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두 권의 책이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기도 피정 첫날 밤을 지내고 있을 시간이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그제는 연구소 지도자 과정 종강 피정을 진행했어야 했다. 글에 파묻혀 살던 11월을 연이은 피정으로 마치고 다음 월요일 쯤 두 다리 쭉 뻗을 예정이었다. 

 

이승우 작가 신작 소설 『사랑이 한 일』은 두 다리 쭉 뻗을 다음 주 쯤 받아 읽으려 했었다. 읽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연이은 피정들이 취소되고, 책이 배송되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세상에 무려 선생님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모은 책이다. 실은 나도 이번 주에 에필로그를 써서 송고했다. 책 한 권 낼 때마다 가장 어려운 글이 프롤로그 또는 에필로그이다. 어려운 이유는 하나. 멋지게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초고를 써놓고 하루 이틀 지나 다시 들여다 보면 '허세'가 그득하다. 못마땅하고 부끄러운데 쓰는 방법 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쓰고 만다. 글이 안 풀릴 때 하는 딴짓 중 하나가 책 검색 놀이이다. 그 놀이를 하다 발견한 박완서 선생님 책이다.  이걸 읽고 나면 내 에필로그는 한 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보관함에 담아 두었었다. 붙들고 읽자면 내가 쓴 에필로그가 떠올라 조금 괴롭겠지만 그 괴로움보다 읽는 행복이 더 클 것. 

 

꼼짝없이 다시 집콕의 시간이다. 때마침 두 권의 책이 도착했다. 때는 사실 내가 맞췄다. 바이러스가 침범해 망가진 시간표는 어쩔 수 없지만, 이미 망쳐진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은 때에 맞춰 수정하면 되니까. 천만 시민 멈춤에 동참하여(서울 시민은 아니지만) 모든 일정 취소(당)하고 기분이 좋은 이유!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하지 마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이것은 여자 친구와 아내와 친척들과 직장과
어쩌면 너의 마음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3~4일 동안 먹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추위에 떨 수도 있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웃음거리가 되고
조롱당하고

고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립은 선물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네가 얼마나 진정으로
그것을 하길 원하는가에 대한
인내력 시험이다
그리고 너는 거절과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좋을 것이다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것만 한 기분은 없다
너는 혼자이지만 신과 함께할 것이고,
밤은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그것을 하라, 그것을 하라
하고 또 하라
끝까지
끝까지 가라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 찰스 부코스키 <끝까지 가라> (류시화 옮김)

 

포기해라. 여기서 포기해라. 더는 못 갈 길이다. 네 깜냥에 여기만큼 온 것이 기적이지.

 

늘 내 안에 울리는 소리이다. 작아졌다 커졌다, 들렸다 안 들렸다, 하지만 아예 사라지진 않는다. 이 목소리로부터 나를 떼어낸 것은 얼마나 위대한 진보인가. 목소리가 나인 줄 알았고, 심지어 목소리가 하나님인 줄 알았지만 이제 나는 거리 두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들을 수 있지만 잘 대처하진 못한다. 크게 들리든, 작게 들리든 그 소리는 나를 통째로 쥐어 흔들고, 나는 뿌리부터 흔들린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나도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인내할 수 있다. 멱살을 내어주고 흔들 만큼 흔들다 제 자리에만 갖다 놓기를. 아니 결국 제 풀에 지쳐 놓아 주고야 말 것임을 안다. 흔들리는 그 순간 영혼의 울렁거림, 토할 것 같은 느낌, 항복하고 싶은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이길 것임을 알기에 견딜 수 있다. 내 멱살을 놓아준 목소리는 말간 얼굴을 하고 "아윌 비 백" 하며 웃는다.


바이러스를 닮은 이 목소리는 변종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 가장 취약한 구석을 재빨리 파악하여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돌아온다.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모습을 하고.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 나는 천사이고, 네 편이고, 너를 도우려는 것임을 알지? 내 소리가 듣기 싫다면 너 어쩌면 악마 일지 몰라. 천사이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어 진다. 끝까지 갈 필요 없다! 갈 수도 없다! 그만 두자!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렇지. 이런 꼬락서니로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이지! 천사의 말이잖아. 천사의 목소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내 무릎을 꺾어 놓을 셈이다. 까만 하늘, 별 하나를 의지해 기약 없는 여행을 하는 동방박사로 살고 싶은 마음은 어리석음이 된다. 별 따위를 이정표 삼는 것은 이상주의일 뿐이니, 실용적이 되라고 부드럽고 달콤하게 나를 흔든다. 부드러운 흔들림은 또 새로운 울렁거림으로, 악마인 나를 토해내고 나를 혐오하는 고통으로 끌고간다.

 

착한 사람들에게 멱살을 내어주고 두들겨 맞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는 한 문단의 글을 썼는데, '고립과 고독'에 관한 내용이었다. 얼마나 위안이 되고 마음에 드는지 꼭 기억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옮겨 적어야지 했는데, 눈을 뜨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열었는데 저 시를 듣게 되었다. 언제든 도망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것은 내 고질병이다. 그것을 부추기는 목소리를 분별해야 한다고, 분별하기 위해선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꿈이 말해주는 것 같다. 시가 말해준 것인가? 내 안의 다른 세미한 목소리가 들려주시는 지혜의 말씀인가.   

 



‘자발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말이 익숙해지더니 일상이 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물러나 홀로 있다고 해서 내가 나와 함께 있어 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올해 마지막 글쓰기 모임을 알려드립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송년회 모임도 조심스러운 연말이 될 것 같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함께 하는 송년의 시간 보내고 싶은 분을 초대합니다. 발설의 치유력은 강합니다. 말하고 쓰는 것은 가장 주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자체로 치유이고 성장입니다.

온라인 모임이니 계신 지역에 관계없이 연결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전국 어디든 막론하고, 해외에 계신 분들도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11월 23일(월) ~ 12월 28일 (월)
+ 시간 : 오후 8시~10시 30분(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2771-4445
+ 신청 링크 : https://bit.ly/3eNlJar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여자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필독서 :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201123~)

11월23일 시작하는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신청양식 입니다.

docs.google.com

 

가보지 않은 길을 안내할 수 없다는 상담과 영적 지도의 원칙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가 가본 길로 안내하는 것이 됩니다. 연구소의 모든 여정이 글쓰기로 흘러가고 있네요. 연구원, 지도자 과정 벗님들, 내적 여정을 깊이 가려는 분들이 결국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 연구소 SNS에 쓴 글, 그대로 옮겨 붙여봅니다. 

나음터에는 글이 넘쳐납니다. 지도자과정 방에는 의식 성찰 일기가, 글쓰기 그룹에는 자기를 찾아가는 형형색색의 이야기가, 연구원 방에는 스터디 교재 독후감이, 카페에는 구슬 서 말을 꿰는 고유한 이야기들이.

이번 한주는 글 쓰는 에너지로 더욱 충만합니다. 이제 와 얘기지만 <중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모임은 연구원을 위한 글쓰기 모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연구원 셋이 먼저 신청하고, 남은 자리에 새로운 글벗님들을 초대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되기는 언제든 현재 진행형이기에, 연구원들 역시 부단히 성찰하고 기도하며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만나는 글쓰기에 오롯이 머무르는 연구원들이 성장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픔 속에서 치유와 성장의 에너지는 더욱 충만합니다.

종강을 두어 주 앞둔 지도자 과정 벗님들도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숙제를 안고 글쓰기에 머물고 계실 겁니다. 에니어그램과 영성을 잇대어 더 깊고 넓게 배우는 것이 지도자 과정의 중요한 목표이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 되기 위한 성찰과 기도 훈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을 안내할 수 없기에 좋은 상담가, 여성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닦은 눈으로 자신의 인생 여정을 새롭게 쓰는 가장 소중하고 어려운 글쓰기를 하고 계실 텐데, 고뇌와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조각난 나의 기억을 이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아 감각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하찮아 보였던 나의 이야기가 그분의 이야기에 가닿는 것을 깨달을 때, 고립에서 빠져나와 연결의 충만을 누리게 되겠지요.

어제, 중년 글쓰기 두 번째 시간에 한 벗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그저 나의 이야기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쓴다 생각하니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렘 같은 것도 있었다고요. 지난 회기 때 한 벗님께서는 하루 한 시간 글 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분주한 낮 시간을 보내면서 문득 “얼른 가서 글을 써야지” 하게 되셨다고요. 나를 만나는 시간이 설레고 기다려진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두 분의 말씀은 뭉클한 도전입니다.

나음터 우물가에는 지금 조용히 왁자지껄, 아프지만 생명력 넘치는 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1. 2020.11.12 08:32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11.12 08:34 신고

      그러세요! 언제든 silver 님께 문 활짝 열어두고 있을 거예요 :)

 

응급실 다녀온 다음 날, 일을 손에 놓고 누워 있었더니 채윤이가 좋아했다. "엄마가 아프니까 좋다. 이렇게 여유도 있고" 아파트 한 바퀴 돌자고 나간 길에 어린애처럼 팔랑팔랑 걸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게 아니었다. 노트북 열지 않고 침대와 소파 정도 왔다갔다 하면서 그냥 쉬었더니 채윤이는 엄마가 진정으로 집에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나도 모처럼 집에 있는 느낌이었다. 밥 차려 놓고는 바로 노트북에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하고,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는 게 일상이니까. 밥 차리고 바로 출근. 다시 잠깐 퇴근해서 밥 차리고 또 출근. 그런 일상이었구나! 

 

한 주 지나고 병원 예약 잡힌 월요일. 채윤이까지 따라 나섰다. 점심으로 맛있는 막국수를 먹고 서현역에 차를 세우고 차병원까지 걸었다. 탄천을 걸었다. 걷기 딱 좋은 날씨에 예약 시간까지 넉넉히 남아 있어서 참으로 여유로운 걸음이 되었다. 아장아장 하던 채윤이와 한강변을 걷던 때가 엊그제 같다. 빨간색 원피스 입고 삑삑삑 샌들 소리 내면서 우리 앞을 걷던 채윤이가 눈에 선한데 언제 이렇게 컸다냐. 아침에 일어나 "엄마~아" 하고 나오면 "우리 채윤이 잘 잤어?" 하고 품에 폭 안아주던 느낌이 팔과 가슴과 배에 남아 있는데. 이즈음엔 "엄마~아" 하고 나와 안으면 내가 채윤이 품에 폭 안기는 형국이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양손 치켜 잡은 채윤이를 "우웃~짜!" 하며 하늘로 날리던 기억도 있다. 아빠와 내가 번갈아가며 채윤이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이제 반대가 되었다. 엄마 아빠 앞, 뒤, 옆모습을 채윤이가 찍고 있다. 카메라에 담긴 우리는 저렇게 다 큰 딸을 둔 부모답게 충분히 늙었고. 아파서 뭘 할 수 없으니, 아픈 몸이 손발을 묶어 일을 못하게 하니 어릴 적 느낌으로 채윤이 손, 남편 손 다시 잡은 기분이다.    

 

 

 

 

월간 <기독교 세계> 11월호 기고글입니다.(특집 "코로나 블루와 기독교의 역할") 

 

시리게 푸른 하늘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구름, 살살 부는 바람. 가을날이 이렇게나 좋았던가요? 길었던 여름의 장마 탓인지.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낯설도록 좋아 자꾸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마음의 수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탁 잡아 올리니 이 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푸르기만 합니다.” 나가사키의 엔도슈사쿠 문학관 근처 ‘침묵의 비’에서 본 말입니다. 제 마음에는 내내 이렇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막막한데, 주여, 하늘은 푸르기만 합니다.”

 

올 3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일상이 시작되고, 약속되었던 강의며 일이 하나둘 취소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놀라움과 두려움에 “세상에 이런 일이!”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평범하게 하던 악수, 일상이 그립다.” 말들이 무성했습니다. 비대면 예배도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그조차 평범한 일상이 된 듯, 묵묵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마스크 쓴 얼굴이 낯설지 않고, 갑갑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불평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어른은 어떻게 견디겠지만 아기들이 그 갑갑한 마스크를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웬 걸요! 요즘 아이들은 샤워하고 나와 속옷도 입기 전에 알몸으로 마스크 먼저 쓴다는군요.

 

그날그날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마스크로 입을 막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경제적 타격이 견딜 만해서가 아니라, 이전 일상이 그립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실이 슬프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나만 겪는 것 아니고,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이 있으니 그저 견디며 속울음을 삼킵니다. 끝을 예측할 수 없으니 무력할 뿐이고요. 저 고운 가을 하늘이 슬프게 보이는 것은 우울과 무력감이 깔린 일상 때문입니다. 저 투명한 푸르름과 대비되는 블루, 코로나 블루가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고운 하늘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땅의 일상은 이렇게 우울한데, 주님, 하늘은 청명하기만 합니다.”

 

가을 초입에 ‘희망’을 주제로 한 강의나 기고 요청을 연거푸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까칠함을 타고난 편입니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일단 삐딱하게 보게 됩니다. 불편한 것을 빠르게 감지하고, 불편한 것은 결국 말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재밌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허튼 희망을 말하고 부추기는 자기계발 심리학이나 긍정 신학을 혐오하는 편이고요. 희망을 말하기에 부적절한 성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하던 일들이 끊어졌고, 경제적 타격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던 3월, 어머니를 천국에 보내드렸습니다. 격리조치로 면회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머니는 홀로 땅의 마지막 호흡을 내쉬셨습니다. 아쉬움과 상실감으로 가슴이 조여드는 듯하고, 아직도 울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습니다. 이런 제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이라는 프랑스의 실존철학자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관심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아닌가요. 가브리엘 마르셀은 드물게 희망을 탐색한 철학자입니다. Homo Viator(여행하는 인간) 이란 말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길 위에 있고, 어디론가 가는 중인 인간이죠. 계속 움직여 가고 있지만, 그 끝을 정할 수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끝을 정하고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철학자는 말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바이러스 세상을 그저 입 닫고 살아내는 지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선 희망을 욕구나 염원과 구분합니다. 희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소원하거나 욕구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욕구나 염원은 내 존재 밖에서 있는 것으로,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인데 희망은 그럴 수 없다고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에 잡을 수도,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코로나바이러스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기다리지만, 그것을 손에 넣는 것 자체가 희망이 아닙니다. 철학자에 의하면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해야겠지요. 또 희망이란 단순한 감정도 혹은 이성도 아니랍니다. 그러면 희망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아야 한답니까. 철학자는 말합니다. 희망은 인간 실존의 한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요. 아, 그렇군요. 희망이 필요할 때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있겠습니까. 실존의 한계, 즉 절망의 극한에서 희망을 떠올리게 되지요. 희망은 희망 없는 곳에서 찾지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저는 누구보다 희망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는 말합니다.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희망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성도 감정도 아니고,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희망은 신앙의 영역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나마 살아내는 것, 막막한 하루를 그저 길을 걷듯 살아내는 것은 이미 희망과 더불어 있음이고요. 인간 존재에 응답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을 찾아 밖을 헤맬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의 존재로,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던 예배가 끊어지고, 기도회와 성경공부, 구역모임이 불가능한 지금입니다. 존재와 신앙을 지탱하던 활동들, 외적인 활동이 모두 멈추었습니다. 밖이 아니라 안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희망의 위기가 아니라 희망을 찾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묻어가던 믿음에서 홀로 있음의 영성을 일구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몰렸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내몰렸지만 새로운 영성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함께 뜨겁게 드리던 통성기도에서 침묵의 기도로, 모여서 나누고 섬기던 봉사에서 내면을 돌보는 성찰로 옮겨가야 합니다. 희망이 외적 조건에 있지 않다면 필연 그 전제 조건은 믿음입니다. 지난여름 긴 장마 속 하늘을 떠올립니다. 자고 깨어 바라보는 하늘은 늘 먹색이었습니다. 50여 일 그런 하늘이 이어지니 푸른 하늘이 있었던가, 싶기까지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먹구름 너머 하늘은 거기 있었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즈음엔 그 말갛고 투명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이 거기 있는 하늘. 저는 거기 하늘이 있음을 ‘아는 것’ 너머 ‘믿습니다’.

 

글쓰기 영성 모임 여러 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아빠이며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분이 글을 쓰셨습니다. 바쁘게 회사 생활하던 분이었어요. 재택근무한 지 벌써 수개월. 어린 세 아이가 있는 집에서 일하는 중이라고요. 수시로 침범해 들어오는 아이들로 일의 능률은 떨어지고, 혼자 시간이라곤 없는 나날이 이어지며 점점 지쳐간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쁜 회상 생활로 아침저녁 잠시 얼굴을 마주했던 아이들, 아이들을 돌보는 아내의 일상, 그 일상의 실상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가 이렇게 지냈구나, 싶으니 그간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내의 처지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제는 일상이 된 코로나의 우울, 코로나 블루 속에서도 다른 빛깔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발견하신 거고요. 글쓰기는 성찰로 이어지고, 깨달음으로 끝났습니다. 희망은 존재와 함께 있지만 발견되어야 합니다. 어디서요?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자리, 일상에서요.

 

존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 안에 매몰되는 것을 성찰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참된 성찰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영성은 구심력뿐 아니라 원심력의 균형으로 필연 다시 밖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밖의 저기 먼 곳이 아니라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남편과 아내, 아이들이 있는 곳이요. 위 세 아빠처럼 코로나의 현실에 우리 모두 지쳐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세 아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쳐가고, 슬픔과 그리움이 몸을 훑고 지나면 우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쩐지 제게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 희망, 하다 보니 희망의 환영이 보이는 걸까요? 아닙니다. 제게 희망은 또렷하고 분명합니다. 제게 희망은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상담과 영성 집단에서 마주하는 한 사람의 얼굴에서 살아갈 의미, 희망을 발견합니다. 치명적 폭력의 흔적을 안고, 살아남기 위해 글을 쓰는 한 사람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부족함 속에서 아프게 성장하고 있는 저의 두 아이가, 무의미한 '소명의 숲'에서 의미를 찾아 몸부림치는 목회자 남편이, 자기도 아프면서 더 아픈 이에게 어깨를 내주고 싶다는 직장 동료가 희망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막막한데, 주여, 하늘이 저렇게 푸르릅니다. 땅도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 땅의 우울에 하늘의 푸른 희망을 담겠습니다. 제 곁의 한 사람, 그의 눈동자에 비친 푸른 희망으로 오늘을 살겠습니다.”

* 월간 <복음과 상황> 356호(2020년 7월호) 기고글입니다.

 

신령한 기도와 산신령 놀이 사이

기도해보고 결정할게요.” 청년부 시절 한 사람이 가끔 난다. 크고 작은 결정사항 앞에서 늘 이렇게 대답했다. 주보에 실을 수련회 후기를 써달라 부탁한 적이 있었다. “, 기도해보고 결정할게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걸 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 부모님 계신 고향에 갈 때도 버스를 탈지, 기차를 탈지 기도하고 결정하는 친구였으니. 그저 그의 하나님께서 글을 쓰라는 결재를 내려보내시길 기도(, 기도!) 할 수밖에. 그의 말에 자주 거부감을 느꼈다. 실은 이 친구가 싫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집사님이 계셨다. 친절하게 손잡아주고 위로해주시는 따뜻한 분이기도 했다. 가끔 교회 복도에서 마주쳐서 이런 말씀만 하지 않으시면 참 좋았는데. “정 선생님, 요즘 힘들어요? 내가 기도해보니까 정 선생님이 힘든 것 같던데…… 하여튼 힘내요. 내가 늘 기도하고 있으니까.” 위로로 다가와 순간적으로 울컥하려는 감정을 확 밀어 넣게 되었다. (인생 힘들지 않은 순간이 얼마나 있다고!) “하나님도 참. 제가 힘든 걸 아시면 저한테 직접 말씀하시든지, 해결을 해주시든지. 왜 집사님께 뒷담화를 하시죠?” 속으론 그렇지만, 대충 훈훈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돌아서는 마음은 한없이 갑갑했던 기억.

 

기도하면 뭐가 그렇게 잘 보이고, 하나님 음성이 잘도 들리기론 우리 엄마가 1등이었다. “엄마가 기도해보니까 이번 일 잘 되겠더라. 기도 끝에 니가 활짝 웃더라고.” 엄마가 기도해보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시험도 잘 볼 거고, 면접 결과도 좋을 거고, 맡은 행사 잘 진행할 거고, 아픈 데는 큰 문제 아닐 거고. 어쨌든 엄마의 기도는 힘이 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내 시간표에 맞춰 꼼짝하지 않고 내내 기도를 하셨다. 공부는 안 했어도 엄마 기도 때문에 든든했다. 문제는 이랬던 엄마가 엄마가 기도해보니 너 그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런 점괘, 아니 응답을 받아올 때였다. 가령 엄마 마음에 차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다닌다든지 할 때.

 

기도라는 이름의 욕망의 투사, 기도로 위장된 간섭과 통제, 기도라는 이름 뒤에 숨은 회피를 드러내는 예는 신앙생활 일상에 허다하다. 이런 행태를 간파하고 비판할 신학적 지식과 판단력이 내게 없지도 않다. 기도에 관해 읽은 무수한 책들이 내 편인 듯한데 무언가 찜찜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자고 저 기억들은 30여 년, 1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 청년, 그 집사님, 엄마 앞에 섰을 때의 이었다. 막힌 느낌,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느낌. 그 벽의 이름이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행위인 기도라는 것이 무엇보다 큰 좌절이다.

 

닫힌 종교와 종교 중독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조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 전통 안에서 진리를 찾고자 애썼던,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가톨릭 신자가 된 쉴라 파브리칸트 린(Sheila Fabricant Linn)의 영적 여정에 공감되는 바가 크다. 유대교 전통 안에서 만물 안에 현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가톨릭 신학교에서 만난 교수들의 열린 태도와 사랑에 안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종교를 넘나들며 그가 고민한 것은 열림과 닫힘, 그리고 자유였다. “(종교 안에) 닫혀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도달했단다. 그렇게 기독교 신자가 된 쉴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다시 이런 질문 앞에 섰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보다 더 닫혀 있게 하는가?” 유대교 공동체에서 만났던 벽을 자유를 찾아 안착한 기독교 안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중독과 회복에 대한 이해에서 찾게 되었다고 한다.

 

쉴라와 그의 동료들이 정의하는 중독은 우리의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 특히,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실체 또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중독의 목적은 한마디로 자신과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종교나 종교 행위들이 약물이나 알코올처럼 내면 안에 있는 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종교 중독을 정의한다. 종교 중독은 엄격한 믿음의 체계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내면의 실재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엄격한 믿음 체계 안에 갇혀 모든 문제를 종교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그렇게 함으로 마주해야 할 내면의 진실로부터 끝없이 멀어지는 것이 중독 행동의 양태이다. 이 같은 중독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가 어린 왕자에 나온다.

 

거기서 뭘 하고 계시죠?”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차 있는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어린 왕자는 물었다. “마시고 있다.” 술꾼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마셔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잊으려고.” 술꾼이 대답했다. “무엇을 잊어요?” 어린 왕자는 벌써 그를 불쌍하게 여기며 캐물었다. “내가 부끄러운 놈이란 걸 잊기 위해서.” 술꾼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털어놓았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어린 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어 자세히 물었다.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주정뱅이 말을 끝내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어린왕자열린책들 (52)

 

위의 세 사람, 기도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 내게 벽으로 느껴진 이유는, 모든 대화가 기도하나님으로 환원되는 것이었다. 도통 대화의 주제, 문제의 핵심에 다다를 수가 없었다. 배우자나 아이의 신앙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데,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기는커녕, 관계만 더 나빠진다면, 종교 중독 증상을 의심해봐야 한다. 기도할수록, 신앙에 열심을 낼수록 배제하고 배척할 대상이 많아진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행위를 강박적으로 지키고, 그것만이 옳다는 확신 속에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닦달하고 통제하고 있다면 거의 확실하다. 여타의 중독과 달리 종교 중독이 가진 치명적 해악이 여기에 있다. 알코올이나 마약처럼 누가 봐도 나쁜 것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있다. 책상 밑에, 장롱 안에, 술병을 숨겨두거나 난 그 정도는 아니야하며 자신의 중독 행동을 깎아내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종교 중독의 행위들은 곧바로 종교적 자부심이 된다.

 

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등의 행위가 진실한 자기 대면을 대체할수록, 즉 중독 증상이 심화 될수록 흔히 믿음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중독 권하는 교회에서의 현실이다. 청년부 시절 그 친구, 교회 복도에서 만나는 집사님, 엄마가 내가 기도해보니까라며 치고 들어오면 반격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너는 저들만큼 기도하냐?”는 목소리가 내 안에 울린다. 기도와 말씀 생활에 할애하는 절대 시간을 비교하면 나는 작아지고 만다. “기도도 안 하는 것들이” “주일성수도 안 하는 것들이중독 행동으로 공격한다면 방어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기도 중독자를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부끄러움 없는, 거침없는 중독 행동에의 몰입은 필연 나만 옳다는 자아 중독으로 귀결된다. 자아 중독의 몹쓸 폐해,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믿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하는 사람을 배제하고 심지어 혐오하기에 십상인 것이다.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중독과 은혜를 통해 제럴드 메이(Gerald G. May)가 우리에게 준 충격적인 통찰은, 우리 모두 중독자라는 것이다. 출간된 지 한참 된 그 책이 아직도(아니, 이제야) 사람들 사이 회자 되는 것은, 개인의 삶에서 경험적 증거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코올이나 마약 등, 약물 중독을 넘어 비물질적인 것들에의 중독 증상이 당신과 나의 일상에 흔하다. 어느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다.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열 명이 있다면 그중 7명은 알코올 중독이라고.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신자 10명이 있다면 그중 7명은 종교 중독자 아닐까?

 

종교 중독은 여타 물질 중독과 달리 명확한 진단 기준이 없다. 스티븐 아터번(Stephen Arterburn)과 잭 펠톤(Jack Felton)해로운 신앙에서는 종교 중독자를 진단하는 다양한 지표들이 나와 있다. 그 지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많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특히 동기를 더듬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체크리스트 몇 항목으로 단정 지을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행위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사람의 열정적 행위가 사랑의 발로인지, 자기과시이거나 현실도피인지를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동기를 달아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All a man's ways seem innocent to him, but motives are weighed by the LORD. 16:2, NIV)

 

무의식의 지도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낸 프로이트(Freud)의 업적을 이은 신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가 카렌 호나이(Karen Horney)가 열어준 마음의 세계는 더 깊고 영성적이다. 정신 병리적 관점으로 환자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치유할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의 이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건강한 성격발달과 성격장애 사이 어디 즈음에 있다.” 종교 중독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영성발달과 종교 중독 사이 어디 즈음에 있다.”

 

위의 기도 중독자 세 사람을 대놓고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내가 그들만큼 기도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종교 중독의 개념을 처음 배웠을 때, 그런 종류의 신앙인에게 붙일 언표를 얻고, 속이 시원했다. 주변의 불편한 신앙인들, 하나님을 믿는지 산신령님을 믿는지 알 수 없는 기복신앙을 비추는 만능 거울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울에서 낯익은 얼굴이 어른거리니, 그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엄마를 닮은 내 얼굴이었다. 누가 종교 중독자인가? 나다. 내가 종교 중독자이다. 나는 한때 지독한 종교 중독자였다. 아니 지금도 회복 중인 중독자이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중독과 은혜의 저자 제럴드 메이가 먼저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진실한 고백과 연구로 가만히 나를 진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이다.

 

나는 니코틴, 카페인, 설탕, 초콜릿, 등 다양한 물질들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물리적 중독일까 혹은 단지 심리적 의존이었을까?…… 결국,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물질에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다른 수많은 행위에도 중독되어 있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중독자이며,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들에 대한 중독은 다른 종류의 중독들에 비해 그저 좀 더 명백하고 비참한 중독일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중독과 은혜IVP (21, 23)

 

종교 중독, 유발자는 누구인가

종교 중독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성적 학대 분야의 권위자인 패트릭 칸스(Patrick Carnes) 박사가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우리의 연구는 아동 학대가 중독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 …… 그리고 아동기에 학대를 많이 받을수록, 성인기에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독과 학대 경험은 떼어 설명하기 어렵다. 아동기 학대 경험이 중독으로 이어진다면, 종교 중독은 영적 학대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폭력적인 부모에 의해 아동 학대가 발생한다면, 폭력적인 영적 지도자에 의해 종교 집단의 영적 학대가 일어난다. 아동이든 종교 생활을 하는 성인이든 학대의 피해자는 치명적인 약자이다. 학대 가해자가 가진 힘과 권력에 대한 피해자의 두려움은, 학대를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어 악의 고리를 더 강화하게 되어 있다.

 

앞의 쉴라 파브리칸트 린(Sheila Fabricant Linn)과 한 팀인 마태오 린(Matthew Linn, S.J)신부는 정서적 학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두 살 아이에게 열 살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기대하거나, 열 살 아이에게 두 살 아이처럼 계속 의존하도록 하는 것’. 그대로 영적 학대에 빗댄다면 아직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성숙한 신자의 종교 행위를 강요하고, 충분히 성숙한 사람을 유치한 신앙과 신학으로 통제해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 이미지의 투사 대상이다. 아동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은 한 인간의 신적인 연결을 위해서는 매개자로서의 다른 인간과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그 매개자 역할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목회자, 종교지도자이다. 종교 중독 유발자는 일차적으로 이런 목회자들이다. 신도들의 영적 갈망, 세속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들이 가진 수치심(하나님 앞에서 뭔가 늘 부족하다는 느낌, 존재 자체에 흠이 있다는 느낌)(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연료로 삼아 종교 행위를 활활 불태우도록 하는 목사들 말이다. “집사님, 이렇게 기도를 안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이 앞에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시겠습니까?”

 

모든 중독의 핵심적인 감정은 수치심이다. 학대 피해자로 자란 아이들은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항상 울리는 메시지가 있다. “믿지 마, 느끼지 마, 생각하지 마.”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혹 느끼거나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그것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독으로 이어지는 학대의 메커니즘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자신의 느낌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목회자들이 영적 학대자들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다른 사람의 영적 여정을 통제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학대라고 하였다. 종교 중독을 유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목회자는 학대자이다. 역할로 부여받은 목회적 권위를 권력 삼아 휘두르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기는 과대망상에 빠진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심각한 종교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중독에 빠진 책임과 거기서 벗어나야 할 의무가 당사자에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동 학대 피해자와 달리 우리는 힘을 가진 성인이고, 무엇보다 직접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이다. 성인 학대 피해자의 힘의 부족은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한다. 그 무력감이 학습되었다면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 참된 앎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 특히,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한 빠른 해결책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대면하지 않기 위해 의존하는 종교적 행위들이 중독의 실체임을 알고,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다시 술을 마시는 순환을 멈추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중독 치료로 알려진 A.A(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를 창설하고 12단계 회복프로그램을 만든 빌 윌슨(Bill Wilson)은 중독자를 일컬어 통증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망치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두통이 있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 느끼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헌신하고, 하고, 하고, 하는· 망치질을 일단 멈춰봐야 한다. 두렵더라도 두통의 실체를 맞서고 드러내야 한다. 망치질 권하는 학대자의 목소리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학대자와 함께 중독 유발자가 되는 것이고, 그 피해는 오롯이 망치질에 부서지는 자기 머리통이다.

 

종교 중독의 치유, 다시 잇기

A.A 12단계의 1단계는 이렇다.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인했다.” ,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것만큼 중독에서 벗어나는데 명확한 첫걸음은 없다. 우리 모두 종교 중독과 건강한 영성발달 단계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면, 건강의 지표는 중독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실존적으로 인정하는 정도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회복과 성장을 위한 희망은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나는 결코 종교 중독자일 수 없다,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이다자부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철저하게 타자화하고, 거침없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타자화한 그 존재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저 사람 사기꾼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 사기꾼의 개념도 있어야 하고, 그 개념을 형성한 직간접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종교 중독이 알아 차려지고 유난히 잘 보이는 것은 거기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를 읽으며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동 후에 행패를 부리던 노인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혜신 박사는 소란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노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 얘기 등,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꺼낸 말이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였다. 나는 광화문에서 세월호에 욕설을 퍼붓는 노인을 떠올리면 지독한 종교와 이념에 복합적으로 중독된 구제 불능의 중독자가 연상된다. 종교 중독의 그러데이션에서 가장 진한 부분, 저쪽 끝 어디에 두게 된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자기 성찰을 끌어낸 정혜신 박사의 내적인 힘이 놀랍기만 하다. 그 책에서 내내 말하는바, 존재에 주목하면 이어진다는 것이다.

종교(religion)의 어원 re-ligio다시 묶는다, 다시 띠를 두른다라는 뜻이다. 나와 타자, 나의 실존과 일상의 고통, 지금의 나와 미성숙했던 나를 분리하는 한, 중독의 회복도 영적인 성장도 불가능하다. 분열된 것들을 다시 잇는 참된 종교의 회복이 종교 중독으로부터의 치유이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회심인지 모르겠다. 잠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우리에게 연결되자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인지 모르겠다.

 

* 출처 : 월간 <복음과 상황> 356호(2020년 7월호) 커버 스토리 “중독과 열정 사이”

 

미련하게 병을 키웠다. 며칠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어젯밤 난생처음 응급실엘 가봤다. ('실려'간 것은 아님. 큰 병은 아님)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을 찾는데, 장례식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픈 몸에 반사적 저항이 왔다. '장례식장'이란 팻말을 보기도 싫었다. 모든 검사 마치고 주삿바늘 꽂고 가만히 누워 있자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와 마지막 얘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낸 곳이 응급실이었다.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 밀려왔다. 엄마는 장례식 없이 떠난 분이다.

 

장례식장이 불편한 이유는 엄마 생각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사 맞는 긴 시간 남편과 이 얘기 저 얘기하는 중에 남편이 물었다. "당신은 죽는 게 두려워? 어때?" 글쎄, 나는 죽는 것이 두려운가? 죽음 자체가 두려운가? 나는 고통이 두렵다고 했다. 응급실을 찾을 만큼 아픈 몸을 끌어안고 마주한 장례식장 팻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가까이 느끼게 한다. 나는 고통이 두렵다. 고통에 대해 과장하는 버릇도 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라고 한다. 아픔의 극한은 죽음이다. "죽도록 밉다"라고 말한다. 미움의 고통 또한 극한의 단절, 죽음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종일 일을 손에서 놓고 가만히 누워 있으니 며칠 나를 스쳐간 고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모 교단 총회를 보고 절망감과 분노로 고통스러웠다. 양복 빼 입고 앉은 '성직자 然' 하는 사람들이 이단을 심의하고 판정하는 것을 보자니 어이없어서 아프다.  그 뉴스를 접한 날엔 마침 이런 글을 읽고 있었다. 

 

"처형된 이단자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위반한 것은 보통 권위, 사제직, 성사(성례전) 문제, 그리고 '누가 힘이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은 것 때문에 화형에 당한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중략) 어느 교황이나 사제, 신자도 너무 부요한 생활방식 때문에 출교를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너무 탐욕적이거나 야망을 채우거나 교만한 것 때문에 이단으로 판결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목사님 가정의 권고사직 소식을 들었다. "죽도록" 화가 나서 고통스러운 것은 사직을 권고한 담임 목사님의 행태이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그 목사님은 모르긴 해도 교단들의 차별과 혐오 가득한 폭력적 총회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것이다. SNS에 분노의 포스팅을 하셨을 분이다. 목사님 같은 분만 있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패하지 않을 거라며 지지와 공감을 받을 것이다. 권고사직 통고받은 목사님과 가족을 두 번 울게 하는 표리부동이다. 며칠 새 비슷한 소식을 듣고 또 듣는다. 답이 안 보이는 고통의 시간을 사는 이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죽음보다 고통이 두렵다. 정직하게 마주한 현실에 비일비재한 고통이 두렵다. 죽음보다 삶이 두렵다. 

 

오후의 볕이 다 사라지기 전에 산책을 나갔다. 채윤이와 함께 단지를 한 바퀴 도는데, 울긋불긋 물든 산과  하늘과 오후의 빛이 만든 풍경이 아름답다. 몸이 아픈 것도 현실, 부조리한 현실도 현실, 저 고운 풍경도 현실. 죽음도 현실 삶도 현실이다. 둘 중 하나만이 실재라 우길 수 없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그 고통에 압도되어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마음에 병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 오롯이 마주하고 싶다. 마침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읽던 책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자신과 모든 현실에 대한 정직성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방식이라고. 우리는 모든 고통, 부정적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며 급기야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저 일상을 살라는 저자의 말이 크게 들린다.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극의 운명이지만,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아픈 오늘을 사는 방법 외에 없다. 살되, 살아가되, 리지외의 테레사 성인의 말을 따라 "작은 일들을 큰 사랑으로" 하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과 모든 현실에 대한 정직성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 것이며 누구나 보편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만드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결국 반대, 문제들, "부정적이 것들"(죄, 실패, 배반, 험단, 공포, 상처, 질병 등)로 끌려들어 가며 특히 궁극적인 부정인 죽음 자체로 끌려들어가기 때문이다. 훌륭한 영성은 우리에게 고차원적 부정이나 겉치레를 가르치는 대신, 그 모든 삶의 현실들에 대해 완전히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으로』, 리처드 로어

 

 

  1. BlogIcon 맑은 2020.11.02 10:04 신고

    에구.. 이 볕 좋은 가을날 마음껏 누릴 수 있게 체력 회복 얼른 하시길요! 고통에 대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저랑 너무 비슷해서.. 뜬금 없는 댓글 하나 남기고 갑니다 : )

  2. 2020.11.04 01:08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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