. 

 

엄마와 함께 예원이가 그립고, 예원이와 함께 오래전 천국으로 간 아름다운 청년 한솔이도 그리워요. 한솔이도 잘 지내죠? 엄마,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천국을 그릴 때가 있어요. 그리움은 내 존재에 딱 달라붙어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리운 얼굴들을 가까이 느끼는 방법은 그리운 얼굴을 그리워하는 길밖에 없어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한 구절이 자주 생각나요.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엄마를 그리고, 엄마보다 한참 먼저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그리고, 예원이를 그리고, 한솔이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던 마음이 이제 모든 것을 그리는 마음이 되고 말아요. 그리움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가보면 거기엔 늘 나의 하나님이 계셔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천국에 볼모로 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었어요. 그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 나의 신앙이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리운 모든 영혼들을 가장 빛난 모습으로 품고 계시는 것을 알겠어요. 떠난 모든 이를 향한 그리움은 그분을 향한 그리움에 닿아요. 엄마, 나는 하나님이 그리워요. <복음과 상황> 4월호 "그리움을 일깨우는 그리움" 중에서

 

 

이 노래, 아끼고 사랑하는 버전이 많지만... 오늘은 박정현이 부릅니다.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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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5년 전의 포스팅이라며 올라왔다. 엄마 생신잔치이다. 우리 집에서 내가 생신상을 차려 드렸다. 엄마 생신을 지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저 날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4주기 추도식이 며칠 남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생신을 추도식을 기억하는 봄날이다. 

“맞는 놈이 여기 쳐라, 저기 쳐라 허남? 혀주는 대로 먹는 거지”

이라니... 우리 엄마도 충청도 화법 쩔었었네! 돌아가신 엄마가 웃음을 준다. 5년 전 페이스북에 올렸던 엄마 이야기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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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폭, 순진무궁 우리 엄마(2019년 3월 5일)

생신상 차린다고 떠벌이고 생색 낸 김에 애기가 된 우리 엄마 얘기에 음식 자랑까지 해본다.

#1

딸 채윤이가 외할머니 생신 미역국을 끓여 드리고 싶다고 전날 밤부터 공을 들였다. 엄마랑 통화하며 기분 좋으시라고(미리 감동 먹으시라고!)알려드렸다.

“엄마, 채윤이가 할머니 생신 미역국을 끓였어. 내일 와서 채윤이 미역국 맛 봐.”

“미역국? 나 미역국 안 좋아하는디. 사골국이 좋지!”

#2

이런저런 메뉴를 짜서 장을 잔뜩 봐놓고 엄마를 떠봤다.

“엄마,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 뭐 해줄까?”
“맞는 놈이 여기 쳐라, 저기 쳐라 허남? 혀 주는 대로 먹는 거지”
“그래도 엄마 생신이니까 엄마 드시고 싶은 거 해야지. 뭐 먹고 싶어?”
“뭐 먹고 싶냐고? (침 꼴까닥) 치킨!”

요즘 정말  (평생 입에 대지 않았던) 치킨 피자를 드신다. 여러 번 여쭤봐도 비슷한 대답이다. 우리 집 오는 길에 동생이 마지막으로 물었단다.

“엄마, 치킨! 불고기! 뭐 먹고 싶어? 누나한테 뭐 하라고 해?”
“나? 뭐 먹고 싶냐고? (침 꼴까닥) 짜장면!”

자장면, 치킨을 향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결국 저 음식을 다 차리고 엄마를 위해 치킨 한 마리를 시켰다. (실화!) 물론 치킨은 손주들이 다 먹고. 엄마는 잡채랑, 싫다던 미역국 건더기 없이 국물만 해서 맛있게 드셨다. “우리 채윤이가 끓인 미역국 맛있게 잘 먹었다.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 하셨다.

순진한 애기가 된 엄마는 입맛도 초딩이 되고, 갈수록 빈말을 못하시니 일상이 팩트 폭행인데. 팩트로 한 대 얻어맞으면 바로 큰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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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면 괜한 결심을 하게 된다. 어버이주일 예배시간  "어머니의 넓은 사랑"을 부르거나, SNS 어디서 어버이날 어머니와 식사한 사진 같을 것을 보면 울지 말아야지, 괜한 허튼 결심을 하게 된다. 울만큼 슬프지 않을 것인데, 울만큼 부럽지도 않을 것인데 눈물이 먼저 설레발치는 짓은 그만이야... 하고 결심을 한다.
 
다행히 5월 주일들은 다른 교회 강의가 있어서 온라인 예배로 드리고 하느라 잘 넘어갔다. 6월 어느 수요일. 어느 교회 수요예배에 강의가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어버이 노래' 폭격을 당하고 말았다. 어쩌자고 수요예배 찬양 두 곡이 "어머니의 넓은 사랑"과 "예수 사랑하심은"이었다. 강의 시작 전 한 곡, 강의 마치고 한 곡. 강의 시작 전에 한 번, 강의 마치고 한 번.. 눈물 없이 보낸 5월의 기록을 6월이 깨버렸다.
 
엄마가 살아있다. 엄마 영혼이 나와 가까이 있다. 강의에서 기도나 신앙 얘기를 할 때면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십 번을 말하고 글로 썼던 엄마 이야기가 할 때마다 내게 다르게 다가온다. 엄마가 살아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엔 찬송 부르십니다." 엄마의 기도와 엄마의 찬송이 그렇게 싫었는데... 참 맥락 없다 생각했는데... 그 맥락은 다 '나의 기쁨과 나의 눈물"에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나의 가장 큰 기쁨 나의 가장 큰 좌절이 채윤이 현승이의 웃음과 눈물에서 오는 걸 보니 이제야 알겠다. 
 
엄마를 느낀다. 아주 가까이 느낀다. 아프고, 약하고, 부끄러운 엄마가 아니라 젊고 건강하고 당당하고 현명하고 멋진 엄마를 더욱 가까이 느낀다. 살아 계실 적에 만나보지 못했던 엄마다. 분명 엄마의 영혼이다. 
 

큰 통창을 열고 툇마루 같은 곳에 어떤 여자와 나란히 앉아 햇볕을 받는다.

 
얼마 전 <꿈 집단>에서 어느 벗님의 꿈에 나온 이미지이다. '어떤 여자'는 어떤 여자든 될 수 있겠으나, 꿈꾸신 분에게는 엄마였고, 내게도 엄마로 왔다. 평생 내 발목을 잡는다 여겼던 엄마.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엄마. 내게 사랑도 주고 상처도 주었던 엄마.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데 어느새 엄마처럼 살고 있는 내가 싫어서 더욱 싫은 엄마. 엄마 인생의 결핍을 내가 다 보상해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나를 만들어 왔는데, 그러느라 정작 나를 잃은 것이 원통하여 보기도 싫은 엄마, 내게 하나님을 소개해놓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길만 가르쳤던 엄마.
 
그런 엄마가 보고 싶다. 그런 엄마를 미워하다 다시 만난 하나님이 너무나 따뜻해서... 허점투성이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은데... 그 엄마를 천국에서 만나게 되면 큰 통창을 열고 툇마루 같은 곳에 나란히 앉아서, 존재와 존재로 만나겠지. 찬란하고 찬란한 햇볕을 받으면서. (아이들과 남편이 걸핏하면 내 얼굴이 엄마 같다고 하는데... 갈수록 내가 봐도 정말 그래서... 엄마 보고 싶으면 내 사진 들여다보면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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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또 편지를 보내왔다.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총동원하여 마음을 보내왔다. 책상 앞에서는 뜯어볼 수 없는 편지라, 노트북 뚜껑을 딱 덮고 '봄날 우체통' 앞으로 나가야 했다.
 

2020년 봄은 잃어버린 봄이다. 봄과 함께 색도, 맛도, 생명도, 사랑도 모두 잃었었다. 여러 번 써서 퇴색한 단어이지만, 흑백 세상이었다. 퇴색... 색이 없는 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색이 드러난 적도 있지만, 그럴 때는 상처를 받았다. “꽃 피지 마!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는 건 잔인해!” 그렇게 2020년 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맞은 2021년 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이렇게 아름답다고? 세상이?" 하면서 봄 산책을 다녔다.  엄마를 잃고 얻은 막연한 것이 있었는데, 그 막연한 것은 '영원한 것'과 닿은 것 같았지.

 

꽃보다 엄마

영혼 이제야 나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몸을 입고 인간이 된 이유를 알았다. 죽음으로, 가장 극적인 죽음, 극형으로 '몸'을 버리신 이유를 알겠다. 아주 잠깐 인간으로 사시다 그 몸을 버리고 돌아

larinari.tistory.com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사 53:2)
 
어제 29일, 산책을 나가 먼저 만난 것 연한 순들이었다. 아, 이사야 선지자가 쓴 '연한 순'이란 메타포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름답고 깊은 것이었구나! 살포시 올라온 연한 순에 눈을 맞추고 사진을 찍자니, 요즘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왔다. 그분, 연한 순 같은 분이지. 그런 분이지.
 
엄마의 죽음이 사순시기 안에 있어서 더 큰 선물이 된다. 2022년 봄에는 바흐 칸타타 actus tragicus와 함께 엄마의 때가 얼마나 좋은 때였는지를 생각했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것, 격리된 채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떠나신 것이 어떻게도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바흐 칸타타에 담아 엄마가 보낸 편지였다. 천국에서 바흐와 만나 작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자, 우리 신실에게 부활을 고대하라고, 소망을 불러일으킬 메시지를 보내기로 합시다. 당신의 음악을 좋아하니 적절한 곡 추천부탁이외다."

 

악투스 트라지쿠스(actus tragicus)

3월 11일, 엄마 2주기이다. 엄마 2주기, 코로나 2년. 2년 만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몸도 마음도 죽음에 가까워지는 날에 엄마 2주기를 맞았다. 엄마의 마지막 나날, 요양병원의 '격리'로 함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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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오는 엄마의 편지는 죽음이라는 편지봉투에 담긴다. 죽음의 계절이 오는 편지이다. 예고된 가장 비참하고 찬란하고 죽음,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온다. 꽃망울이 촛대처럼 달린 목련나무가 대부분인데, 벌써 피고 벌써 져버린 목련꽃이 있었다. 져버린 꽃이 슬프지 않다. 아, 슬프지만 다시 찬란한 슬픔이다. 죽음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자, 이제 탄천 길이다. 민들레, 아장아장 걷는 우리 채윤이 첫걸음마를 축복하던 그 민들레다.
 

초점을 맞춰도 맞춰도 도드라지질 않아서 여기까지 찍었다. 저 보라색 꽃의 이름이 좀 충격적인데 "큰개불알꽃"이다. 가만히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보면,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꽃마리인 줄 알았다. 내적 여정 벗 중에 "꽃마리"라고 불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냉큼 톡을 보냈다. 그대의 계절!... 이라고. 꽃마리 아니라고, 검색해 보니 "봄맞이꽃"이라고. 아, 이건 재작년 엄마 무덤에서 본 그 하얀 꽃이다. 기억할게, 봄맞이꽃.
 

바닥에 딱 붙어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이 꽃 이름 뭐예요?" 하기에 당당하게 "꽃마리요!" 했는데... 어떡하지? 아저씨한테도 미안, 벗님 꽃마리한테도 미안. 할 수 없다. 자꾸 이렇게 틀린 이름을 부르며 다시 들여다 보고, 미안해하고 하면서 나의 꽃이 되는 것이다. 그 아저씨 올봄에 꼭 진짜 꽃마리를 영접하시길.
 

처연하게 핀 냉이꽃이 화려한 벚꽃 못지않게 멋졌다. 화려한 자태로 주목받는, 친구들도 많아서 떼로 피어있는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로 피어있는 냉이꽃, 리스펙. 
 

내가 주목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나는 너의 멋짐을 보았어!라는 의미로 다른 냉이꽃 독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얘는 꽃다지. 꽃 이름보다는 내겐 가수의 존재감으로 크게 다가오지만, 오늘만큼은 꽃다지꽃으로만 만나기로!
  

이건 좀 보너스였는데. 더 많은 열매 맺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를 치신다는 주일 설교가 생각나는 장면을 만났다. 여기에 그분의 센스와 익살! 저 멀리 경부고속도로변 간판 글 보시게나. "JESUS LOVES YOU" 사랑하니 가지 치는 거다. 가지치기는 사랑이다... ㅎㅎ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제비꽃. 봄 편지 마지막은 노래로 마친다. 장필순이 부릅니다.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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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봄 하루의 풍경이다.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활짝 핀 매화에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활짝? 길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만났을 때처럼 심쿵했다. 쑥이 제법 많이 올라와 있다. 며칠 전 산책 길과 또 다르다. 저걸 아까워서 어쩌지? 자동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라 관상용이다. 어느 숲에 들어가 저 정도 여린 쑥을 잔뜩 뜯어다 콩가루를 넣고 쑥국을 끓이고 싶다. 고사리 삶아둔 것으로 파스타를 했다. 갈치속젓이 만능 소스이다. 
 
오늘은 엄마 3주기이다. 엄마의 죽음은 팬데믹의 고립으로 왔다. 그해 봄은 애도로 뿌연 시간이었다. 일상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고, 일상을 위해 눈을 뜨는 아침이 괴로웠다. 어느 밤, 문득 마주한 목련꽃에 충격과 함께 깊은 상처를 받기까지 했다. 먹고, 수다 떨고, 걷고... 일상의 행복을 쌓는 일이 그리움과 슬픔을 적립하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겠었다. 한 해 두 해 지나고, 세 번째 봄을 맞으니 기적 같은 하루이다. 매일 내 머리 위를 오가며 "짹짹짹짹, 사랑한다, 사랑한다, 지금 이대로의 너가 좋아" 말해주는 새들, 성실하게 자리를 지키는 풀 한 포기, 하나 둘 피어나는 꽃은 말할 것도 없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조차 고맙고 아름답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살아 있고 건강한 몸이 감사하다. 
 
떠난 지 3년 만에 엄마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활짝 핀 매화로, 고사리 파스타로, 쑥 한 줌으로. 편지 안에는 엄마의 마음과 함께 엄마를 품에 안고 계시는 그분의 숨결이 담겨있다. 2023년 봄, 매일 새롭게 뜯어보는 엄마의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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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쑥불쑥 엄마 생각이 나고,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고, 전화하면 받을 것 같고, 딸이여?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엄마에게 전화 걸어 한없이 울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가 했더니. 휴가 주간이다. 7말8초, 동생네 휴가 기간. 엄마랑 함께 보내던 시간. 밥을 차리다 깨달았다. 내가 저걸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애호박 새우젓 국. 내가 나 먹자고 저걸 만들 줄이야! 정말 엄마 음식이었는데... 나는 입에도 대기 싫은 반찬이었는데... 블로그에 있는 엄마 관련 글은 대부분 매년 7말8초에 쓴 것들이다. 다시 엄마의 계절이다. 전화 걸어서 딱 한 번만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삶의 모든 무게와 아픔이 씻겨 내려갈 것만 같다. "정신실이여?" 이 소리 한 번 들으면. 

 

 

 

엄마와 캬라멜마끼야또 풍의 아이스커피

작년 여름부터 시작해서 주일날 잠깐 열었다 닫는 나우웬 카페에서 선풍기(ㅋㅋㅋ 뭐래니?)같은 인기를 끌었던 '마약커피'를 팔십이 넘으신 엄마에게까지 팔아먹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3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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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호박과 다시다

친정엄마가 오셨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걸 해드리고 싶어도 엄마 입에 맛있는 건 애호박 새우젓국 밖에는 없답니다. 그런 엄마 마음을 잘 알지요. '엄마는 생선살 싫어한다. 뼈만 좋아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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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장면이 좋다고 하셨어

나물과 자장면 동생네 휴가, [동생네 엄마 어린이집]이 불가피한 휴원이다. 자동으로 [누나네 엄마 어린이집] 잠시 문을 연다. 아기가 된 엄마가 집에 오셨다. 공교롭게도 우리 집 네 식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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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하룻밤_실시간 중계

'엄마'라는 애기를 키우느라 꼼짝 못 하는 동생네가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갔다. 엄마 애기를 돌보러 동생 집에 와서 하룻밤을 지낸다. 이런 일로 동생이 부탁해오면, '싫어. 얼마 줄겨?' '뭐 해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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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엄마 2주기이다. 엄마 2주기, 코로나 2년. 2년 만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몸도 마음도 죽음에 가까워지는 날에 엄마 2주기를 맞았다. 엄마의 마지막 나날, 요양병원의 '격리'로 함께 하지 못했는데. 2년이 지나고 내가 '격리'되어 추도 예배도 무엇도 하지 못하고 보냈다.

위로와 이끄심은 의외의 길을 따라 온다. 대학원에서 <음악을 통한 영성>이란 과목을 듣고 있다. 강의와 선곡으로 엄마 2주기를 기리고, 죽음을 묵상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 Bach의 칸타타 ‘악투스 트라지쿠스(actus tragicus)'다. ‘장송 음악’으로 불리는 이 음악의 원제 ‘악투스 트라지쿠스(actus tragicus)'는 '죽음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질문해온다'고 신부님(교수님)은 강의안에 쓰셨다. 이 곡을 듣고 또 들으며 3월 11일 하루를 보냈다.

곡의 시작은 아름다운 소나티나이다. 그리고 합창곡이 등장한다. 제목은 하느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다다르는 인생의 종착지,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내적 평화가 담긴 한 문장이다. 합창은 이어서 사도행전 17장 28절과 시편 90편 12절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어진다. 신부님의 강의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어 나오는 합창은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차원을 교차로 들려줍니다. 바흐는 이를 구약과 신약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구약, 곧 옛 계약의 준엄한 진실을 일깨우면서도, 예수님이 오기를 청하며 조건 없이 “예”라고 응답하며 희망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루카 23,46)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인 바흐에게 죽음이 구원이자 위로이며 희망이 되는 근거입니다.


바흐는 십대 초반에 부모님을 잃었고, 사랑하는 첫 부인을 일찍 잃었고, 열두 명의 아이를 서너 살이 되기 전에 죽음으로 또한 잃어버렸다. 부모를, 아내를, 어린 자녀들을 죽음으로 잃고 잃었던 고통이 바흐 음악 곳곳에 흐르고 있다. 죽음의 여러 얼굴이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흐른다.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지만, 슬픔과 분노에 매몰되지 않는 바흐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바흐는 깊은 슬픔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천천히 빛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교수님이 또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니라.

 

 

이제는 알겠다. 2년 쯤 시간의 거리를 두고 엄마가 떠났던 시간을 바라보니, 가장 좋은 하나님의 때였다. 엄마에게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이고, 가장 좋은 때이다. 만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기쁨이 오는 때도 하나님의 때이고, 헤어지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때도 하나님의 때이다.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니 눈물이 난다. 바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곡을 만들었을까.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하느님이 뜻하신 대로
내 마음과 정신은 위로를 받았네
부드럽고 고요히 하느님이 약속하신 대로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

 

 

마지막 알토가 부르는 아리아는 루터의 찬송가 가사이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시므온의 노래(눅 2:29)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과 안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두 늙은 예언자를 읽을 때마다 늙은 엄마를 떠올렸었다. 과부가 되어 팔십사 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안나는 꼭 엄마 같았다. "평화롭고 기쁘게 나는 떠나네... 죽음은 나의 잠이 되었네" 시므온의 노래, 안나의 노래, 엄마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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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갓집 막내며느린데, 심정적으론 맏며느리로 살았다. 거듭되는 명절을 통해 단련된 23년 차. 막내며느리, 맏며느리 상관없이 대한민국 며느리이며 딸이며 여자는 엇비슷한 짐을 지고 산다. 곡절없이 지나는 명절이 없다. 명절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문제다. 구조를 파계하여 며느리 명절을 잘 지내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 산소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채윤이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외할머니한테 가자." 명절 오후, 사랑의 의무 또는 의무의 사랑의 짐을 내려놓는 시간에는 엄마에게 갔었다. 그리 편하진 않았었다. 명절 음식을 차려놓고 맞아주는 친정엄마가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며느리를 착취함으로 생존하는, 전적으로 의존된 엄마였다.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 집에 모여든 친정 식구들은 엄마 며느리에겐 또 다른 부담이었다. 딸의 정체성으로 친정을 찾는 마음도 편하진 않았었다.

 

눈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조금 다른 풍경이라서. 불과 2년의 시간이지만, 뻔한 감정이 되기에는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뻔한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고, 그저 엄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냥 엄마를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 이제 막 엄마를 잃은 느낌이었다. 눈 덮인 세상이 평온하니 조용히 흐르는 눈물 몇 줄기를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맛있는 디저트를 즐기기로 했다. 적당히 슬퍼하고, 주어진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달리는 길. 철새로 추정되는 어느 가족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혼자 내려 조심조심 다가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가족, 퍼드득 자리를 뜨고야 만다. 덕분에 날아오르는 더 나은 순간을 포착했다.

늦은 점심으로 먹어 더 맛있는 칼국수, 핸드드립 커피와 장인이 구운 빵도 좋았다. 내 마음엔 또 다른 시간의 강이 흐른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있다. 이제야 슬픔이 무엇인지 알겠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니까. 이것이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인데, 갈수록 누구와도 나눌 수는 없는 감정이다. 가족은 물론 같은 엄마를 잃은 동생과도 말이다. 동생이 평생 만난 엄마와 나의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으니. 엄마 돌아가시고 매일 새롭게 다른 엄마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엄마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천국에 있는 엄마 영혼은 매일 매 순간 내가 모르는 새로운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 참. 엄마만 살아 있으면 지금을 살아내느라 힘든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것 깉은 환상이라니.

엄마, 거긴 어때? 거기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롭지? 여기랑는 딴판이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고 지옥 가는 모든 길이 지옥이라고 시에나의 카타리아 성인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매 순간을 새롭게 살아야 엄마 있는 그곳에 닿을 텐데... 엄마, 새로운 시간을 살자고 마음을 새롭게 하니 새롭게 엄마가 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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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같은 표현이지만 "백만 년 만에" 결혼식에 다녀왔다. 조카 결혼식이다. 막내 외삼촌을 뵈었다. 보기 드문 좋은 노인이시고, 좋은 노인이 되시기 전부터 그냥 좋은 외삼촌이었다. 우리 엄마와 제일 마음이 잘 통하던 분이기도 하다. 엄마 노년에 침대에 누워서도 전화로 연결되어 있던 막내 동생이고. 좋은 부모가 계시면 늘 그렇듯, 삼촌의 자녀들끼리도 화목하다. 사촌 언니 오빠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신 외삼촌을 발견하고 달려가 인사를 드렸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눈만 보였다.  "삼촌!"하고 달려갔다 얼음이 되고 말았다. 엄마다! 엄마의 눈이다. 어쩌면 그렇게 엄마의 눈이다. "삼촌, 건강하시죠?"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식이 진행되고 식사하는 중에도 힐끗힐끗 삼촌 계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꾸 마음이 꿀렁거렸다. 식사 마치고 다시 삼촌께 갔다. 진정이 많이 된 상태다. 삼촌이 그러신다. "신실아, 너는 엄마랑 똑같구나!" 도대체 이 결혼식에 우리 엄마가 몇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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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이제야 나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몸을 입고 인간이 된 이유를 알았다. 죽음으로, 가장 극적인 죽음, 극형으로 '몸'을 버리신 이유를 알겠다. 아주 잠깐 인간으로 사시다 그 몸을 버리고 돌아가신 이유를 알겠다. 함께 먹고 자고, 몸으로 부대끼던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 무력하게 끌려가신 이유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를 알겠다. 두려움과 호기로움 사이 좌충우돌하던 베드로의 인격이 변형되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수치스럽게 통과한 베드로가 그 새벽 자기혐오 속에 헛 그물질을 하는 그 심정을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불을 피우고 아침을 준비하며 따뜻하게 맞아주신 선생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그 수치스러운 지점을 짚어내시더니 용서 너머 부탁을 하시는 선생님. 그리고 나서 떠나신 선생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의 부재 속에서 베드로는 비로소 가르침을 새록새록 알아듣고 그분의 못다한 삶을 대신 살 수 있게 되었다. 있다 없어진 몸, 그 물성이 사라진 공간은 얼마나 큰지! 있다 없어진 그 빈자리가 드러내는 존재는 얼마나 또렷한지. 그 가르침은 또한 얼마나 명료한지. 2021년 사순기간에 나는 몸과 영혼을 새롭게 알아듣는다. 

 

사라짐

 

바쁠 때는 한 달 정도는 엄마랑 통화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한 달이 뭐야. 김포 현대프라임빌 1층 그 방 그 침대에 엄마가 여전히 누워 졸고, 가끔 일어나 기도하고, 다시 졸고 있을 거라면 1년 동안 통화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지냈다. 전화가 좀 뜸하면 바로 태클 들어오는 시어머니는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는 늙어서 섭섭해 하지도 않는 엄마다. 괜히 허하고 마음 둘 곳 없어 전화하면 "얼라, 우리 딸이네. 바쁜디 전화를 혔네." 하는 순진이 무궁한 엄마. 연세가 드셔서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이틀 사흘의 시간 개념이 모호해진 것도 무심한 딸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크게 죄책감이 들지도 않았다. 엄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었을까. 

 

존재함

 

엄마와 함께 한 하늘 아래 살던 52년인데.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던, 아니 공기처럼은 아니다. 가끔 좋고, 자주 성가신 그런 존재니까 공기나 하늘 같은 존재는 아니다. 어쨌든 엄마는 52년 동안 있었던 엄마다. 없는 엄마와 1년을 보냈는데, 52년보다 더 많이 엄마 생각하며 지냈다. 없어진 엄마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없어져서 세상이 이렇게 됐는지도 몰라. "있을 때 잘할 걸." 이런 말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엄마가 다시 살아와도 잘할 자신은 없다. 예수님이 딱 33년, 그것도 30년은 숨소리도 안 내고 계시다 3년 반짝하고 떠나셨다. 그래서 기독교가 잘 되는 거다. 몸을 너머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다. 그분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알아들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분께 배운 걸 전했고, 그러다 그분처럼 조롱당하고 버려지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거다. 나도 엄마의 부재를 절절하게 느끼며 몸 너머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무덤

 

엄마 무덤은 가난하다. 시립추모공원 안에 있고, 딱 한 줌으로 남은 몸을 담은 한 주먹의 땅을 차지한다. 엄마 떠난 지 1년이 된 날에 엄마 무덤에 갔다. 주말에 이미 추도예배를 드렸다. 2월부터 내내 동생과 통화하며 울고불고했던 터라 '당일'을 기념하는 것도 벌쭘하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 3월 11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엄마 무덤에 다녀왔다. 혼.자. 라는 말에 왜 이리 에너지가 들끓는지. 남편이든 동생이든 함께 해주길 기대하면서도 혼자 가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엄마, 같이 갈까?" 하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지만 혼자 가야 했다. 실컷 울려고 했는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꽃

 

엄마와 나 사이, 우리 둘만의 끈이 있다. 평생 엄마와 사이가 더 좋았던 건 동생이었고, 엄마는 나보다 동생을 더 착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여기긴 했지만. 동생이 엄마를 헤아리는 마음이 나보다 깊고, 내가 넘볼 수 없는 동생과 엄마 사이 끈끈함이 있지만... 나와 엄마 사이 그 무엇이 있다. 엄마의 초라한 무덤가에 가만 혼자 앉아 있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와 엄마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내 몸과 영혼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엄마 떠난 이후로 이렇듯 삶이 텅 빈 느낌인 것은 내가 엄마고, 엄마가 나라서, 내 삶이 엄마의 94년 삶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엄마의 삶 그 이상을 살지 못할 것 같다. 엄마 만큼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생, 아니 한때 치우고 싶지만 치울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끄러운 존재였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45세 쯤 되었을 때, 깨달았다. 엄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엄마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 엄마는 걸림돌이 아니라 내 인생 디딤돌이었다는 것. "엄마, 내가 엄마야. 엄마가 살지 못한 삶을 잘 살게. 말끝마다 예수님을 달고 살았지? 말만 그렇게 하면서 삶은 그렇지 못하다고 내가 무시하고 조롱도 많이 했어. 엄마 정말 무시 당하기 딱 좋은, 푼수 같은 사람이야. 그래도 착한 마음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생을 감사하며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어. 엄마처럼 살래.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처럼 있는 그대로, 분수를 따라 살래. 엄마처럼." 

 

엄마 돌아가시고 익히 알던 '영혼'의 존재를 더욱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믿기로 했다. 거부하지 않고 순간순간 감동하기로 했다. 몸과 말, 말과 행동, 행동과 생각 너머 사람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순간순간 빛나는지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기로 했다. 아빌라의 테레사 말씀처럼 "영혼이 지니고 있는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그 위대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건 엄마가 남긴 자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작년 2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엄마를 걸어두고 "빛나는 영혼"이란 상태 메시지를 적어 두었었다. 아, 그때도 알고 있었다. 망가진 몸 때문에 더욱 찬란하게 돋보이는 엄마의 영혼을. 

 

작년 장례식날엔 그렇게 추웠는데. 비석을 하러 갔던 날도 차겁고 거센 바람에 머리가 쪼여 두통이 올 정도였다. 추모공원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쑥이며 냉이가 군데군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날은 따뜻하고 메마른 잔디 사이 손톱만 한 초록이들은 보잘것 없이 예뻤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볼펜심 정도나 되는 하얀 꽃 한 무더기가 피어 있었다. 냉이 비슷한데, 이름을 알 수 없다. 우리 엄마 무덤가의 하얀 꽃. 이름 없는 하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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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추도식이다.

가족 모임도 삼가야 하는 코로나 19 엄혹한 시절, 그냥 넘어가는 것은 어떤가 생각했다. 39년이나 지난 일 아닌가. 한 번쯤 각자 집에서 예배드리면 어떤가 하는 얘기도 오갔다. 결국 모인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얼굴도 보지 못한 손주들에게 아버지는 기가 막힌 선물을 안기신다. 아이들에 할아버지(외할아버지) 추도식이 송년 축제와 같다. 기말고사 마치고 겨울방학과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맛있는 것 먹고 노는 날인 것이다.

 

“아버지 추도식인데 엄마 생각하고 울기 없기!”

 

고민 끝에 모이기로 결정하고 동생이 한 농담이다. 이걸 들은 우리 애들은 “삼촌 자신에게 하는 말 아니야?” 했다. 농담이 예언이 되었다. 예견되는 일이었으니 예언도 아니다. 이번에 모이지 말지, 모이지 말까, 나도 자꾸 이랬던 이유는 아버지 추도식이 엄마 추도식 될 것 같아서였다.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엄마 집 가는 길을 다시 달리는 것, 현관문 열고 엄마 방 앞을 지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 추도식에 엄마 그리워 울고 와서는 다시 3월로 돌아간 듯, 생기가 빠져나간 몸이 되었다.


 

 

 

해마다 추도식 마치고 찍은 사진 속에 엄마가 있다. 셀카로 가족사진을 찍기도 하고 성경 암송하는 엄마가 담기 영상도 있다. 이미 늙은 엄마가 한 해 한 해 조금씩 더 늙어가는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들이 있다. 아기들이 자라서 청소년이 되는 활기찬 변화보다 가운데 앉은 엄마나 더 부각되어 보인다. 엄마는 씬스틸러다. 이번에도 습관처럼 예배 후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다. 해마다 우리와 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리던 엄마. 이번에 이쪽이 아니라 그쪽 편이 되었다. 엄마 꽃을 뺏겼다. 혼자 외롭게 있던 아버지 편이 늘었다.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이옥금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났을까? 엄마랑 아버지랑 행복할까? 아버지 추도식을 지내는 우릴 지켜보고 있을까? 둘이 손 꼭 잡고 우리가 부른 찬송 소리에 귀 기울일까? 농담하고 깔깔거리는 걸 보며 아버지는 “간나 새끼!” 하며 따라 웃을까? 엄마는 바로 작년까지 함께 앉았던 이 자리가 그립진 않을까?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을까?

 

2년 전 아버지 추도식이었다. 아이폰이 만들어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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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에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추석, 설 명절에 흔하디 흔했던 장면들,
꿈만 같다.


생후 10개월 증손자와 95세 할머니가 눈을 맞췄다. 한 세기 가까운 나이 차이다. 사람을 알게 되면 이름부터 물어보고, 그 이름을 성경 안쪽에 적고 굳이 ‘이름’ 불러 기도하던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외우니 적을 필요도 없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손녀 ‘지영이’가 낳은 ‘준우’의 이름은 듣자마자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귀도 눈도 어두워 정확히 들을 수 없고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새로운 단어가 입력되지 않는다. 준! 우! 준우! 주누! 고래고래 알려드려도 입력불가. 자꾸만 ‘아가, 아가~아’ 손을 내밀어 보는데 아가는 엉덩이를 뺀다. 아가는 아가대로 10개월 뇌로는 백발이 규명되지 않는다. 마주하면 무조건 좋은 우리 엄마랑 뭔가 비슷한데, 결정적으로 하얀 저건 뭐지? 못 보던 생물첸데. 아가, 아가, 손! 슬금슬금 엉덩이 빼기. 내내 그런 줄 알았는데 제 엄마 지영이 카메라에 이런 장면이 담겼다. 하얀 할머니 머리, 헤~ 바라보는 준우 눈빛. 백발 할머니의 표정은 안보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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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일이다.

명절이라고 명절 음식 먹은 게 1도 없는데,

명절 저녁에 기름기 없는 깔끔한 음식을 먹고 싶으니.

52년 몸에 쌓인 명절 음식이 때맞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냐.

명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추석 저녁에

며칠 기름진 음식 먹은 느낌으로 풀밭 밥상을 차렸다.

 

희한한 일이다.

명절에만 엄마를 보던 것도 아닌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만 들어도 엄마 생각이 난다.

탄천을 걸으며 아무 자극 없는데도 엄마가 보고파 눈물이 난다.

목까지 슬픔이 가득 찬 것이, 다시 3월이 온 것만 같다.

엄마가 보고 싶다.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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