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일 년 전에 남편이 잡아끌어 다녀왔던 통영이다. 거절할 힘은 없고, 무력하게 따라가긴 싫었던지 '도다리 쑥국'을 명분으로 내세웠었다. "그래, 어디서 통영 도다리 쑥국 봤는데 먹고 싶더라" 뭘 먹고 '싶다'는 말이 낯설고 생소한 시간이었으니 그럴듯한 이유가 되는 것 같았다. 오직 도다리 쑥국만 생각하고 간 통영에서 운명처럼 만난 것은 동백꽃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들어선 공원에 동백꽃이 한창 피고, 한창 지고 있었다. 툭, 꽃봉오리 째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이 훅 가슴으로 들어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즈음은 우는 게 일상이었으니 언제 어디서 울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찬란한 슬픔'이라 이름 붙인 그 동백꽃을 다시 만나러 간 것이다. 일 년 전 그 통영에서 올라오면서 남편과 약속했었다. "내년 이맘때 또 오자!" 믿을 수 없는 시간, 1년이 지났고 남편 대신 채윤이와 다녀왔다. 올해는 오직 떨어져 누운 동백꽃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1년 전 그 통영은 없었다. 작년 바로 그날인데 동백꽃은 죄 지고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응달에 선 키 작은 동백나무가 뒤늦게 피어난 한두 송이 꽃을 지나친 푸르름으로 안고 있는 정도였다. 내 가슴에 파고들었던 그 찬란한 슬픔, 붉은 그리움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도다리 쑥국도 맛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바닷가를 하염없이 걷기로 했던 여행 이튿 날엔 최악의 미세먼지로 실내를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은 정도였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기억을, 경험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면 그게 차라리 기적이고, 그걸 기대하는 것이 환상일 테니까.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공간, 물리적 조건을 완벽하게 복사해놓았다 해도 내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작년 남편 손에 이끌려 통영에 갔을 때는 세상이 그저  흑백이었는데, 올봄 나는 이 연둣빛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감동에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 않은가. 매일 산책하며 하루 분량의 짙어지는 생명의 빛에 감탄하고 있다. 작년 오늘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금 오늘의 나다. 

 

엄마 1주기를 기념한 통영 행이었지만 어째 엄마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동백꽃도 없었고. 차라리 그 1년을 버티고 살아온 나, 오롯이 나를 위한 이기적인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는 편이 낫겠다. 딸 채윤이가 든든한 조수로 함께 했다. 조수석에 앉아서 장거리 운전에 피곤하진 않은지 살피고. ("엄마, 피곤해? 졸리지 않아?" 살피고 살피다 갑자기 제가 곯아떨어지긴 했지만) 미세먼지로 해변 산책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특유의 지리 감각을 발휘하여 지도 검색을 하더니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안내하기도 했다. 나가사키의 소토메 마을 같았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파랗습니다." '침묵의 비'가 있는 엔도 슈사쿠의 그 마을 말이다. 슬프고 슬픈 인간의 실존도, 푸르를 뿐인 바다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인간의 슬픔의 늪을 헤매고 있는데 아랑곳없이 푸르른 바다가 야속하기도 하지만, 내 슬픔이 어떠하든 무덤덤하게이 제 생긴 모양을 지키는 바다나 자연은 고맙기도 하다.

 

채윤이가 가보고 싶다는 독립서점을 찾아 갔다. 주소 찍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는데, 어머! 작년 남편과 함께 와서 걸었던 벚꽃 길이다. 꼭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찾으려 했어도 어려웠을 텐데. 동백꽃 대신 화사한 벚꽃이 맞아주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벚꽃이 반겨주었다. 통영에 갈 때마다 관광 안내지에서만 봤던 '윤이상 기념관'에 들렀다. 미세먼지 몰려오기 전이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햇살 좋은 야외 공원을 걸었다. 한 아이가 눈 앞에서 통통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내게 다가와 벚꽃 몇 송이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는 통통 뛰어 벌써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다. 내 손에는 작은 벚꽃 다발이 들려져 있고.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 같았다. 작년 어느 공원에서 눈 앞에 펼쳐진 붉은 동백꽃의 향연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1년 만에 같은 자리에 서보니 지나온 1년이 아득하기만 하다. 그 흑백의 시간을 어떻게 헤쳐왔단 말인가. 어떻게 헤쳐나와 오늘 이렇듯 흩날리는 벚꽃에 감탄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렇게도 아무 걱정 없이 채윤이와 달착지근한 수다로 시간을 보내고 있단 말인가. 슬픔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다. 일 년 전 통영과 오늘의 통영. 뚝 떼어놓고 보니 또렷한 변화이지만, 어디 하루아침의 일인가. 작년에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산도를 바라보며 남편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 집 거실과 안방 침대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두려워. 거기서 견뎌야 할 시간이 막막하기만 해". 거실과 안방 침대에서, 다시 꼼짝하지 않고 지낸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이 있어서 다시 만난 통영의 봄이 새로운 것이다. 일 년의 '오늘'을 견디고 얻은 오늘이다. 엄마와 함께 했던 52년보다 엄마 생각을 더 많이 하면 지낸 일 년이다. 엄마의 몸이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의 존재는 더 커졌고, 투명해졌다. 거실과 안방 침대를 피하지 않고, 아니 피할 곳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울고, 그리워하고, 잠든 날이 쌓였다. 엄마가 남긴 것들을 또렷하게 느끼고 있으니 몸은 떠났지만 빛나는 영혼으로 존재하는 엄마와의 연결이다.

 

통영 다녀온 다음 날이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중이었다. 주유원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자동차 뒷 창에 붙인 세월호 노란리본에 딴지를 걸었다. "저걸 아직도 달고 다녀요? 언제 적 세월호야? (쯧쯧)" 익숙한 상황이다. 짧은 순간 여러 생각과 말이 스치지만 무반응으로 지나치곤 한다. 표정까지 무반응일 수는 없었나 보다. 내 표정을 살피더니 '아, 고객님이지!' 싶었는지 힘이 쫙 빠져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아니, 이제 잊어야지 뭐...." 했다. 안전핀이 뽑혔다. 뭔가 치밀어 올랐다.  잊으라니, 이제 그만 잊으라니. 분노, 설움, 슬픔... 한꺼번에 폭발할 것 같았다. 저 입 다물게 할 말이 무얼까. "내 아이예요. 내가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라고요!"라고 할까? 아무 말 못 하고 차에 올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잊으라니, 잊으라니... 잊을 수 없겠구나, 결코 잊을 수 없겠구나, 잊은 게 아니었구나! 멀쩡하고 즐겁게 통영 다녀온 것은 엄마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텅 빈 마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기에 그저 그대로 끌어안고 사는 것이지. 잊어서는 아니다. 잊지 못할 것이다.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으며, 애도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한 것'이라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을 알아듣는다. 동백꽃이 벚꽃이 되고, 봄이 여름이 되고, 1주기가 2주기, 10주기가 되어도 애도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침표 없는 애도, 잊지 못함은 엄마와 나를 새로운 끈으로 연결한다. 새롭게 잊지못할 때 새로운 만남으로 엄마를 다시 만난다. 엄마의 빛나는 영혼을 만난다. 나 또한 이 작은 몸을 떠나 영혼으로 남을 때, 영혼과 영혼으로 엄마를 만말 그때까지 애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잊지 못할 것이다.

 

 

 

 

 

통영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채윤이가 그림을 그렸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하고 보니 엄마 품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 쿵, 하고 좋았다. 

 

 

 

 

교회 말씀 묵상을 나누는 밴드에 남편이 올린 글이다.

갈 곳 없는 어버이날에 기억이 감사가 되는 묵상이다.

'어버이 은혜 감사' 너머 '하나님 은혜 감사'로 멀리 높게 바라보게 된다. 

 

<5월 8일 금요일>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 (김종필)

오늘의 말씀 : 열왕기하 4:1-7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예언자 수련생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별과 가난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노예 삼으려 합니다.
이 미망인의 고통과 슬픔의 무게가
갑자기 제게 전이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기름 한 병을 붙드시니,
빚도 갚고 생활비도 되고
아들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지만, 제 상상력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망인의 남은 인생은 비록 가난과 고난이었지만,
두 아들은 착한 아내를 얻고
신임을 얻어 하나는 포도원 관리 책임자가 되고
하나는 아버지를 따라 예언자 수련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습니다.
미망인의 생은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그녀는 많은 새벽을 바치고
모든 상황을 바치고
두 손 위에 올려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미망인이 받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부와 권력은 아니었지만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가난한 두 아들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장모님이 생각납니다.
목사였던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딸, 아들 둘 데리고 가난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빈자리는 영예로운 믿음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기름 한 병에 담긴 은혜를 생각하다
가난과 고난이 역전되어 은혜와 영예가 된 장모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버이날, 이제는 카네이션을 드리지 못하지만,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미망인에게 부어주신 기름 한 병의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이우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다. 편집된 과거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월이 만드는 거리는 그때 그 사건을 달리 보게 한다. 엄마 죽음이 불러낸 아버님의 죽음은 다시 개정판이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몸이었다는 것이 떨쳐지지 않는 고통이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었던가 싶다. 1주기 즈음 쓴 글이 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실었던 '아버님의 소주잔'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버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구나 싶다. 아버님의 소주잔은 내 마음에 살아 내 종교적 독선에 찬물을 끼얹어 일깨우고 있다. 채윤이와 현승이가 이렇게 잘 큰 것은 착한 할아버지 덕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헌신이었다. 오늘 내 일상에 아버님의 삶이, 그렇다 '삶'이다. '죽음'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계신다. 어제 쓴 글과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나름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확대하고 축소하며 반복되는 기억, 편집된 과거를 한 번 더 읽어주시길.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 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아,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한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 남보다 수월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필요할 땐 언제든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받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 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는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아,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가만히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손을 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 였던 내게 든든한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일 ‘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 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 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이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 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엄마 이옥금 권사님이 지난 3월11일 새벽 4시45분 소천하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여러 어려움 감안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장례를 마쳤습니다. 아주 짧은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식만큼 긴 장례식은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재난처럼 밀려든 아버지의 죽음이 삶을 뿌리째 흔들었고, 그때로부터 죽음은 늘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공포였습니다. 엄마의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죽음을 상상하고 마음에 장례식을 꾸렸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엄마의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저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더했습니다. 저는 엄마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생을 키우고 교육시킬 책임감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으니. 어릴 적부터 죽음을 짊어진 삶이었습니다. 평생 마음에 상복을 준비하고 사는 셈이었으니 얼마나 긴 장례식인지.

80세가 되기 몇 년 전부터 엄마는 ‘하나님이 나를 80에 불러 가실 것이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0세가 되는 해, 하루 전날 12월 31일에는 동생과 함께 “엄마, 내일 천국 가네. 잘 가 엄마, 송구영신 예배드리고 늦잠 잘 수도 있으니까 지금 인사할게.” 놀리기도 했지요. 엄마의 죽음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만큼 저도 동생도 단단해졌습니다. 80세, 85세, 87세 천국 가는 기도 응답이 자꾸 연기 되더니 엄마의 인사에 관용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고맙다. 복 받어라.” 80세 천국행 기도응답은 노구의 엄마가 짐이 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론 워낙 기도가 센 분이라 엄마가 정해놓은 시간마다 혹시, 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80세부터 16년 간 또 다른 장례를 준비시켰습니다.

지난 2월 초에 사고로 응급실로 가신 이후 엄마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노인요양병원에 한 달여 계셨는데, 생애 가장 애달픈 한 달이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면회를 할 수 없어 외롭게 홀로 누워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쪼여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 말씀을 잘 하시던 입원 후 20여 일, 매일 동생이 전화하여 시편23편을 외우시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연결이었습니다. 또렷이 끝까지 외우셨습니다. 3월2일, 상태가 안 좋아져 응급실로 나오셨는데 그날 잠깐 엄마를 만났습니다. 숨 쉴 기력 밖에 없는 엄마에게 “엄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해 줘.” 한 마디에 가쁜 숨과 함께 또 외웠습니다. 엄마 목소리로 듣는 마지막 시편 23편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삼일 전, 병원에서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엄마, 신실이 왔어. 엄마, 엄마” 말씀도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집에 오는 차안에서 엄마 곁에 있는 동생이 전화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울기만 하다 저도 모르게 찬송을 불러드렸습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먼저 가신 이모들.... 엄마는 임종 전문가였습니다. “숨넘어가는 순간이 옆이서 울지 말고 찬송 불러드려야혀.” 하시던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찬송하니 엄마가 눈을 뜨고 반응하며 심지어 입을 달싹거리셨습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동생이 가서 전화하고 제가 찬송하고 엄마는 호흡으로 함께 하고. 셋이 그렇게 엄마가 사랑하던 찬송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오후에는 입을 달싹달싹 하며 따라 부르시고 찬송을 마친 후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엄마에게 불러드린 마지막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은’입니다. 어린 손주들에게 마르고 닳도록 불러주신 노래입니다. 졸저 『신앙 사춘기』를 탈고하고 남편과 함께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예수 사랑, 떠나서 다다른 사랑’이란 곡이고. 엄마의 찬송과 시편 암송하셨던 육성을 담아 영결예배에 불러드렸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엄마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맑은 정신, 총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계셨지요.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며느리에게 늘 물으셨다고 합니다. 거의 침대에서 생활하시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지남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아셨지요. 요일은 오직 주일 11시 예배를 향한 정신이었지요. 그 지향이 엄마의 정신을 건강하게 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지만 엄마가 그렇게 사모하던 목사님을 모시고, 엄마가 사랑하시던 두 동생, 그리고 엄마를 좋아하던 조카들과 조촐한 예배 드렸습니다.

 

 

39년 전, 아버지 장례식, 목회하던 교회 예배당에서 드렸던 영결예배를 떠올립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 일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갈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던 남매였습니다. 엄마의 영결예배에선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영예롭게 엄마를 보내드렸습니다. 어른이 되어 엄마의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저는 노래했고, 동생은 엄마의 96년 인생과 마지막 시간을 들려주었습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머감각과 따스한 연민을 잃지 않고, 엄마가 남긴 모든 이들을 영예롭게 함으로 엄마를 영예롭게 했습니다. 평생 예배만 사모하던 엄마에게 걸맞은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장례식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나긴 장례식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오지도 않은 엄마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온 삶. 제 인생 가장 벗어나고 싶었고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 저를 만들고 지켜내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떠올리며 울고 또 울어야 할 장례식이 아직 남아 있고, 이제 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의 죽음을 짊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속에서, 계속 이어질 마음의 애도와 장례식 속에서 천국을 향한 실존적 소망을 살게 될까요.

 

 

39년 전 아버지 영결예배 사진입니다. 엄마도 아니고, 단발머리 저 자신도 아니고 제 옆에서 우는 동생 얼굴, 카메라 초점에서도 빗나가 흐릿한 동생 얼굴이 평생 가장 크게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단단해진 동생에 대한 책임감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상복 언제 다시 입을까, 평생 두려워했던 건데. 장례식 마치고 동생과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우리에게 상복을 안 입혔다.” 상복도 못 입어서 안타까운 이별이지만 더는 상복을 입히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이려니 생각해봅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 같이 찬란한 영혼을 가진 엄마는 오래 써서 망가진 육신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들 전해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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