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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일상295

놀이터에 설레는 마음 엄마, 누나 사춘기 아니야. 완전히는 아니야. 애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놀이터다!" 그럴 때 "어디, 어디?" 하면 아직 애들인 거야. 누나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아직 놀이터에 설레. 그러니까 사춘기는 아니야. 오래전에 현승이가 어린이 감별법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경험에 의거해 청소년 감별법도 내놓았지. "맥날(맥도날드)" 간판에 설렌다면 아직 청소년...) 그렇다면 나는 어린애가 된 것 같다. 깁스하고 나서 놀이터에 그렇게 설렌다. 정확히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이 아파트는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데... 젊은 부부와 함께 아이들이 천지삐까리이다! 이 동네 아이들은 왜 이리 인사도 잘하는지 "안녕하세요?" 청명하고 말랑한 목소리를 상시로 듣는다. 이런 아파.. 2025. 6. 30.
꽃밭에서 죽으란 법이 없더라고. 깁스하고 가장 큰 박탈감은 '나가서 걷지 못함'이었는데. 나가서 들꽃에 눈 맞추고 귀를 간지르는 새소리에 노래하고, 바람에 마음을 맡기는 그런 '걷기'를 할 수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는데. 되더라고. 아파트 정원 정도는 얼마든지 누리겠더라고.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지는 못해도 답답한 발 내밀고 인증샷은 가능하더라고. 6주 지내는 동안 봄꽃 가고 여름 꽃들이 피는 걸 다 보게 되더라고. 내일 모레 깁스 풀기 전 마지막 산책이려니 하고 아침부터 나갔어. 오후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기에... 수국이 한창이야. 두 발로 걸으며 수국을 즐기게 될 거야. 오늘은 목발 짚고 한 번에 2천 보를 찍었어. 계단도 잘 오르내리고 네 발걸음이 완전 빨라졌거든. 고맙더라고. 네 발로라도 이렇듯 좋아하.. 2025. 6. 24.
1년의 거리 아침으로 구운 계란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아, 소금! 소금이 없네. 식탁에서 싱크대까지가 구만리라 “에라, 그냥 먹자…” 했다. 막상 먹으려니 안 되겠어서 힘을 내서 일어났다. 서너 걸음 걷기 위해 목발 챙겨 일어나는 시간이 더 걸린다. (발목 골절상 입고 깁스 생활 중) 끙끙 소금 통을 가져와 다시 식탁 앞에 앉아 접시에 뿌려보니 소금이 아닌 통깨다. 머나먼 싱크대까지 다시 다녀올 엄두가 나지 않아 심난하게 통깨 통을 바라보며 눈물로 간을 해서 먹었다. (울었다는 것은 아님) 그러고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1년 전 추억을 보여주는데. 몇 걸음 이동이 이렇게 어려운데, 저 먼 곳을 걷고 누렸다는 것이 내 기억인데도 믿기질 않는다. 앨범을 들추어 1년 전 사진에 푹 빠졌다 나왔다. 이랬다고? 여길 이렇게 .. 2025. 5. 26.
계속 걷기: 네 발로 목발 생활, 할만하네! 약속된 강의만 어떻게 해결하면 한 달은 얼마든지 살겠네!... 싶었지. 목요일 밤에 다쳤고, 금요일 오전에 가서 깁스했고, 그리고는 주말이었다. 월요일은 원고 마감 날이었고. 그러니까 금, 토, 일, 월 내내 원고에 붙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화요일 아침 원고를 보내고 나니 그야말로 '현타'가 왔다. 냅다 밖으로 나가 걸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경안천이든, 앞산이든 어디든! 아, 원고가 끝났고 할 일이 없는데 걸을 수가 없다. 목발 생활은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책이랑 넷플릭스랑 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열어둔 창문으로 솔솔 바람이 들어오는데 참을 수가 없다. 백팩에 책 몇 권과 커피를 담아 넣고 따아~악 짊어지고 삐걱삐걱 목발을 짚고 나섰다. 멀리는 못 가지만, 동 앞이 바로 예쁜.. 2025. 5. 21.
계속 걷기: 나의 발로 열흘 전쯤, 서울 갈 일이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나가서 명동쯤에서 약속을 잡는 일이 있다. 책이나 업무 관련이지만, 이런 만남은 대체로 설렌다. 이날은 특히 '일로 만난 사이'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 싶은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원고 끝난 주간이라 마음도 한 없이 가벼웠다. 동네에 있는 '식빵이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은 식빵을 사가지고 가서 선사해야지! 시골쥐가 서울 가는 느낌으로, 설레고 기분 좋은 발걸음이었다. 빵집에 도착하니 10시에 연다고, 받아주질 않네... 시간 정말 넉넉히 잡고 나가야 한다는 채윤이 말에 넉넉히 나오긴 했지만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하나 놓치면 30분인데, 빵을 포기해 말아 하다 포기하지 못하기로 했다. 15분 정도 남는 시간, 상가 뒤 예쁠 것 없는 길을 걸었다.. 2025. 5. 17.
어린이 흔적 겨우, 간신히 탈고를 이룬 어린이날 밤. 산책에 나섰다. 놀이터를 빙빙 돌며 걷는 밤 산책이 참 좋은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낮에 놀다 두고 간 부서진 장난감이 놀이터 벤치에 헬렐레 누워 있는 것! 하이고... 터덜터덜 재미없이 걷던 발걸음에 폴짝폴짝 생기가 피어났다. 누가 봤으면 조금 부끄러웠을 것! 노래도 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푸른 달과 흰구름 둥실 떠가는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끝이 아니었음! 어린이날이라 엄마가 딸기우유를 허락했는지 모르겠다. 어떡해... 아오, 귀여워! 그리고 또 노래가 나왔다. "하루 종일 우뚝 서 있는 성난 허수아비 아저씨" 노래에 다섯 살 김채윤이 가사를 붙였던. 우성상가 이층에는 채윤이 가는 병원 있어요 맞아 맞아요 .. 2025. 5. 5.
겨우 봄 봄에게 참 미안하게 됐다. 매일 마주 보면서 이렇듯 가까이 다가온 줄 몰랐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비가 오는 주일, 이 날이 지나면 벚꽃은 끝이라는 얘기라 자꾸 들렸다. 잠깐 벚꽃 아래를 걸어보기도 했으나 존재를 알아보지는 못했었다. 눈을 맞추지 못했었다. 거실 책상 앞에서 매일 보는 산이 어느새 연둣빛을 띠고 흰색과 분홍 토핑이 얹혔는데, 도통 가 볼 수가 없네... 이렇게 올봄은 끝이야, 하고 있었다.  주일에 저녁 먹고 나니 6시, 해지는 시간 7시 몇 분. 우박에 눈에 춥고 난리가 난 날씨였는데, 어느새 맑아진 하늘이었다. 다짜고짜 일어났다. 그냥 나섰다. 경안천을 염두에 두었으나 발길이 자꾸 오른쪽으로 향한다. 산이다. 5 분이면 흰색 분홍색 토핑 얹어진 지점에 이를 것 같다. 젖은 산길 오르니.. 2025. 4. 14.
겨울 실내악 겨울 실내악(室內樂) / 김현승잘 익은 스토브가에서몇 권의 낡은 책과 온종일이야기를 나눈다겨울이 다정해지는두꺼운 벽의 고마움이여과거의 집을 가진나의 고요한 기쁨이여깨끗한 불길이여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나의 마른 손이여마음에 깊이 간직한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슬픔을 더 부르지 않을나의 집이여 하염없이 눈이 내리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시간을 덮어버려 명절이 사라졌다. 갑자기 주어진 두둑해진 시간으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원고와 여러 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근심과 기도를 하면 될 텐데... 갑자기 진공상태가 된 듯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 소리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해야 할 것 같.. 2025. 1. 28.
나의 열네 번 째 창 이사했다. 또 이사를 했다. 제목에 '결혼 후 열네 번째 집'이라고 썼다가 사진을 고르며 바꿨다. 집을 고르는 기준, 내게 이 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창'이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 남은 열세 집은 모두 창이다. 창이 있으나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집. 바람이 불면 덜컹덜컹 유리가 깨져 날아갈 것 같았던 집, 가장 춥고 서러운 집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좁은 주방 한켠의 창과 거기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로 위로받았던 집.  "이제 이사의 달인이 되셨겠네요." 또 이사했다고 말하면 이런 말을 듣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는 달인이 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사와 관련된 모든 겪어내야 할 것들은 웬만해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을 구하는 일, 집을 구하.. 2024. 12. 23.
Behold the fowls of the air 2024년 10월 31일 오전 11시. 정신이 번쩍 드는, 아름다운 설교 한 편을 들었다. 아름다운 가르침이 지천에 널렸다. 입을 닫고 눈과 귀만 열고 있다면.(존 스토트 신부님에게 자연 관찰하는 법을 가르치신 그분 아버님 말씀이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새를 우리의 선생님으로 삼으신다. 복음서에 나오듯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가 제일 똑똑하다는 인간에게 신학자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수치다. 공중에 있는 작은 새의 수만큼 우리에겐 많은 교사와 설교자가 있다. 그들의 생생한 본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그러므로 나이팅게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당신은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주님의 주방에 .. 2024.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