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산다. 부모가 준 이름 뒤에 데레사, 마리아, 티모테오... 세례명이 따라붙는다. 가톨릭 신자들과 친분을 맺고, 신부님 수녀님께 배우면서 농담처럼 "저도 세례명 하나 지어야 할까 봐요" 했었다. 김영미 데레사입니다, 박선영 카타리나입니다, 문재인 티모테오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내 순서만 오면 라임이 딱 끊어져 단절되는 것이다. "정신실입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세례명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유익이 있는 것도 같다. 평생 자기 이름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을 매개하는 신앙의 선조 한 분을 갖는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도 아녜스, 세레나, 안젤라 형님, 베로니카 형님... 하면서 바로 어떤 유대감으로 연결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세례명으로 부르는 관계 안에서 '라임 단절자'로 앉아 있던 시간이 길다. 좋은 분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어쩐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세례명으로 부르고 불리는 사이에서 세례명 없는 존재였다는 것은 아닐까, 이번 순례 여정에서 어떤 세례명이 친구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했다.
춥고 비오는 뮌헨 공항에서 독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춥고 비 오는' 정도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루 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덥고 목마르다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비행기로 겨울 나라로의 이동이 된 것만 같다. 추운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내 캐리어에는 추위를 방어할 옷이 없다. 독일의 기온이 계속 이렇다면, 망했다! 추위에 취약한 나는 순례고 뭐고 잔뜩 움츠린 어깨와 쪼그라든 마음으로 남편을 원망하며 남은 일정을 지내게 될 것이다. 짐을 싸며 패딩을 챙기고 있는데 "여름 날씨야. 그거 필요 없어" 지나가는 말로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여행지 날씨는 늘 예상 밖에 있는데... 싶으면서도 그 말에 의지해 가벼운 짐을 싸기로 했다. 에라, 잘 걸렸다. 남 탓, 남편 탓을 하자. 원망의 불길로 이 추위를 이기자! "당신 때문이잖아! 뭐가 여름 날씨야?!" 온기라고는 없는 이 차가운 불길, 분열과 미움을 유발하는 원망의 불길을 잠재운 것은 세례명 안나, 세례명 오틸리아 두 사람이었다. 덜덜 떠는 내게 입고 있던 패딩조끼를, 바람막이를 벗어주더니 내복까지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만 추운 게 아닐 텐데, 그들도 따뜻한 옷이 필요한 날씨인데 말이다. 따뜻한 옷을 많이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틸리아의 캐리어는 내 것과 반대였다. 아, 여름 날씨 로마에서 시원한 옷이 없어서 반팔을 사야 했었지!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는 마음, 아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사람에게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주는 마음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내어준 옷을 입고 몸과 함께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남의 옷이니 내 옷이니 따질 겨를도 없고,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옷에 꽤나 연연하는 사람이다. 예쁜 옷 보면 못 참고, 시의 적절하게 옷 입는 것에 집착까지는 아니어도 매어 있는 사람이다. 가톨릭 학교에서 신이 나서 공부하는 내게 아이들이 "엄마 수녀님 되고 싶어?" 하고 물어보는데, 수도자로 살고픈 마음은 늘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옷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엄마는 옷 갈아입는 맛에 살기 때문에 옷 한 벌로 사는 수녀님 생활은 어려워. 내게 옷은 시의 적절하게 나를 드러내고, 나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건네준 옷은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옷"이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연연하는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보이는 것보다 속은 훨씬 더 까칠하고 예민한 내가 남의 옷을 덥석 받아 입는 것 역시 흔한 일이 아니다. 기꺼이, 덥석,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입었다. 집을 떠난 순례지였고, 내 캐리어에는 추위에 맞설 옷이 없었고, 무엇보다 기꺼이 자기 옷을 내어주는 동료 순례자의 마음이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옷을 나눠 입은 친구로 오래 기억될 이름 안나와 오틸리아이다.
비바람 속 찬 공기를 뚫고 도착한 독일의 첫 수도원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다. 이곳에 성녀 '오틸리아'에게 봉헌된 작은 경당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렇다, 내게 옷을 내어준 '세례명 오틸리아'의 바로 그 오틸리아이다. 7세기 경의 성녀 오틸리아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 후작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이 딸을 죽이려했고, 어머니가 몰래 수녀원에 맡겼다. 수녀원에서 자라던 오틸리아가 12세 되었을 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중 성유聖油를 눈에 바르자 눈이 뜨였다고 한다. 이제 더는 '장애인'이 아닌 딸을 곡절 끝에 받아들인 아버지는 귀족과 결혼시키려 한다. 눈을 뜸과 동시에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 결심한 오틸리아가 받아들 일 없었고, 강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큰 성을 딸에게 양도하고 수녀원을 지어주었다. 오틸리아는 거기서 남은 생애 40여 년을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산다. 이런 이야기에 나는 늘 마음이 끌린다. 특히 "평생, 그 후로 남은 여생... 기도하며 은수생활을 했다..." 같은 지점에 그렇다. "눈이 멀다, 눈을 뜬다" 말은 영성생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상징을 담는가. 앞을 보지 못했던 오틸리아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였다. 돌봐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세례를 받으며 눈을 뜬 열두 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영적인 눈을 뜬 성녀는 남은 평생 기도로 살고자 한다. 장애를 가진 딸을 매질하고 버리고 학대했던 아버지도 함께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재산을 양도하며 수녀원을 지어준다.
"눈 먼 이에게 빛을"
오틸리엔 수도회는 오틸리아 연합회(Ottilianer Kongregation) 또는 선교 베네딕도회라고도 불린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선교를 위해 설립된 수도회이다. 한국에 베네딕도 수도원이 시작된 것도 이 수도회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여기 낯선 땅 독일의 수도원 뜰에 서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 지도교수님이신 신부님 덕에 '요셉 수도원'에서 처음 수도원 피정을 경험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을 그대로 사는 분들을 보았다. 불과 30분 전, 여느 농부처럼 밭에서 일하시던 분이 기도 시간에 들어가면 어느새 수도복을 입고 앉아 계신다. 요란할 것도, 성스러울 것도 없는 기도하고 일하는 일상을 보았다. 하루 일곱 번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수도원의 기도 리듬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언젠가부터 그리워하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수도원 영성을 접하고 한 발 한 발 깊이 들어가다 오늘 여기 수도원 순례 여정에 닿은 것이다. 요셉 수도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닿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분리되어 나온 요셉 수도원 역시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우리나라에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 시작된 것은 1907년인데 바로 이 상트 오틸리엔의 선교 덕분인 것이다.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인 백동 수도원(지금의 혜화동)이 북한의 덕원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폐쇄되었다. 전쟁 후 1952년에 왜관에서 다시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의 흔적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마주했다. 독일 수도원에서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보게 되다니! 성당 옆에 박물관이 한국으로 아프리카로 나간 수도자들이 현지에서 수집해온 것으로 채워져 있다. 크지 않은 박물관의 한국관이 어찌나 알토란 같이 꾸며져 있던지. 베네딕도 수도생활에 선교의 소명을 더하여 생긴 이 수도원에서 현지 유물을 수집한 목적은 다름 아니다. 멀리 있어 그려지지도 않는 선교지를 이해하고자 함이고, 이해할 뿐 아니라 이해시키고 더 잘 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는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문화인류학과 문학에 밝았던 그는 일제 강점기를 겪는 조선이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잃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남겼다고 한다. 그 자료를 가지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과 영상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 당시 '겸재 정선 화첩'을 구입하여 독일로 가져갔는데, 나중에 이 작품이 고미술 전문가들에게 알려졌고 시가 50억을 호가했단다. 그런데 2005년 이 수도원에서 무상으로 한국에 반환한 것이다. 돈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이 정도 가격의 유물이라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문화유산이 아니겠는가'하는 판단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청빈을 서원한 수도원의 일일지라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교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다. '선교'보다는 '전도'라는 말에 더 그렇다. 주일학교 시절에 '포도알 붙이기' 시상에서 전도상이 가장 컸었다. 전도하면 한 명으로 포도송이 반을 채울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전도에는 젬병이었다. 요절을 외우고, 예배 시간에 바르게 앉아 있는 것은 할 만한 일이었는데 전도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보니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 교회 가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것에는 내 기질에 더하여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들러붙어 있었던 것 같다. "눈먼 이에게 빛을"이라는 깃발을 들고 선교지나 선교대상에게 공격적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부르면서 뭔가 두렵고도 불편하지만 대충 "택함 받은 은혜"로 포장하여 종교적 열정에의 연료로 삼았던 찬송도 생각나고.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물속에 빠져간다 /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 지금 곧 건지어라) 눈 뜬 자의 자의식이 선민의식이나 영적 우월감에 닿는다면 말이다. 전도에의 열정이 지나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전도 대상자로, 그야말로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다. 사랑이 먼저이고, 사람이 먼저이지 전도가 먼저인가.
'선교 베네딕도회'라니 두 단어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도원'과 '선교'를 나란히 이어붙이면 더욱 그렇다. 수도원은 물러남으로 다다르는 곳이고, 선교는 '나아가는 것' 아닌가.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수동성과 능동성, 침묵과 말의 차이로도 느껴진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어쩐지 이름만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다. 수도원을 소개하는 모든 글에 '선교'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흐릿한 선입견은 수도원 안에 들어서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입구에 있는 수도원 서점에 짐을 두고 발걸음을 떼어 처음 마주한 것은 Erika Grube라는 치료사의 기념비였다. 이 수도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생존자들을 위한 병원과 재활 센터로 사용되었단다. 해방을 맞아 수용소에서 나온 유대인들, 거의 모두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는 몸이었을 것이다. 전적인 돌봄이 필요했을 텐데 즉각적으로 그 일을 한 곳이 여기 상트 오틸리엔이었다니.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대인 임산부들을 위한 출산 센터가 마련되어 수도원 경내에서 유대인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수도원 게스트룸이며 당시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 앞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6년 6월부터 1947년 5월까지만 350명의 아이가 상트 오틸리엔에서 태어났다. 생존자들에게 '베이비 붐'은 삶에 대한 희망의 신호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 승리하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아이들이 미래를 보장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독일 수도원이 유대인 생존자를 위한 병원이 되고, 유대인 아기들이 태어나 보호받는 생명의 요람이 되었다. 수도원이 병원이 되고, 수도원 독방이 분만실이 되는 것이 선교구나! 다시 이곳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올 수 있다면 수도원 손님의 방에서 며칠 머물러 보리라.
숙연해진 마음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느려진 것 같다. 자꾸 무리에서 뒤쳐지게 된다. 어느새 보면 사람들이 간데없고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뒤늦게 박물관으로 들어가 감동을 나누며 관람했는데, 다 돌고 나니 남편을 비롯한 순례객 모두 온데간데없다. 현실감각이 사라진 탓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상황이 무섭게 느껴졌다. 쫓기듯 서둘러 전시관을 나오는데 안내실에 수사님 한 분이 빙그레 웃고 계신다. 무슨 말인가 건네시는데, 잘 봤냐? 같은 인사겠지 싶어 웃으면서 끄덕끄덕 했다. 그리고는 바로 알아들었다. 통역기 반납하라는 말씀이었다. 민망해서 자꾸 웃으며 돌려드리니 따라서 계속 웃으신다. 용기가 불끈 나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청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선교 박물관에서 나와 부슬부슬 오는 빗속에서 수도원 여기저기를 걸었다. 문지기 수사님과의 짧은 만남의 여운으로 마음이 왈랑왈랑 가볍고 기분이 좋다. 다들 어디로 가고 이 넓은 수도원을 전세 내고 독차지 한 느낌도 좋다. 조금 걸어 나가니 초록의 밀밭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농사짓는 수사님들의 일터일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이대로 멈췄으면 싶기도 하다.
<수도 규칙서>에는 문지기 수사에 대한 규칙도 있다. 문지기, 문을 지키는 사람. 베네딕도 성인이 말하는 문지기는 문을 지켜 누구를 들여보내고, 막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말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 환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하고 착한 마음으로 찾는 이에게 응대하는 사람이란다. 생각해보니 수도원에는 담장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빼앗길까 두려울 때 사람들은 담을 쌓는다. 마음에도 담이 있다. 높고 낮은 담이 있어서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선교란 어쩌면 담을 넘어가는 행동이다. 독일 수도원에서 유대인 생존자를 돌보는 일, 동방의 먼 나라에 수도원 개척을 위해 수사를 파견하는 일은 담을 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도 담을 허는 일이었다. 안나와 오틸리아가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내어준 호의는 낯선 개신교인을 친구로 받아주는 담을 넘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 담을 쌓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순례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내 마음에 세워진 높은 담을 본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순례단에 참여하여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는 그럴듯한 말 뒤에는 담이 있다. 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제도로, 교리로 세워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담 자체는 말이다. 문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기꺼이 환대할 마음으로 양순한 얼굴로 앉아 있다면. 낯선 이가 문을 두두릴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분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맞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게 옷을 빌려준 오틸리아는 어릴 적 개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성인이 되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심이 남다른 것은, 버스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이끄는 목소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세례명을 정할 때는 성녀 오틸리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그저 "주님, 제가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하니 이 역시 신비로운 일이 아니겠나 싶다. 신앙의 눈을 뜨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눈을 뜨는 것이다. 나도 기도한다. 주님, 저도 눈을 뜨게 해주세요. 매일 사랑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수도원의 정문에는 말을 주고받을 줄 알고 또 (인격이) 성숙하여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일이 없는 현명하고 연로한 사람을 둘 것이다. 문지기는 정문 옆에 방을 가져, 방문자들이 언제나 응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가난한 사람이 외치거든 즉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거나 또는 "강복하소서" 하고 대답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갖 양순함과 사랑의 열정으로 재빠르게 응대할 것이다."
<수도규칙>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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