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또는 출간입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벌써 나왔는데 이제야 출생 신고하네요. 쓰고 보니 ‘벌써’가 한참 전 ‘벌써’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 나왔던 『토닥토닥 성장일기』가 『우아육아:우아한 육아는 없다』라는 새 옷을 입고 나온 개정판입니다.

『토닥토닥 성장일기』는 둘째가 태어나 네 식구가 된 때 시작하여 큰 아이를 사춘기 기차에 태워 보내며 끝났었습니다. 개정판에 몇 개의 글이 더 추가되면서 작은 아이가 성인이 된 시점까지 담게 되었습니다.

‘육아일기’라고 분류될 수 있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이들 자라는 얘기와 함께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엄마의 마음, 아동치료 전문가의 정체성과 제 아이 키우는 엄마 사이 분열적 고뇌를 담은 에세이도 들어가 있습니다. 저의 저작이 그러하듯 애초 출간을 목적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은데, 아이가 자라는 건 너무나 쉬우며 빠르고, 하루하루 자라는 아이를 관찰하는 재미는 세상 무엇에 비할 수 없어서 “쓰자! 남기자! 기록하자!” 했던 것들이 책이 된 것입니다. 엉성하고 거친 수백 개의 글을 고르고 다듬어 『토닥토닥 성장일기』라는 옷을 입혀주신 (당시 죠이선교회출판부) 이성민 편집장님의 장인정신이 아니었으면 책이 될 수 없었던 흩어진 구슬 서 말이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인생, ‘여정’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생각합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 말 없는 존재로 누워 있었습니다. “얘는 어떤 목소리를 낼까?” 저는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목소리로 대변되는 존재의 색깔이 궁금했습니다. 하나하나 드러나던 존재의 빛깔을 보며 느꼈던 경이로움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가는 가혹했고요. 결국, 자라고 마는 아이인데, 키워내기 위해서 감수하고 빼앗겨야 하는 것들이 허다했습니다. 우아한 밥상까진 아니어도, 세 끼 제대로 앉아서 먹는 것은 물론 자야 할 시간에 자는 것, 그리고 꿈과 희망까지, 고귀한 소명의 삶까지 엉망이 되었으니까요. 그 모든 아픔과 기쁨을 흘려보낼 수 없어서 “일단 쓰고 보자!” 했던 것의 결과물입니다. 과정, 한 존재가 태어나 성인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첫 책 서문에 썼듯 “존재가 여물어간 과정”이지요. 아이의 존재가 여물어가며 부모의 존재는 단단해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과정, 아이 하나 키우며 내 존재의 지하실 바닥을 처절하게 확인하던 여정이기도 하고요. 결국, 인생 여정이었습니다.

새로운 감각의 “죠이북스”에서 중생의 은혜를 입혀주셨습니다. 『오우연애: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연애를 주옵시고』,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두 권의 책과 라임도 맞추고 책 사이즈도 맞추어 『우아육아:우아한 육아는 없다』로요. 대단한 책은 아니지만, ‘과정’으로서의 육아, 한 존재가 여물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는 자부심은 생기네요. 과정, 길, 여정 위에 있는 분들, ‘호모 비아토르’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 학기말과 코스타 준비로 분주한 중에 책이 나왔습니다. 개정판이라 저자가 해야 할 일은 크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책입니다. 교정 보며 다 큰 아이들과 함께 읽으니 감회가 새롭대요.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차차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토닥토닥 성장일기』를 편집하신 간사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아이 키우는 분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책입니다.  위의 글은 페이스북(2022. 7. 22)에 올린 글 그대로 입니다.

 

 

우아 육아

2016년 「토닥토닥 성장 일기」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정신실 작가의 육아 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솔직 담백한 화법으로 전하는 에피소드들을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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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연재했던 글이 묶여 단행본 『신앙 사춘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왜곡된 신앙을 잘 찌르면서 상처 또한 잘 싸맸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출간 이후 있었던 소소한 강연과 만남에서 ‘신앙 사춘기’의 이면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글이 아닌 얼굴을 대하는 만남에서 그 높고 높던 자부심에 금이 많이 갔습니다.  

소도시의 목사님들과 ‘저자와의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독서 모임을 지속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리더 격인 목사님께서 자신 있게 저의 책 『신앙 사춘기』를 소개하고 나눔을 진행하는 동안 적잖이 당황하셨다고 합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불편해하셨다고요. 그런 사전 정보를 가지고 ‘저자와의 만남’에 응했습니다. 제 책을 읽고 불편하셨다는 분들과의 만남이라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이지였만, 주선하신 목사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 자리를 찾았습니다.

모임 장소에서 주차를 하며 진귀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은색 스타렉스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비슷한 위치에 교회 이름만 다른 ‘교회 차’들. ‘저자와의 만남’ 수강자와 엇비슷한 수의 차량이었습니다.

강연 아닌 강연, 저자로서 뭔가 말해야 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책이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흔들리는 동공으로 답해주셨습니다. ‘불편하셨겠죠.’ 저도 마음으로 답했습니다. 강의 내내 어색할 수도 있었겠는데, 마침 저의 아버지가 속하셨던 교단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연세 58세에 저를 낳으셨죠. (더 놀라운 건, 제게 두 살 아래 동생이 있다는 것.) 평안북도 철산 출신 아버지는 총신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신학생이었고, 1.4 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으로 이전한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습니다. 합동과 통합이 갈리기 전 총신 1회 졸업생이었습니다. 신학교 대선배님 이야기로 아이스 브레이킹이 되었습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교회의 딸로 자랐고, 고등학교 때 주일 끼어서 가는 수학여행에 당연히 불참했고, 청년 시절엔 토요일 주일은 밥도 못 먹으며 봉사했다는 이야기. 청년부 주보 편집, 성가대 지휘로 토요일 주일을 교회에 갈아 넣었던 경험. 직장 생활하는데 주일 출근하란 말에 사표 내고 나왔다는 얘기들을 나누며 우리의 신앙 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청년부에서 만난 남편이 결혼 6년 만에 신학교에 가고 모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봉사하면서 신앙 사춘기가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느낌이 맞다면, 이 지점에서 ‘신앙 사춘기’에 대한 불편함은 제로가 된 것 같습니다.

이후 책을 쓴 경위, 글의 행간에 담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분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목회하며 겪는 어려움을 나누었습니다. 목회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목사님과 사모님. 하지만 그것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고충들... 오고 가는 대화의 주제가 자녀와의 갈등으로 모아졌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십니다. 목사가 아닌 아버지, 아니 목사인 아버지로서의 아이들의 삶, 특히 교회와 신앙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걱정하십니다.

주차장에서 본 스타렉스 행렬이 떠올랐습니다. 목사의 아들들이 가장 싫어하는 차종이 스타렉스입니다. 회색 스타렉스. 아빠 차인 듯 아빠 차 아닌 아빠 차 같은 교회 차. 당시 상담하고 있던 어느 목회자 가정, 무엇보다 저의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들과 저는 너 나 없이 사춘기 목사의 아들로 하나 되었습니다. 신앙 사춘기나, 아들 사춘기나. 사춘기는 적나라한 감정을 날것으로 만나거나 때이죠. 아빠 차로 등교하는 것을 그렇게 마다한다는 사춘기 아들은 스타렉스가 부끄러워 싫었던 거라는, ‘아들 사춘기’의 이면을 조금 이해하면서요.

모임을 마치면서 ‘은색 스타렉스 목사님’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사춘기 이후’의 글을 꼭 써달라고요. <신앙 사춘기>가 싸매기보다 찌르기에 치우쳤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 꼭지 한 꼭지 눈물로 쓴 글이라 제 나름 싸매기에 기울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한 눈물, 자기 연민의 눈물이었다 싶습니다. 사춘기는 어른으로 가는 길목의 모퉁이입니다. 사춘기 이후에도 삶이 있습니다.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개정판을 내신 <뉴스앤조이>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말이 개정판이지 달라진 내용은 크게 없습니다. 환갑둥이로 태어나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었던 동생이 목사를 하다 그만두며 쓴 글 하나가 추가된 정도입니다. 다시 한 번 책에 관심 가져주시실 부탁드립니다. 후속 글을 쓰는 것은 일단 미뤄두고, ‘신앙 사춘기 너머’라는 제목의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신앙 사춘기든, 팬데믹이든, 끝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상실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야 할 신앙과 일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나누려고 합니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3960&page=2&total=53252

 

'신앙 사춘기' 너머로 함께 발 내디딜 분들을 찾습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 출간 기념 저자 특강, 2월 25일(금) 저녁 7시 30분 카페바인 필동(온라인 참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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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쓰는 일>이 멀리 뉴저지에 있는 벗 Kelly의 손에 들어가고.

캘리그래피를 잘하는 Kelly가 저렇게 적어 보내주셨다.

또 한 권은 네팔로 날아가 윤선의 손에 들렸고.

히말라야 정기를 받는 인증샷으로 돌아왔다.

슬픔을 써서 내놓았더니 

내어놓은 슬픔에서 날개가 돋쳐 멀리 있는 그리운 벗들에게 가 안겼다.

날아간 안긴 책은 그곳의 향기를 흠뻑 머금은 사진으로 돌아오고.

지금 여기서 나의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몸은 멀리 있지만 여기 함께 있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 있는 오늘,

오늘이 선물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기자의 <슬픔을 쓰는 일> 리뷰입니다. '탐독의 시간'이라는 꼭지 제목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는 그렇습니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감춰야 하는 것들이 많죠. 감춘다고 완전히 감춰지진 않는다는 것을 구권효 기자의 이 글이 증명합니다. 감추며 발견해주길 바라는 저자의 어떤 마음을 이렇듯 울림있는 글로 드러내주었습니다. 아래는 페이스북에 기사를 공유하며 붙인 저의 글이고, 기사는 링크를 클릭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작년 6월,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구권효 기자를 만났다. 엄마 돌아가시고 연구소 일 외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취재원으로 만났는데 무슨 기사에 대한 취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기억만 있다. 아래 글에서 당시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다’고 썼지만, 실은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한 위로였다. 이 글도 그렇다. ‘그랬구나, 참 힘들었겠네’보다 더 좋은 공감은 어렵게 얘기를 꺼내놓은 이야기로 건드려진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는 일이라 생각한다. 구 기자가 만나자마자 들려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시는 애도 일기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때다.

글 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슬픔을 쓰는 일>을 내놓기로 작정했을 때 나 역시 상상하는 독자가 있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 의식’으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물론, 언젠가 부모 잃‘을’ 사람도 상정했다. ‘엄마 돌아가시니 후회 많이 되더라, 그러니 살아 계실 때 잘해.’ 같은 하나 마나 한 말을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구 기자가 읽어낸 바로 그 지점인 듯하다. 이 책 <슬픔을 쓰는>일은 단지 엄마 잃은 슬픔이 아니라 엄마와의 오랜 화해의 여정이다. 조심스런 이런 제안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시거나 부모와의 화해 여정을 시작해보자고.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내가 나로 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 책 <슬픔을 쓰는 일>은 <포스트 신앙 사춘기>이다. 오늘의 나로 살기 위해서 심정적으로 ‘모’ 교회를 떠나왔다. 엄마의 신앙을 두고 던질 수 있는 모든 비난의 돌을 다 던진 끝에 쓴 글이 <신앙 사춘기>이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입에 달고 살던 엄마에게 ‘종교 중독자’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분노를 쏟아부었다. 이제 와 고백컨대, 만만한 엄마는 투사의 대상이었다. 구 기자의 말처럼 ‘모교회’는 ‘엄마-교회’였으니까. 한국 교회에 대한 절망, 젊은 날 한때 존경했던 교회 지도자들에게 느낀 실망과 배신감을 다 투사하여 엄마를 내 앞에 세웠다. 실은 엄마는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적 학대를 할 수 있을 만큼 권력자가 아니었다. 엄마가 내 앞에 계실 때나, 돌아가신 지금이나 마음 한구석 가장 쓰리고 아픈 것은 신앙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를 세워두고 했던 ‘지랄’이다. 언젠가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놈의 사춘기는 지나갈 듯, 지나갈 듯 끝나지 않았고. 엄마와 엄마로 대변되는 옛날 신앙(어쩌면 예전의 ‘나’)과 온전히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슬픔을 쓰는 일>은 어쩌면 참회록이다. 처절하게 미워했던 엄마에게 미안하단 말을 건네지 못한 것. 엄마를 처절하게 미워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 참회록이다. 구권효 기자의 이 글 덕에 뒤늦게 엄마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말할 용기가 생겼다. 여러 번 울컥하며 글을 읽었다. 다 읽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니, 무슨 기자가 이런 글도 잘 써”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런 글이 무슨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엄마와 내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는 마지막 문장에 꽂혔다. 언젠가 뉴스앤조이에서 구권효 기자의 어머니 이야기 읽을 날을 기대해본다. 화해란 게 쌍방 간의 일인데 온전한 화해가 있을까. 부모님이, 부끄러운 한국 교회가 우리에게 사과할 일은 없을 테니. 사과하지 않는 존재들과 화해하는 좋은 방법이 ‘글쓰기’인 것 같다. ‘이런 글’도 잘 쓰는 구 기자의 ‘엄마-교회’와의 화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엄마의 신앙'과 화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탐독의 시간] 정신실 <슬픔을 쓰는 일>(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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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광장> 출연 방송분이다. <슬픔을 쓰는 일>이 대화의 주제였지만, 결국 '감정을 대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연구소 페이지에 방송 다시듣기 링크를 공유하면 올린 글이다. 

 

슬픔에 오롯이 머무를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내적 여정의 시작은 외적인 성취와 성취로 인한 만족감과 인정에만 초점을 맞추던 눈길의 방향을 바꾸어 안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음터의 여러 프로그램에서 자주 인용하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말씀처럼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고요. 즉, 감정에 머무는 것은 내면과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방송에서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감정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감정을 책으로 배우거나 심리학이나 상담 공부를 시작하는 때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건강하게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겠다! 중2 아이들에게서 본 흔한 태도입니다.

물론 표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표현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인식’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감지’하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이 지점에서 취약합니다. 단지 화를 내지 않기 때문에 감정 조절을 잘하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거나, 슬픔 따위는 단 하루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고 자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장례식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일상 회복이 가능할 수 있지만, 경험상 감정을 성숙하게 대하는 태도라 볼 수는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감정에 대해서 성숙한 사람은 지금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것입니다. 진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표현의 방식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충분히 머물고, 흘려보내면 그것은 더는 없는 것이 됩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화내야 할 때 피해버리면, 어디로 가지 않고 내 몸 어딘가를 얼려버려 긴장을 유발하고, 궁극적으로 기쁨을 앗아갑니다.

 

“기독교인이 죽음과 슬픔을 마주하는 슬기로운 방식은?” - CBS 레인보우 팟캐스트

“기독교인이 죽음과 슬픔을 마주하는 슬기로운 방식은?” <2021.08.08>(출연 : 마음성장연구소 정신실 소장)상담자이면서 목회자의 아내인 정신실 작가는 지난 해 3월, 코로나 펜데믹의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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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8월 8일(주일) 오전 8시, CBS광장(98.1/CBS표준FM)에 나옵니다.

질문의 힘, 좋은 질문의 힘을 느낍니다. 북토크나 방송 출연하며 만나는 좋은 질문으로 새로운 말을 꺼내 놓게 되는 요즘입니다. <슬픔을 쓰는 일>이 더는 개인적인 일이 아닌 게 되고 있습니다. 죽음, 애도, 감정과 친해지는 일, 그리스도인의 위로... 제 안에 있었고, 어쩌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질문에 힘입어 비로소 나온달까요. CBS 광장은 팟캐스트로 다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http://cbs.kr/wdze7u


무울~어본 사람? 구응~금한 사람? 안물안궁...

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도 자기 이름 검색한다.

저레벨인 나는 엄청나게 해댄다.

알라딘에서 오전 7시마다 판매 순위 업데이트가 된다는 걸 이번에 알았고.

그래서 아침마다 확인하고 있다.

 

어제(2021년 8월 4일) 순위 확인하고 깜짝 놀람!

순위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던 책이 어디서 튀어나와 7위이다.

웃자고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착한 이웃들이 진심으로 "이건 안 될 일" 하시며 구매 열의를 보였다.

바로 구매하여 인증샷을 댓글로 달아주신 분도.

 

그러나

 

하루 만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여러분의 구매와, 별점 주기, 100자 평 릴레이가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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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만들어 내는 영상과 이미지를 통해 내 글을 다시 본다.
책 전문가들의 눈과 손길을 거친 내 글이 낯선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그랬구나, 내가 이래서 썼지. 이런 시간을 보내며 썼어...”
책 홍보 글인데, 꼭 저자 한 사람을 위한 ‘치유 글쓰기 가이드’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살아 숨쉬는 한 계속 쓰게 될 나를 위해
고이 모셔와 간직한다.

* 자세한 책 소개
알라딘: http://aladin.kr/p/JPzrf
YES24: https://bit.ly/3gRaeS5
교보문고: https://bit.ly/3h1W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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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편집도,
표지 디자인도,
인터뷰 영상 편집도
참 잘해서.....

'잘 함'이 위로가 된다.

영상 첫 페이지에 얼굴이 먼저 나왔다면 많이 부끄러웠을 텐데
이 역시 만든 이들의 감각, 사람에 대한 감각이지 싶다.
시작하는 장면이 좋고,
나는 거기까지만 제대로 봤다.

내 목소리 듣는 일, 내 얼굴 보는 것 나는 잘 못하겠으니.
부디 여러분께서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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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 마감 기일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잡히지 않아 불안이 높아졌다. 이유를 알기에 더 불안했고, 이유도 알면서 바보같이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힘을 냈다. 내 어깨를 눌렀다. 앉아, 앉아서 써! 책의 추천사 써주신 세 분께 감사의 메일을 보냈다. 추천사를 받은 그 순간부터 마음으로 쓰고 있던 감사 인사였다. 어쩌자고 메일창을 열고 앉으면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너무나 감사한데, 감사하다고 말하면 그 감사가 사소해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몇 번을 쓰고 지웠다.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지우고 다시 쓰자니 지나치게 사무적인 것 같아 고민하다 에라, 창을 닫고 말았다. 각각 다른 빛깔로 세 편의 추천사에 위로와 힘을 얻었다. 진심의 감사를 전하려니 글이 통 써지질 않았다. 세 통의 메일, 발송을 완료했다. 추천평을 한 글자 한 글자 쳐본다. 이렇게 한 번 더 탈고를 한다. 성공한 애도란 끝이 없는 것처럼, 이 책에 관한 한 탈고가 탈고일 수 없겠다는 느낌이다. 세 분 추천인 선정 이야기와 편집 과정 이야기가 남아 있고, 어쩌면 이것이 탈고의 정점일 테다.

한 사람의 애도 일기를 읽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가이며, 또한 슬픔으로 인해 깊은 곳으로 내던져진 한 영혼의 신음이요 통곡입니다. 저자는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옛 기억들, 묻어 두었던 상처와 아픔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혼란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때로는 욥기를 읽는 듯하고, 때로는 시편을 읽는 듯하고, 또 때로는 전도서를 읽는 듯합니다. '날것'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았기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읽는 동안에는 나의 아픔과 상실의 기억이 소환되어 공감을 느끼고, 다 읽고 나니 심하게 깨어져 울고 난 후처럼, 아픈 마음이 말갛게 씻겨 있음을 느낍니다.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가 눈물 고인 눈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다른 사람들의 애도 일기를 읽으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 것처럼, 저자의 애도 일기인 『슬픔을 쓰는 일』도 많은 이들에게 상실의 어두운 숲을 지나도록 도와줄 책입니다.

김영봉 외상톤사귐의교회 담임목사,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저자

저자가 밝힌 대로 이 책은 '미친년 넋두리'를 글로 옮긴 책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이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50여 년의 긴 세월을 엄마로서 존재했던 이가 죽음의 문을 열고 떠나갈 때 자식이, 그리고 같은 여성인 딸이 어떤 심리적 과정을 겪게 되는지 저자는 진심을 다해 보여줍니다. 부모의 죽음이 어떻게 원초적 상처를 건드리는지,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던 아픔을 어떻게 직면시키는지, 그리고 상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는지 지켜보면서 저도 못하 한 부모 상실의 애도를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마 이 책이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부모의 죽음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것, 상실로 아파할 세상의 모든 고독한 자식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참 깊고 따뜻한 책입니다.

박미라 치유하는글쓰기 연구소 대표,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슬픔에는 찬연한 아름다움과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에는 우리 삶을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야기했지요. '슬픔에게 목소리를 주라'고요. 저자는 홀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 한 줄 한 줄에는 기억들이, 그리고 그때는 못다 알아챈 어머니의 사랑과 깊은 신앙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슬픔은 갑자기 내 집에 뛰어든 나그네처럼 낯설고 또 어색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저 깊은 밑동을 사정없이 흔들어 댑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생이 커다란 부분이 상실과 슬픔임을 인정하면서도, 내게 다가온 슬픔 앞에서는 늘 어설프고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익숙해져 버린 일상 속에서 생의 진실과 핵심을 바라보게 하는 진정성 있는 초대일 겁니다. 상실과 슬픔이라는 카드를 조심스레 펼쳐 보면, 거기에는 놀랍게도 우리가 당연히 알고 누렸던 행복과 사랑이 우리에게 인사합니다. 저자는 슬픔과 상실을 만나고 친해지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 풀어냈습니다. 영혼의 춤을 추듯 애도의 글쓰기를 해 나갔습니다. 이 글은 너무나 절절하여, 쓴 글이 아니라 써진 글, 숨 쉬기 위해 적어 나간 글이라고 저자는 고백합니다.
그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함께 치유 작업들을 해 왔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깊이 만나게 해 주는 슬픔의 연대성에 대해 관심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의 마음, 엄마 잃은 딸의 마음을 내보여 같으 사실을 경험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 졌다. 이제라도 내 글을 읽으며 뒤늦은 슬픔을 느끼고, 애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누군가를 상정하니 힘이 났다." 그렇게 저자는 끝나지 않는, 혹은 갑작스레 다가오는 생의 상실들을 경험하고 보내 주는 일에 대해, 서로 물길이 되는 동행을 이야기합니다. 이 애도 일기는 적절한 애도를 거치지 못해 늘 마음 아픈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상실을 깊이 살아 낼 위로가 될 것입니다. 너무나 정직해서 서럽게 아름다운 이 고백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길을 내어 자신의 상실을 마주할 용기를 북돋우어 줄 것입니다.

박정은 홀리네임즈대학교 영성학 교수, 『슬픔을 위한 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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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연구소 선생님들에게 어마어마한 출간 축하를 당.했.다. 모임 마치고 백화점으로 끌고 가더니 옷을 고르라고 했다. 출간 행사에 입을 옷을 사줘야겠단다. 평생 입어보지 못한 비싼 블라우스를 구매당했다.

그리고 그다음 모임. 예쁜 케이크 세리머니와 함께 축하 파티였다. 한지로 포장된 뭔가를 또 안겨 주었다. 내가 최근 어느 숲을 걷다 찍은 사진에 엄마 사진을 합성하여 액자로 만든 것이다. 놀랐다는 표현도 감동했단 말도 적절하지 않다. 폭풍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내 뒤에, 내가 사드린 가방 메고 엄마가 서 있다. 이런 축하와 위로를 당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슬픔에 머물러 슬픔을 쓸 수 있는 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_정신실 페이스북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일은 참 어렵다. 感謝 아니고 感思라면. 느낄 감, 생각 사, 감사. 고마운 느낌과 생각을 '감사합니다' 말로 내놓으면 느낌과 생각이 박제되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연구소의 선생님들을 많이 '느끼고 생각’한다. 연구소가 잘 돌아가는데, 그냥 잘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잘 돌아가는데 내가 하는 일이 많지 않다. 하는 일이 많지 않은데 잘 돌아가는 것은 나 모르게 일을 하는 사람들 덕이다. 큰 일 작은 일, 중요한 일 하찮은 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한다. 하나하나 공을 들여서 한다. 어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적 외적 갈등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어려움이 있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좋은 더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 역시 다섯 사람이 각자 알아서 자기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연구소 식구들이 주는 감동은 서로를 향해 늘 품고 있는 감사, 느낌과 생각의 작은 표현인 것을 안다. 저 사진,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느낌과 생각의 결정체다.

 

<슬픔을 쓰는 일>.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써서 내 책, 나만의 책인 듯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쓰기만 해서는 책이 될 수 없다.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感思는 많고 나올 길은 협소하니 약간 체한 느낌이다. 어찌 됐든 '감사'를 충만히 머금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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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다. 그리고 책이 왔다. 현승이가 현관 앞에서 발견하여 들고 들어와서는 "엄마, 책인가 봐!" 바로 커터칼을 들고 달려든다. "잠깐! 청소 다 하고 엄마가 개봉할게." 청소기 돌리며, 걸레질하며, 씻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라앉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했다. 열었다. 출간 과정 구비구비 눈물인데, 이번엔 그냥 예뻐서 눈물이 났다. 책이 예뻐서 눈물이 났다. 

 

채윤이는 온라인 서점에 따로 한 권을 주문하겠다고 한다. 그러고 싶단다. 책이 온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난 채윤이 눈이 퉁퉁 부어있다. 간밤에 엄마 책을 다 읽고 잤다고. 앞으로 다시는 못 읽을 것 같다고.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이 책이 위안이 될 것 같단다. "엄마, 이 책 아무도... 아니,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그게 내 마음이다. 맨 얼굴로 드러낸 내 부끄러움, 우리 엄마의 부끄러움을 아무나에게 읽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나만의 부끄러움이면 괜찮겠는데, 허락받지 못하고 쓴 엄마 이야기라 자꾸 이렇게 안절부절인 것 같다. 그렇구나! 이전의 출간 때와 다른 이 좌불안석은 이거였구나. 마지막 교정 원고를 받았을 때, 추천사를 받았을 때, 책을 받았을 때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엄마, 어떡해. 이제 진짜 나와. 돌이킬 수 없어."였다.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많이 읽히고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 또한 간절하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무나 읽었으면 좋겠다. 아무나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읽은 그 사람이 '아무나'가 아니라 연결되는 '누군가'가 될 수 있을 테니. 책 사진으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바꾸면 그대로 엄마의 품에 안기게 된다. "괜찮여, 엄마 얘기 혀두 괜찮여, 잘혔어." 하는 엄마 목소리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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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슬픔을 쓰는 일’이 요 며칠 자꾸 '슬픔을 내놓는 일'로 읽힌다. 내놓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그렇다. 출간은, 특히 내게 있어 책을 내는 일은 '사연 팔이'이다. 이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모든 글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쓴 사람의 사연이 스며들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잘 알면서도 내놓는 일은 늘 새롭게 감수해야 하는 부끄러움이다.

내적 여정 세미나든 글쓰기나 꿈 작업에서든, 많이 내놓는 사람이 많이 성장한다. 그런 모임에서 내놓아야 할 것은 포장지로 싸고 싸고 또 싸매 뒀던 이야기들이다. 자랑스러운 것을 꽁꽁 싸매 둘 리 없다.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내놓는 순간 취약해진다. 갑옷 안에 감춘 연한 살이라고 할까, 아니 상처 난 피부 같은 것이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로 더 아파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용기 내어 감수하는 사람들이 치유와 성장을 경험한다. 무수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내놓고 많이 망가지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 이것을 안다. 잘 안다. 안다고 쉬워지진 않는다. 알기에 다시 내놓지만, 빛나는 보상이 거저 주어지진 않는다. 부끄러움과 아픔을 다시 마주해야 하고, 모르는 발길에 차여야 할 것도 각오해야 한다.

안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알기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내놓고 얻는 소중한 것을 알면서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으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피할 길도 없으니, 이렇듯 징징거리기라도 하려고. 오늘 종일 마지막 교정을 보려고 한다. 일단 펼치면 금방 할 텐데, 첫 페이지 펼치기가 이렇게 어렵다. 조금만 징징거리다가 여자답게, 힘차게, 냉정하게 펼쳐야지.

일단 서문 전체를 내놓는다. (페이스북에는 엊그제 서문 일부를 찔끔 내놓았다.)

<슬픔을 쓰는 일> 서문

쓰인 글
이 책은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글이다. ‘미친년 글쓰기’라는 원색적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제 와 이름을 붙이자니 ‘애도 일기’이지, 당시에는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글을 한 편 썼는데, 그러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쓰고 나면 읽을 힘이 생겼다. 애도에 관한 세상 모든 책을 읽을 기세로 읽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읽기 위해, 하루를 살기 위해 썼다. 이런 날들을 지내며 ‘미친 정신’이 제정신으로, 쓰이던 글이 쓰는 글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첫 글이 ‘쓰인’ 글이라면, 장례 후 육 개월 즈음에 쓴 마지막 글은 ‘쓴 글’이다. 탈상이다! 힘을 다해 마지막 문장을 쓰고 강한 의지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첫 글과 마지막 글 사이는 쓰인 글과 쓴 글의 그러데이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인 글에서 쓴 글로 바뀌게 된 힘은 사람, 독자에게서 왔다. 나는 어떤 글이든 의식적으로 독자를 세우려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읽을 만한 글이 된다. ‘쓰인’ 글에서는 독자를 상정할 수 없다. 그저 나 자신 쓰는 사람이며 동시에 읽는 사람이었다. 실은 그런 의식조차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습관대로 독자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아니라 아홉 살에 엄마를 잃은 친구, 그리고 중학교 때 엄마를 떠나보낸 제자, 두 여성이 명확하게 내 안에 떠올랐다. 글을 써서 그나마 숨도 쉬고, 밥맛을 느끼게 되니 엄마 잃은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싶었다. 이 나이에, 글로 애도할 힘이 있는 나도 이렇게 막막한데 친구는, 제자는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쓴 글
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애도하지 못한 언젠가’에서 기인한 것임을. 그때 충분히 울었어야 했는데 울음을 삼키고 슬픔을 막아버린 탓에 몸과 마음의 숨 쉴 구멍들이 하나둘 막혀버린 것이 오늘의 고통이라는 것을. 과연 재난 같은 슬픔 앞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조차도 글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애도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어쩌다 내가 글로 숨을 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총을 혼자 누릴 수는 없으니 엄마 잃은 누군가를 위해 어떻게든 끝까지 써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쓰인’ 글이 ‘쓰는 글’로 온전히 탈바꿈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의 마음, 엄마 잃은 딸의 마음을 내보여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 졌다. 이제라도 내 글을 읽으며 뒤늦은 슬픔을 느끼고, 애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누군가를 상정하니 힘이 났다.

쓰게 한 글
내 슬픔을 누군가의 슬픔에 잇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겨났다는 증거다. 연결은 치유의 증거다. 나에게 글쓰기는 치유이자 연결이다. 일찍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된 나를, 엄마마저 잃을까 봐 두려움에 볼모 잡힌 나를, 엄마를 잃고 따라 죽고 싶은 나를 오늘의 나, 생명을 사는 나와 이어주는 것이 글이다. 외로움과 자기연민으로 고립된 나와 아픈 이웃을 이어주는 길이다. 글이 내는 길, 글을 쓰다 열린 길이다. 출간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써야 했을 것이다. 탈고를 핑계 삼아 마지막 글 ‘탈상’을 썼다. 그리고 작정한 바는 없었는데 숙원인 글쓰기 모임을 열었다. 치유 공동체로 일구고 있는 연구소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나를 위한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다. 짧은 강의를 내어주고 투명한 글을 선물로 받았다. 각자의 ‘그때’ 충분히 울고, 충분히 분노하지 못한 기억을 글로 써서 낭독하며 숨 쉴 공간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물론 내게도. 특히 나에게 그러했다. 쓰인 글이 쓴 글이 되고, 이제는 ‘쓰게 한 글’이 길이 되고 있다. 글이 낸 길은 이렇듯 사람들로 가 닿는다. 글이 아니라 글을 읽어주는, 들어주는 사람이 치유인지 모른다.

날아든 글
원고를 다시 읽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출간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피하고 싶었다. 쓰던 그 순간과 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끝까지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더는 미룰 수 없었고, 어느 밤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날 오후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 내가 산다는 것은>이란 제목의 번역물이었다. 작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친필 엽서와 함께였다. IVP 신현기 (당시) 대표님이 직접 번역하신 것이었다. 앞장에는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이 번역본은 정신실 작가의 저술 참고용에 한하여 사용하도록 초역하여 제공한 것으로,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전부 혹은 극히 일부라도 복사는 물론 열람할 수 없습니다’. 번역물을 펼치기 전 그 문구에 머물러 한참을 울었다. 공식 문안일 텐데, 공식적 문장에 이렇듯 위로받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밤, 그 글을 읽으며 제대로 치르지 못한 엄마의 장례식을 마저 치른 것 같다. 차마 읽지 못했던 내 글을 다시 읽고 탈상, 아니 탈고를 할 수 있었다. 쓰인 글도, 쓴 글도, 쓰게 한 글도 아닌 ‘어떤 글’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신현기 대표님께 그때 감정에 복받쳐 차마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말씀을 뒤늦게 전한다. 편집자 심혜인 간사님 아니었으면 블로그 한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할 글이었다. 따뜻한 독자로, 날카로운 편집자로 들어주고 다듬어주고 함께 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출간 과정 자체가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는데, 두 분과 IVP 출판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곁에서 ‘오늘이 선물’이라고 한결같이 노래해 준 남편 김종필과 채윤 현승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아기가 된 엄마를 마지막까지 돌보고 보살폈던 올케 이선영에게 특별한 감사와 미안함을, 매일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웃게 했던 조카들 수현, 우현, 세현이에게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내 동생 정운형. 나와 똑같은 아버지 상실, 엄마 상실을 겪었지만 나보다 강한 사람으로 서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동생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인생의 동지이며 믿음직한 글벗이기도 한 운형아, 고맙다.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나를 낳고, 그리고 또 동생을 낳아준 엄마가 가장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김영봉 목사님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을 비롯한 여러 저서, 박정은 수녀님의 <슬픔을 위한 시간>, 박미라 선생님의 <치유하는 글쓰기>. 일찍이 책으로 만난 좋은 선생님 덕에 애도와 글쓰기에 대해 예습을 할 수 있었다. 세 분 추천사에 미치지 못하는 글의 무게가 부끄럽지만, 그래서 더욱 큰 위로가 된다. 세 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세 분의 글이 나를 준비시켰듯, 나의 글이 어느 독자에게 닿아 온전히 슬퍼하고 다시 살아 살아낼 힘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를 잃은 사람, 언젠가 부모를 잃은 사람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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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긴 장례식'이라며 쓰기 시작한 글.

'애도 일기'라는 보다 객관적인 이름을 붙이고 매만진 끝에

<슬픔을 쓰는 일>이라는 얼굴로 세상에 나온다.

네 개의 최종 표지 시안이다.

 

애도 일기의 시점이 '현재'라면

국화 한 송이 표지가 적절하다.

노란 표지는 말 한마디 필요 없는 슬픔 그 자체이다.

적나라한 슬픔, 그 무엇도 아닌 슬픔 그 자체의 노랑이라면

분홍의 국화엔 엄마와 딸이 어른거린다.

 

이것은 찬란한 슬픔이다. 

보자마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내가 전화통 붙들고 찬송으로 통곡했던 그 순간,

엄마와 동생과 내가 전화기로 연결되었던 시간을 일컬어

맨 처음 남편이 붙인 이름이다.

찬란이라니, 그런 사치스러운 형용이라니.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는 나다.

 

출판사에서 표지를 두고 페이스북에 독자 투표를 했는데,

"찬란한 슬픔"이란 말을 떠올리신 분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중 한 분은 한때 이웃사촌이셨던, 우리 아이들의 털보 아저씨 김동원 선생님.

 

넷 중 어느 하나도 쉽게 버려지질 않는다.

책을 출간하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편집 일정에 맞춰 자연스럽게 부각되는 표지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갈수록 자연스럽게 네 표지 모두 다른 의미로 아름답고 소중해지니 말이다.

어쩐지 이번 책은 내 마음속에 네 개의 표지로 남는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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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사춘기』 출간한 지 1년 하고도 몇 개월 지났다. 개인적, 국가적, 전 지구적인 위기를 통과하는 시간이 끼어서인지 한 10년은 된 일 같다. 아직 좀 살아 있어야 하는 책인데...... 소도시에서 목회하며 6,7년 꾸준히 책모임 해오시는 목사님들과 '저자와의 만남'이란 거창한 이름의 소소한 '만남'을 가졌다. 만남은 좋은 것이다. 만남이 좋다고 말해서는 소용이 없다. 만나봐야 만남이 좋음을 알게 되는 것. 어쨌든 만나보니, 만남은 좋은 것이다. 덕분에 내게도 희미해진 책 신앙 사춘기』를 다시 떠올렸고, 무엇보다 그 아픈 글을 써낸 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독서 모임에서 읽으셨다는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과 , 신앙 사춘기 두 권 모두 보통의 목사님들에겐 불편한 책이다. 어떻게들 읽으셨을까. 보수적인 도시에서 목회하시는 분들께 특히 신앙 사춘기』가 어떻게 다가갈까. 상상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저자를 만나고자 하시니 긍정적으로 보셨던 걸까? 도둑 제 발 저리는 느낌으로  "책이 불편하진 않으셨냐?"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동공과 주고받는 눈빛으로 답해주셨다. "불편했죠." 그래서 '불편'을 기본값으로 깔고 시작했다.

 

마침 우리 아버지가 속하셨던 교단의 목사님들이다. 신앙 사춘기』 쓴 배경 설명을 아버지 얘기로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를 58세에 낳으셨어요." "네~에?" 여기서 다들 놀라시지만 총알이 하나 더 있다. "더 놀라운 얘기 해드려요? 저한테 동생도 있어요. 동생은 환갑 둥이예요."(기본값 '불편감' 20% 제거 : "세상에 이런 일이!") "아버지는 평안도 철산 출신인데, 1.4 후퇴 때 월남하셨어요.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신학생이었고, 월남해서는 부산으로 이전한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습니다. (불편감 10%  또 제거 : "우리 대선배님이시네!") 홀로 목회하시다 늦은 나이에 교회 집사와 목사로 엄마를 만나셔 결혼하셨고, 그렇게 늦게 저희를 낳으셨어요. 저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교회의 딸로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 주일 끼어서 가는 수학여행 당연히 가지 않았고요. 청년 시절, 토요일 주일은 밥도 못 먹으며 봉사했어요. 청년부 주보 편집, 성가대 지휘에. 직장 생활하는데 주일 출근하란 말에 사표 내고 나왔고요. (불편 값 20% 제거 : "태생이 삐딱한 건 아니구먼. 청년 시절로 치면 나하고 비슷하네!") 한 교회에서 만난 남편이 결혼하고 한 6년 후에 신학을 했어요. 모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봉사하면서 신앙 여정에서 지진이 났지요. 내 인생 가장 존경하던 목사님이 저런 분이었어? 교인들 대하는 얼굴과 부교역자 앞에서 얼굴이 이렇게 다르다고?!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신앙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한 10여 년 그야말로 신앙의 사춘기를 겪었고, 그 시절을 통과하고 나서 쓴 글이지요."

 

이런 얘기를 하는 동안 불편감이 조금씩 제거 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무장해제 되었고, 긴장이 사라졌다. 첫 질문하신 목사님께서 "사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불편했는데, 지금 말씀해주신 것으로 이미 다 이해가 되었다"라고 하셨다. 오랜 시간 독서 모임을 이끄셨고, 내 책을 모임에 추천하셨고, 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신 목사님께서도 솔직한 말씀을 하셨다. '책을 추천하고 나눔을 하면서 당황했다. 책을 추천하고 나눔을 준비하며 좋은 반응을 기대했다. 내 기대와 달랐다. 나는 저자를 아니까,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한데 책만 읽은 목사님들의 반응이 달라서 당황했고, 나눔을 진행하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안다는 것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눈 대화는 책 너머의 진실을 전하고 듣는 시간이 되었다. 나도 안다. 의식하고 썼다. 신앙 사춘기』는 치우친 책이다. 부러 목사를 몰아세웠다. 목사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많아서 그랬다고, 서문에 썼지만 더 아픈 뜻도 있다. 내 아버지, 내 남편이 목산데 목사가 욕먹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던지는 낫겠다 싶어 선택한 '위치'인지 모르겠다. 내가 먼저 던지자. 내가 먼저 큰 돌을 던지자. 실은 내 마음은 목사님들, 교회 개혁 따위 모르는 착한 교인들에게 가 있다. 신앙 사춘기』를 써내놓고, 여기 담긴 글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목사들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소비되는 것이 가슴 아팠다.

 

여하튼 불편감이 많이 해소 되었다. 책이 아니라, 글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 나누니 불편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함께 하신 목사님들의 불편감을 얘기가 아니라 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쓸 때도 알았고, 출간하고도 알았지만 "아, 나 그때 일부러 치우치기로 작정하고 썼던 거구나! 맞아, 그랬지. 그래서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어." 치우치기로 작정했기에 더 멀어진 반대쪽을 바라보며 울 수밖에 없었음을 다시 알겠다. 그 반대쪽에는 우리 부모님이 있고,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내가 있고, 목사로 살아야 하는 내 남편이 있으니까. 불편한 곳에 머무르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불편한 곳에 머물러 내가 쓴 글의 이면을, 나의 이면을, 내 마음의 이면을 새롭게 만났다.

 

인사말로 50% 정도의 불편감은 해소되었다. 대화가 무르익어 가면서 나머지 50%가 해소된 것은 물론이고 200%의 공감으로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그 이야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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