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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 글기둥 하나 잡고 집순이는 아니지만, 일 없이 집에 있는 날을 좋아한다. 그러니 여행에 그리 들뜨지 않는다. 여행을 앞두면 차라리 정리하고 갈 일상과 떠나기 위해 짐 싸는 일이 부담이 된다. 남편 일정에 맞추어 늦은 여름휴가를 정해 놓고는 그랬다. 집이나 거기나, 결국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인데 뭐 그리 좋겠는가. 유난히 그랬다. 여행 마지막 날인데, 숙소에 앉아서 노을이 물드는 하늘을 보면서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워 눈물이 날 뻔했다. 대단한 여행이 아니었다. 지리산 자락 하동인데, 날은 덥고 지리산이야 광활하지만, 하동은 크지 않은 동네라 먹을 것도 볼 것도 단순하기만 하다. 책을 보다, 졸다 숙소에서 뒹굴거렸고 더위를 피해 걸었던 쌍계사나 소나무 숲은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가기 싫을 만큼 좋다...고.. 2026. 8. 26.
나르시시즘, 악, 회심 읽고 있는 책이, 커피 마시며 친구와 나눈 대화가, 주일 설교가, 툭 내뱉는 아이의 말이 "하나"를 말할 때가 있다. 흔히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고 느낀다. 사실 이런 체험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깨어 있다면, 그분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분은 내 곁에서 수고로이 일하시는 분이다.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내 영혼을 향해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말씀하시는 분이다. 종교(religio)의 어원이 '다시 잇다, 연결하다'이듯, 영성 역시 결국은 연결이며 통합이다. 흩어진 것들이 "하나"를 말할 때, 그것은 다시 이어 붙이시려는 그분의 손길이다. 이즈음 내게 한결같이 "나르시시즘과 죄, 죄와 악, 악과 나르시시즘"을 일깨우신다. 연구소 동반자과정.. 2026. 8. 26.
당근과 카레 늦은 휴가를 떠나며 "뭐 해놓고 갈까?" 물으니 "카레! 카레가 좋지." 해서 현승이가 딱 좋아할 소고기 넣어 한솥을 했다. 카레를 하자니 당근이 등장하고, 당근을 다듬자니 "귀염 삐죽" 초록싹이 존재감 뿜뿜 하네. 그래, 엄빠 없는 집 누리겠다고 자취방에도 가지 않고 (자칭) 놈팽이 일상 즐길 우리 현승이와 함께 해줘. 몇 밤 자고 와도 눈에 띄게 자라 있을 당근 꼬다리, 너는 정말 최고야! 사골국 대신 진짜 맛있는 카레 한솥 해두고 엄마는 집을 떠남! 2026. 8. 24.
옳지, 브런치, 런치 현승이가 친구를 데려와 잤는데, 밥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을 거고 아침은 안 먹을 거라고. 그래? 안 먹나 보자. 늦도록 자고 일어나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 가까워진 시간에 브런치로 오리떡볶이를 해줬다. 사실 수박과 멜론으로 색도 예쁜 과일 접시도 있었다. 아이스라떼까지 해주려 했는데, 커피를 아예 안 마시는 친구라고. 저 아름다운 떡볶이와 과일, 커피까지 해서 브런치 메뉴로 간지나게 사진 찍어서 자랑하려고 들떴었는데... 아들들 앞에서 사진 찍고 난리치는 게 창피해서 급하게 한 장만 남겼다. 주일 점심으로 비빔밥이 자주 나온다. 한 사랑방(구역)씩 돌아가며 점심 준비들을 하시는데. 각자 한 재료씩 준비해 와 뷔페처럼 차려 놓고 담아 비비는 이 메뉴가 나는 참 좋다. 어쩐지 교회 공동.. 2026. 8. 23.
물총새에 불이 붙듯 지난 초여름, 눈 뜨기 싫은 아침을 맞아 잠을 깰락말락 할 때 찰나적 생각들이 지나갔다. 하루가 그냥 갔고, 밤이 되어 누운 것이라면 좋겠다, 아니, 내가 살아야 할 모든 날들이 다 가고 마지막 숨을 위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 뭘 더 바랄까, 무슨 소망이 더 있을까... 그런 아침에 비몽사몽 완전히 깨지 않는 잠을 깨우는 것은 "뻐꾹 뻐꾹" 뻐꾸기 소리였다. "나 여기 있다, 얘야 내가 여기 있단다..." 새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그분의 현존이다. 쓰라린 감정을 곱씹으며 고개를 떨구고 땅만 보며 걷는 날에 "찌지지직뾱뾱" 박새 소리는 시선을 끌어올리고, 마음을 고양시킨다. "얘야, 나 여기 있다, 주께서 사랑하신다..." 지난 겨울 끝에 경안천에서 잊지 못할 경이로운 순간을 맞았다. .. 2026. 8. 21.
잘못 걸린 욥 한참 전에 현승이가 "엄마랑 같은 책을 읽고 얘기 나누는 것"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흥분되었지만 꾹 참고 "그래, 시간 내볼게. 니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정해" 했다. 자발성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 입대 전에 청년부 목사님과 욥기에 관한 책을 읽고 좋았다며, 욥기에 관한 다른 관점의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책 선정은 내가 했는데, 일단 망했고. 결론적으로는 망하지 않았다. 현승이가 전에 읽었던 책은 세월호와 관련한 부끄러운 설교들이 강단을 점유하던 시절, 이 시대의 욥으로 세월호 유가족을 상정하고 쓰인 것이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 즈음 잠시 매주 설교를 찾아 들었을 정도로 몰입했던 목사님인 저자이다. 까닭 없는 고난을 인과응보나 죄의 결과로.. 2026. 8. 18.
해 아래 떡볶이 못 할 날씨는 없다 기온이 37도니 38도니 난리가 나더라도 만들고 싶은 떡볶이가 떠오르면 불 앞에 선다. 짜장 떡볶이를 하자! 한살림에서 할인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냉큼 집어온 짜장소스가 있으니... 냉동실을 털어서 나온 재료를 다 넣고, 맛있는 말을 죄 갖다 붙여보니 "사천해물쟁반짜장떡볶이"가 되었다. 땀뻘뻘 흘리며 더위와 싸우는 우리 집 남자 둘을 잠시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맛이 좋아서 나도 행복했다. 셋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내가 해 아래에서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인사"를 하나 보았으니... "아아, 자~알 먹었다...! (잠시 머뭇) 현승아, 니 덕분에 잘 먹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는 현승이 아버지이다. 모범답안은 "아아, 자~알 먹었다. 여보, 맛있게 잘 먹었어. 더운데.. 2026. 8. 8.
기쁨이 많은 교회 주일 점심시간에 교회 로비에서 교회 친구 둘이 사발면을 앞에 두고 조잘거리고 있다. 화면에 담지 못해서 그렇지 이 언니 오빠 뒤로는 아장아장 걷는 인형 같이 생긴 아기가 팔짱을 끼고 오락가락 하고 있다. 또 다른 인형 같이 생긴 아기는 "어흥, 리엘이 잡으러 가자" 하는 목사님의 기합 소리에 깔깔거리다 자지러지며 아빠 다리를 붙들고 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장면이라니...! 사진 속의 교회 남사친, 여사친들은 제 엄마 아빠가 교회 청소 담당인 날에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교회 두 번 간다아~!!!" 또 어떤 아이는 "나는 이우교회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단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교회 앞을 지나며 "우리 교회에는 기쁨이 많아...!"라고 했단다. 키가 나보다 커질라 하는 초딩 .. 2026. 8. 5.
열대야 산책 더워도 걷는다. 깊은 밤까지 이어지는 열대야에 더울 것을 각오하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 안팎에 갖가지 테마의 놀이터가 여럿인데, 밤 산책의 즐거움은 놀이터에 남은 아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흘리고 간 옷가지며 줄넘기, 장난감 같은 것들과 풀이나 흙으로 만든 놀이의 자국들 말이다. 그런데 없다. 미끄럼 한 번 타면 엉덩이에 화상을 입을 날씨이니 말이다. 아이들의 흔적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없지도 않다! "돌을 옮기지 말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이다. 언젠가 현승이와 산책하다 저 현수막을 처음 보았다. 누가 돌을 옮긴다는 걸까 하다가 동시에 깨달았다. 저 돌을 옮길 광주 시민이 따로 있겠는가. 놀이터 옆의 돌을 놀이하시는 아이들께서 가만 두시겠는가? 한때 놀이터에서 별의별 놀이를 .. 2026. 8. 3.
《신앙 사춘기 너머》 파이팅! 한 주 동안 몇 권이 팔려야 1위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라딘 서점 종교 에세이 중 기독교 분야에서 자주 1위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 전체로 보면 10위 안팎을 오가는데, 제 앞에는 모두 "불교" 책들이 있네요. "종교/역학" 카테고리 top 100에는 6주째 머물고 있고요. 워낙 종이책이 팔리는 시절이 아니니 한두 권 차이로 등수가 결정될 것 같긴 한데 기분은 좋아요. ^^ 부디 꼭 필요한 분들께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2026. 8. 3.
고치지 못할 떡볶이는 없다 목요일 강의를 마치고 서울 사는 아들(ㅋㅋ)을 태우고 돌아온 밤, 엽떡을 시켰다. 디테일이 떨어지는 아들은 토핑 추가도 안 하고, 맵기 강도도 살피지 않고 마구잡이로 시켰다. 하이고, 이건 먹을 수 있는 맵기가 아니었다. 늦은 밤 셋이 앉아 고군분투하다 포기했다. 떡볶이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은 남은 떡볶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먹기"를 포기했을 뿐. "엄마가 내일 맛있게 심폐소생 해주겠찌이...!" 하고 냉장고에 넣었다. "쉽지 않은데…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금요일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현승아, 저녁 뭐 먹을래?" 했더니 "아무거나! 어제 남은 떡볶이 엄마가 다시 만들어 줄래?" 해서... "못해. 캡사이신 매운맛을 잡을 길이 없어." 하고는 냉동실에 얼려.. 2026. 8. 1.
꿈과 영성 생활: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자 계속 짜내서 병이 차오른다. **이를 먹일 건가 보다(3월 꿈). 오른쪽 가슴이 더 커지면서 유두에서 젖이 많이 나온다. 많이 불어서 앞으로 발사되듯 나온다(4월). 젖꼭지 주변에서 흰 가루가 흩날린다(6월). 꿈에 아이를 먹이겠다고 하는데, 그 아이는 서너 살이 되어 젖이 필요치 않은 시기입니다. 그 아이의 필요와 상관없이 “젖이 아까워서 먹이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또는 젖몸살이 생길까 봐 나를 염려한 동기라는 것도 아프게 인정합니다. 그런 동기의 ‘돌봄’이라면 발사하는 무기처럼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요. 그리고 생의 늦은 오후로 가는 시간, 나의 빛과 그림자를 다정하게 끌어안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전처럼 생명력이 넘치지는 않지만, 납작한 가슴 주변에서 우윳가루 같은 것이 흩날립니다.. 2026.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