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마스크 해제 후 첫 산책. 날씨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연둣빛 나뭇잎들의 명도와 채도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니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니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며 보낼 일이 아니라 열흘의 붉음을 누리자는 주의이다.  걷는 일이야 언제든 좋지만, 이런 봄날 같으랴. 야외 마스크 해제라니 마스크 벗고 오늘 분량의 붉음, 아니 연둣빛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꿈모임 벗님의 별칭 중 하나가 '꽃마리'이다.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이라고, 아주 흔한데 가만히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하곤 한다. "오늘의 미션!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마리를 만나는 것이다." 하며 집을 나섰다. 작은 들풀에 눈을 맞추자면 한 발 한 발 주저 않는 발걸음으로 걷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 주저앉아 들여다보며 찾고 찾아야 한다. 과연 다음 꽃 검색도 인식을 못할 정도로 작은 꽃이었다. 사진을 찍어 단톡에 올리니 '꽃마리'님이 꽃마리가 맞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렇게 조그만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도 의연하게 제 모양대로 피어있다. 누가 봐주든 말든 제 모양대로 제 자신을 뿜뿜 하고 있다. 애쓰지 않으며 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야외 마스크 해제라는데,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다. 이러다 마스크 안 썼다고 테러 당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마스크 쓰는 게 편하단 얘길 많이 듣는다. 가리는 게 좋다고. 우리 아이들이 그렇다. 마스크 벗을 자신이 없다고. 딱히 자랑스럽지 않은 얼굴, 반쯤 가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적당히 가리고 살며 느끼는 안전함이 있지. 그렇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동시에 착용하는 게 몹시 불편하다. 눈이 부셔도 그렇다. 마스크 벗는 대신 선글라스를 쓰고 셀카를 찍어봤더니 정말 그렇다. 내 얼굴도 그렇다. 하관을 가리고 눈을 드러내는 게 그나마 낫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 꽃마리는 아무 걱정 없이 창조주께서 만들고 꾸며주신 그대로 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딱 열흘을 피었다 지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 하시는데, 우리는 가리고 숨길 것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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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쑥 무더기를 지나칠 때마다 "아깝다, 아깝다"하며 다녔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쑥을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나 아쉽다. 바구니 한가득 뜯어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쑥 뜯기와 진달래 꺾기는 봄놀이의 진수다. 바구니 한가득 쑥 뜯고 놀기. (사실 친구들보다 늘 부진했다. 한가득 채워본 적이 없다. 열심히 뜯어도 한 줌이라 집에 와 제대로 뭘 해 먹어 본 적도 없다.) 어떤 날은 산에 가서 진달래를 한 아름 꺾으며 놀기. 쑥과 진달래를 보면 두고 오기가 아쉽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나가 걸을 수 있는데 집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귀에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하려나"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나가 걸으면 하나님 마음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지. 

 

연구소 워크숍을 갔는데, 또 여기저기 쑥이 지천. "우리 자유시간 한 시간만 가집시다. 나 쑥 뜯을래..." 말만 계속 하다 결국 집에 올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오는 길 점심식사로 토종닭으로 만든 닭볶음탕을 주문했더니 한참 기다리란다. 이때다 싶어 쑥을 뜯었다. 연구소 선생님들이 손을 보태니 락앤락 통 하나가 금세 찼다. 한 끼 분량의 국거리가 되었다. "쑥 비싸요. 마트에서 한 주먹 담으면 몇천 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보니 이게 땅이 공짜로 주는 거였다. "돈 없이 값 없이 식재료를 주는구나!" 이게 하나님 나라구나 싶다. 쑥을 뜯는데 그 노래가 다시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 공짜로 주시는 은혜가 널리고 널렸다. 못 들은 체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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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지인들은 무기력과 분노를 토로해왔다. 교회 교우들을 비롯해서 대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이 꽤 많을 텐데 그분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가족 중 한 분이 승리에 도취되어 (목적어는 분명치 않지만) 조롱하고 비하하는 내용을 동생에게 보냈단다. 그 내용을 전달받고 정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었다. 하필 엄마 추도식 다음 날이었다. 하긴 그분은, 임대차 삼법의 여파로 전셋값을 부르는 대로 올려준대도 나가라는 주인 때문에 잠시 거리에 나앉는 상황에 몰린 내게 그랬다. "좋겄다, 니가 좋아하는 문재인이가 부동산 잘해서..." 그때는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졌다. 정치가 무엇이기에,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단 말인가. 가족 간의 인지상정조차 말소해버린단 말인가. 그 조롱의 톡을 받은 동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대선 이후 나는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다. 화도 내지 않았고, 그리 절망적이 되지도 않았다. 뉴스만 보지 않으면 살 수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견뎠고, 전두환 시절도 살았는데.

현승이가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집에서는 물론 다니는 학교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고 피력하는 것에 익숙한 환경이다. 거기다 타고난 기질까지 작용하여 뉴스로 보고 나름대로 의문을 품고, 식탁에 앉아 아빠와 끝없는 대화를 하곤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첫 촛불 집회가 열렸던 날, 나는 지방에서 1박 2일 강의가 있었다. 세 식구가 촛불집회 나간 사진을 보내왔는데, 가슴이 떨렸다. 내가 여기서 한가롭게 강의하고 있을 때인가 싶었었다. 그 집회에서 이재명을 만났고, 같이 찍은 사진을 또한 보내왔었다. 두 아이는 그때 받은 좋은 인상을 기억하고 있다. 셀카를 찍자고 하니 보좌관에게 찍어달래자 하고, 보좌관을 대하는 태도 역시 참 좋았다고 했다. 그때 찍은 사진과 이번 선거날에 채윤 현승 둘이 가서 투표하고 찍은 인증샷이다.

사진에서 시간이 보인다. 성인이 된 남매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대입을 치르고, 성인식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겪어냈고, 또 사춘기를 통과했고, 엄마 아빠 인격의 이면으로 실망했고, 반항도 했고.... 그리고 둘 다 성인이 되었다. 정치적 입장이든 개인의 삶이든 더는 엄마빠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커졌다. 이러기까지 보낸 시간은 성장통을 앓는 시간이었다. 그렇다. 성장통이다.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를 떠나겠다 선언하는 일도, 엄마빠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실망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간이 그러할 때, 엄마 아빠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아이 눈에 비친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아픔의 시간이었다. 좋다 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만, 결과적으론 좋다. 성인 넷이 사는 오늘, 양육자와 피 양육자가 아니라 자기 빛깔로 사는 네 사람으로 만나는 오늘이 참 좋다.

아포리아(a-poria), 길이 없음.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제를 일컫는 말이다. 살면서 흔히 맞닥뜨리는 길을 잃었다거나, 절망적이다, 이런 상태까지 아우르는 것 아닐까 싶다. 피하고 싶고 당혹스러운 지점이지만, 철학에서는 여기를 '낙담'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가는 중요한 지점으로 본다. 대충 알면서 자기확신에 빠진 이가 아포리아에 들어서 혼란을 통과하며 더 큰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좌절과 혼란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피상적이고 쉬운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물론 삼라만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사이 남매의 질풍노도며 가족의 성장통으로 변화무쌍의 시간이었다면, 이재명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트위터에서 만난 시원시원한 정치인으로 시작하여 19대 대선을 향한 경선, 그리고 그 이후...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관계는 여느 개인적 관계 맺음과 다르지 않았다. 끝없이 변하되 어디로 향하느냐, 가 관건이 아닐까. 한 인생이 어디로 향해가는지,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삶의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다. 지난 목포 여행 마지막 시간에 선물처럼 만난 카페가 있다. 김대중 공부방을 탐방하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만난 카페다. 주인 취향이 너무나 뚜렷하여 정겨운, 바다가 보이는 카페였다. 밖에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실내 어느 벽에 시편 23편이 걸려 있었다. 목포 여행 첫날에 들렀던 '손소영 갤러리 카페' 벽에는 이재명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진의 순간은 모두 지나간 어느 날의 순간. 거기로부터 시간은 여기까지 흘러왔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다. 사람도 다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번씩 대중 목욕탕에 가서 잔뜩 불린 다음 빡빡 밀어줘야 한다.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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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마음에 먹구름이 끼어 무겁고 축축해질 때가 있다. 그 느낌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영락없이 '하나님 부재'의 느낌으로 간다. "하나님, 어디 계세요?" 어디 계시냐 물을 때 즉각 "나 여깄다." 답하시는 경우가 없다. 차라리 "어디 계세요?" 묻고 나면 부재감만 더욱 커질 뿐이다. "나 여깄다!" 이 응답은 늘 의외의 순간에 온다. 응답을 듣는 순간, 그 순간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살이 비쳐 들면서 마음은 간지러워진다.

"이리 와 봐, 여기 작은 꽃이 피었어." 하는 소리에 달려가 쪼그리고 앉아 보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피어있다. "어머, 너 이름이 뭐니?" [Daum 꽃이름 검색]이 대신 답해주었다. "아, 내 이름 조금 민망한데 괜찮겠어? 내 이름은 '큰 개불알꽃'이야." 민망하기보다 생김새, 인상과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팍 터졌다. 팍 터지는 웃음에 기쁨이 난입했다. "나 여깄다!" 하시는 그분의 응답은 이런 순간에 온다.

내 걷는 습관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가 없는데, '흉내내기 장인' 채윤이의 미러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땅을 보고 걷는다. 땅 보고 걷는 내 시선을 높은 곳으로 끌고가는 친구들이 새 친구 들이다. 그네들의 웃고 우는 소리와 날갯짓이 고개를 들게 한다. 목포 고하도에서 고개 숙이고 걷는 내 시선 안에 강림하신 새 친구를 만났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답 대신 팔딱팔딱 개구리 놀이로 웃음 주고 날아갔다. 그분의 응답은 이런 순간에 온다.

내 눈 앞에 갑자기 난입하는 작은 존재들. 들꽃보다 새보다 더 찬란한 그분의 현존은 아이들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아이들, 줌 강의하는데 화면에 난입하는 아이들, 영상통화로 만나는 아이들, 주일 예배 마치고 만나는 아이들, 아이들의 말, 뚱한 표정, 놀라는 표정, 긴장한 표정, 부끄러운 표정... 난입하고 침투하는 그분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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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엄마 아빠 없는 사나흘을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막는 늦잠도 아니건만, 엄마빠 없으면 마음 편히 더 늦게 일어나게 된다고. 게다가 한두 번 맥도날드나 마라탕 같은 외식을 즐길 수도 있을 테고. 늦게까지 기타 치고 놀며 수다를 떨어도 조용히 좀 하라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는 거고. 기분 좋은 기대는 자주 배신당하는 것이기도 하고.

목포 여행 이틀 째 채윤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바로 제 방으로 격리 되었고.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지만, 여행 포기하고 돌아온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증상이 심하면 어떡하나, 세 끼 밥은 또 어떡하나... 걱정거리를 꼽자면 끝이 없지만, 잘 지내겠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돼지고기 찌개를 먹고 싶다고 하여 여행 전에 육수와 야채 재료를 준비해 두었다.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은 채윤이는 방에 갇혔고, 현승이가 해보겠단다. 전화로 설명을 듣더니 어떻게 어떻게 끓여서 누나 방에 들여보내고 저도 맛있게 먹었다고. 어설픈 듯 이닌 듯 야채를 썰어 놓은 모양새가 사랑스럽다. 감자칼로 사과 깎아서 후식 넣어주고 설거지 마친 후에는 방문 앞에 앉아서 수다도 떨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시시각각 보고를 해왔다. 다음 날은 개학날인데, 아침으로 파니니를 만들어서 먹고, 누나도 챙겼단다. 김으로 주먹밥 만들어 미리 점심까지 챙겨 넣고 등교를 했다.

뭔가 창의적인 방법으로 누나를 돕고 가족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있다는 자부심으로 현승이는 텐션 업이었다. 그래도 멀리서 보고만 받는 내 마음은 짠했는데, 챙기는 현승이보다 챙김 받는 채윤이 생각에 더 짠했다. 호랑이 같은 아이가 힘이 쑥 빠져서 주는 대로 먹고, 안 주면 못 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그렇게 마음이 쓰였다. 집에 와서는 내가 채윤이를 챙기는데, 무력하게 방에 혼자 갇혀 있는 것이 그렇게 안쓰러운 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일 거고.

채윤이 격리해제 하루 전날 내가 확진을 받았다. 오늘은 채윤이 나오고 내가 안방에 격리. 뭐 필요한 거 없어? 예배드리고 밥 줄까? 다시 방문을 사이에 두고 지내게 되었다. 돌봄의 주객은 바뀌었고. 어제 pcr 검사받느라 추운데 한 시간 서서 떨었더니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증상인지 밤새 오한, 근육통, 두통이 있었는데 아쉬운 대로 판콜에이와 타이레놀 복용하고 효과를 보고 있다. 두통 때문에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영상을 보기도 힘든데... 희한하게 글은 써진다. 약기운 돌아 몸이 조금 가벼워지면 블로그 포스팅만 하게 된다. 이번 주에 써야 할 원고 두 개가 맞물려 있는데, 희한하게 써야 할 원고와 상관없는 글만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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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마시기 시작하면서 커피랑 소원해졌다. 생각해보니 엄마 돌아가시고 지낸 몇 개월이 결정적이다. 4, 5월이 되도록 몸에 한기가 느껴져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따뜻한 차를 마셨다. 한 잔 마시고 나며 몸이 좀 따뜻해졌고. 그렇게 핸드드립 커피와 멀어지던 즈음, 교회에 캡슐커피 메이커가 생겼는데. 편리하고 커피 맛 좋고, 라떼까지! 이제 좀 편히 살자, 편하게 살 때가 됐어, 하고 남편의 알바비를 갈취하여 한 대 들였다. 채윤이가 제일 좋아했다. 카페 부럽지 않은 라떼를 마실 수 있으니. 그런데! 무릇 망대를 세우려는 자는 미리 비용을 계산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 너무나 취약하여, 기계 사는 초기 비용만 들이면 커피는 싸게 마실 줄 알았으니... 커피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캡슐 주문을 자꾸 미루게 된다. 집에 커피 없는 날이 허다하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 저자...

요즘은 카누를 마신다. 어쩌다 한 잔 마셨는데 이거 괜찮네, 세상 좋아졌네, 인스턴트 커피, 장난 아닌데, 싶었고. 핸드드립 커피 마시듯 굳이 접시를 받쳐 격을 갖춰 마신다. 요 며칠 찻잔 픽은 [사람 사는 세상]이다. 몇 년 전에 봉하마을 노란 가게에서 사 온 것이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조국을 위한 기도가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나는 정치적 존재이다. 단 한순간도 정치적 존재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치적 입장도 분명하다. 정치 참여는 우선 기도의 참여이다. 2002년 민주당 경선 때 현승이를 임신한 몸으로 하루 금식기도를 감행했던, 그런 열성 분자이다. 정치적 입장이든, 신학적 입장이든 ‘입장’은 깊이 넣어두는 편이다. 듣는 편이다. 사람 사람이 나 정도는 다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터라. 넣어둔 입장과 열성은 기도로 연소시키겠노라, 생각한다. 대선정국을 바라보면 어이는 없고 할 말은 많지만 그냥 기도한다. 카누 한 잔 마시며 정치적인 기도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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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두면 다시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 비었더라도 혹시나 하고 찾아와 주지는 않을까, 하면서... 설날 아침 일어나 보니 텅 비었던 바구니에 예쁘게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다. 그때 그 새가 눈을 물어온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그 친구들을 생각한다. 새 친구들이 보내준 설 선물이라고. 가슴이 저릿하고 따뜻하고 풍성하다.

 

 

어느 새

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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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아든 어느 새

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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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하늘이다. 가족 중 제일 먼저 어나 베란다에 서서 저 하늘을 마주하고 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역시 씬 스틸러. 집 앞 교회의 커다란 십자가. 그리 많이 훔쳐내지는 못했다. 새벽 하늘의 고요한 장엄함에서 훔쳐낼 것이 거의 없었다. 그 하늘에 안긴 정도. 

 

아무 때나 걸으러 나가는데. 가장 놓치기 싫은 시간은 해질녘이다. 해 지기 직전 집에서 내내 노을 지는 하늘을 왼쪽에 끼고 탄천 길을 걸을 수 있다. 어느 날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면 노을 하늘이 오른 쪽에서 따라온다. 금세 건물에 가려 보라색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포기하고 동네 길로 들어섰다. 골목골목 걷다 성당에 다다랐다. 가파른 길을 올라 성당 마당에 서니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이 서 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오묘하다. 아니 모든 시작과 끝은 오묘하게 잇닿는다. 히브리적 시간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새벽이 시작인지, 저녁이 시작인지 모르겠다. 창조의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내가 걷는 신앙의 길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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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고 싶기도, 보던 책 붙들고 계속 앉아 있고 싶기도... 두 마음이 오락가락 할 때는 나가야 한다. 나가면 다시 못 볼 풍경을 만난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눈이 오지 않은 날에는 볼 수 없는, 더 많이 와도, 덜 와도 볼 수 없는 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이다. 순간의 아름다움, 순간을 놓치면 다시 받을 수 없는 선물이 있다. 그래서 무조건 나가 걸어야 한다.  

 

친구야, 네가 천국에 가면 아바께서 너에게 기도를 몇 번이나 했고 영혼을 몇 명이나 구원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파히타를 맛있게 먹었느냐?’ 그분은 네가 열정을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리면서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 <아바를 사랑한 자녀> 마술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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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가 큰길을 건너 개천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JESUS LOVES YOU]이다.

전에 이 동네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

[JESUS LOVES YOU]는 고속도로 끝 서울 톨게이트 다 왔다는 걸로 읽혔다.

이 동네를 알고부터 '개천 길 걷기 시작점'으로 읽는다.

오늘은 그냥 "JESUS LOVES YOU!"로 읽혔다.

특새로 은혜가 충만하여 영안이 밝아졌나.

그냥 JESUS LOVES YOU!로 읽혔다.

사랑한단 말이 사랑한단 말로 들렸다.

"제가 더요!"

대답했다.

특새로 은혜가 충만해져서.

 

걸을 만큼 걷고 돌아오는 길은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걸을 만큼 걷는 동안 해가 넘어가고, 지는 노을을 보았다.

고니인지, 흰 새가 낮게 나는 것도 보았다.

여러 번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날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다.

JESUS LOVES YOU!

대답했다.

네, 알아요. 사랑하는 것 알아요.

너무 크고 깊어서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랑, 신비라 부를게요.

네, 당신 사랑의 다른 이름, 신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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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앞 거대한 십자가가 씬 스틸러다.

어스름한 새벽 하늘의 신비감도,

파란 하늘 뭉개구름의 청명함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달려드는 아이 같은 마음도...

십자가, 오직 십자가로 향하게 하는...

아무 날씨 아무 풍경을 담아도 십자가, 오직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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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어 나갔다. 베란다 밖, 어느 새들이 앉아 대추 흡입 중인 것이었다. 와, 아침에 포스팅했는데, 댓글 달러 온 거야 뭐야. 얘네들 진짜 신통방통 하네!

아침에 포스팅한 '어느 새'는 비공개로 올려 놓은지 한참 된 글이다. 블로그 놀이 본능이 꿈틀대는 "써야만 하는" 글이 산적한 그런 시즌이다. 본능에 충실하여 밀린 글들 하나 씩 올리는 중이었고, 그러다 오늘 아침 당첨 글이 '어느 새'였던 것. 포스팅하고 나가보니 대추가 더 줄었다. "언제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먹고 가는 거야?" 투덜거렸는데... 바로 이렇게 찾아주실 줄이야.

아, 올 때도 제 맘 갈 때도 제 맘.
애간장 태우는 저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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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이름을 알 수도 없다. '어느 새'가 어느새 앞에 나타나 내 시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가는 그 순간. 우리의 만남은 순간이다. 순간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생긴 대추를 먹다 시들해진 애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말리기로 했다. 베란다 창문 밖 화분대에 체망에 담아 내놓았다. 가을 볕을 받으며 쪼글쪼글 잘 말라갔다. 어느 날! 증거가 그대로 남은 범죄 현장을 발견했다. 분명 '어느 새'의 소행이렷다. 부리로 쪼아 먹었을 테니 국과수에 의뢰하여 유전자 검사를 하면 잡아낼 수 있을 텐데. 잡을 수가 없는 게 함정이다. 하하, 맹랑한 '어느 새' 녀석 가트니라구.

하루 이틀 지나 확인하니, 먹던 그 대추가 없어졌다! 아, 그럼 그 녀석이 또 왔다간 것인가? 겁도 없이 범죄현장에 다시 나타나 다 먹지 못했던 걸 마저 먹고 갔다고? 와아, 씨!… 도 안 남겼네. 이 놈들 봐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내 이 손으로 꼭 잡고.... 싶지만. 잡는 것은 고사하고 현장 목격만 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며칠 후. 진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어느 새'들을 내 눈으로 보았다. 거실 내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나서는 간식 타임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카메라 들고 우당탕 일어나 나갔는데 어느새 다시 날아가버린 나의 '어느 새'들.

삼계탕에 넣을 대추는 냉동실에도 있다. 너네 먹어라. 베란다 밖에 말리던 대추는 '어느 새'들의 간식으로 봉헌하기로 했다. 소리소문 없이 조금씩 갯수가 줄어간다. 녀석들이 뒷처리가 깔끔하다. 씨를 남기는 법이 없고, 먹다 두고간 것은 결국 언젠가 와서 먹어 치우고 분리수거까지 말끔히 하고 사라진다. 어느새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있다. 산책 길마다 만나서 반갑고 고마웠던 '어느 새'들에게 간식 타임 선사할 수 있었던 내 생애 잊지 못할 가을이 가고 어떤 겨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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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기 직전의 빛을 받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시간 딱딱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 일이 있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집에 있는데도 그렇다. 박차고 일어나 나가면 되는 것을 이것만 하고, 이것만 하고.... 미적거리다 보면 해가 넘어간다. 역시나 골든 타임을 조금 놓친 후 집을 나섰다.

 

탄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분당, 왼쪽으로 가면 동백이다. 오른쪽으로 걷고 걷다보면 넓고 깨끗하게 세련되게 정비된 길과 만난다. 같은 단풍도 예사롭지 않다. 이 길을 더 좋아하고 선망한다. 시간도 얼마 없고, 어쩐지 오늘은 왼쪽으로 발길을 하게 되었다. 좁은 탄천 건너편엔 농로도 있고 논도 밭도 있다. 그다음엔 경부고속도로. 잡초가 제멋대로 우거져 말라가는 길을 걷는다. 내 일상과 닮았지. 정비되지 않는 내 일상. 그래서 편안하기도 하다.

 

최근에 듣고 있는 꿈강의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말레이시아 세노이족의 꿈 얘기다. "나는 꿈에서 새를 보았어."라는 말을 가지고 꿈작업하는 얘기를 생각했다. 걷는 중 새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머리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흰 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서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순간 "나도 새를 보았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세노이의 꿈에 답하게 됨.

 

길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빼고 올려다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다 낚인다. 뭐지? 뭔데? 하고 서서 같이 고개를 빼올려 쳐다보는 것. 나처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새네, 뭐 새야?" 폰카까지 꺼내 들고 고개를 쳐들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 2, 3... 연이어 한 번씩 멈췄다 사라진다. 뭐라도 보여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초점 맞추고 있었더니 홰를 한 번 쳐주는 서비스 한 번 해주었다. 자리 털고 일어나 날아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자 비디오 모드로 기다렸다. 꼭 그렇지.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자리에서 떴다. 자리 뜨는 바로 그 장면을 담고 싶었는데. 바로 그 순간은 놓쳤고 멀리 날아가는 뒷모습을 길게 잡았다.

 

 

새가 좋다. 들풀이 좋고 나무도 좋지만 새가 참 좋은 건 이것이다. 찰나로 다가오는 만남. 제 멋대로 찾아와 잠깐 마음을 맞추고 이내 사라지는 기쁨. 영원한 것, 영원한 분은 유일하니 지금 여기의 찰나만 충분히 누리라 일깨우는 천상의 편지이다. 어제와 내일이라는 환상을 떨치고 지금 여기만 살라는 메시지이다. 나는 새를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1, 2, 3...도 새를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새를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본 새를 보았다면 그렇게 지나치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순간이다. 나와 새만의 시간이고 기쁨이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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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아파트라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앞으로 화분 놓는 선반이 달려 있다. 마음 같아선 선반 가득 예쁜 꽃 화분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질 않는다. 작은 화분 몇 개를 내놨다 들여놨다 하고 있다. 교회 집사님께서 지방으로 이사하며 주신 화분 중 하나가 있는데(아! 이름 모름) 신통방통이다. 어느 날 보면 살짝 기운이 빠져 있다, 비가 오고 또 어느 날 보면 생기가 가득 차 있다. 그러다 어느 아침에 보면 저렇듯 작고 예쁜 꽃을 피운다. 물론 또 돌아서서 보면 시들어 없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며 여름 가을을 나고 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네가 선생님이다. 네가 영적 스승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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